“지금 남편의 남편으로 태어나고 싶다”
  • 張榮熙 기자 ()
  • 승인 1998.10.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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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길비&매더 여론조사에 비친 ‘아시아 여성의 내면’
아시아 여성들은 부글부글 속을 끓이는 울화병 환자들이다. 이들은 가정과 사회가 현명한 어머니, 좋은 아내, 부지런한 주부, 지혜로운 중재자 같은 다양하고 힘겨운 역할을 요구하면서도 정작 자신들을 인정하거나 존중하지는 않는다며 불우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아시아 여성들은 미국이나 유럽 여성과 달리 속내를 바깥으로 표출하는 데 서투르고 익숙하지 못하기 때문에 안으로만 분을 삭인다.

이같은 사실은 최근 세계적인 광고 회사 오길비 앤드 매더 아·태 지역 본부가 올 1월부터 3월까지 아시아 지역 12개국(22개 도시)에서 아이를 가진 여성 1천2백명을 조사한 결과 생생하게 드러났다. 오길비 앤드 매더는 여성들의 내면 깊이 자리잡은 감정과 인식 연상들을 끄집어내기 위해 좌담회·일기 작성·사진 찍기와 같은 투영법을 폭넓게 활용했다.

연대 의식 약해 여성해방운동 못 펼쳐

이 조사 결과 그들의 내면에서는 많은 것들이 금방이라도 폭발할 것같이 끓고 있었다. 끓고 있는 것이란 대강 이런 것들이다. 하루 16시간 내내 빛도 나지 않는 집안일을 지겹게 반복해야 한다. 뼈 빠지게 가족을 위해 살지만 가정에서 발언권이 있는 것도 아니다. 늘 가정 평화를 위해 포기와 양보를 종용받는다. 나만을 위한 돈과 시간 투자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나만 처지지 않는가 하는 공포감을 느끼며 각자 자신의 일에 열중하는 가족을 보며 외로움에 떤다. 남편의 애정을 기대하지만, 헤프게 보일까 봐 친밀감을 표현하지 못한다. 적극적이면 남자에게 버림받는다고 생각한다.

아시아 여성들은 남성 위주 사회가 낳은 고정 관념에도 시달린다. △여자는 남자를 보조하기 위해 태어난다(일본) △여자는 다른 집안에 시집가지만, 그 가족의 일원이 되지는 못한다(중국) △새(여자)는 얼마나 높이 날건 항상 둥지로 돌아와야 한다(인도네시아) △좋은 아내는 가장 먼저 일어나 가장 늦게 자야 한다(태국) △딸은 어머니가 걸은 길을 뒤따라야 한다(스리랑카) △어머니는 세상을 자녀들의 눈을 통해 본다(인도) 등등.

이런 갑갑한 현실을 아시아 여성들은 꺼내 보이지는 못한다. 속으로 외칠 뿐이다. 스리랑카 콜롬보의 한 여성은 ‘내게 고맙다는 표현을 조금만 해준다면 나는 더 많이 고마워할 것’이라는 소박한 바람을 말했다. ‘가끔은 내가 엄마라는 사실을 잊게 해달라’(필리핀 마닐라에 사는 여성)‘나를 위한 것을 갖고 싶다고 말할 수 있는 용기가 있었으면 좋겠다’(일본 도쿄) 따위 일방적인 희생을 요구하는 가정의 굴레를 호소하는 여성도 많았다. 나아가‘여성에게 삶은 불공평하다. 여성은 늘 손해 보는 쪽에 서 있다’(말레이시아 콸라룸푸르)‘사회에서 나는 무슨 역할을 하고 있는가. 집 밖에서 말이다’(한국 서울)와 같은 가정과 사회에서 소외된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는 여성도 있었다. 심지어 ‘다시 태어난다면 그냥 남자가 아니라 지금 남편의 남편으로 태어나고 싶다’(인도 델리)와 같은, 남성에게 복수하고 싶다는 외침도 들렸다.

아시아 여성들의 내면에 꿈틀거리고 있는 이런 생각들은 기존 관점과 달리 아시아 여성들이 결코 순종적이지 않음을 느끼게 한다. 그러나 이들에게는 많은 페미니스트들의 기대와는 달리 여성 해방가가 될 자질은 크게 엿보이지 않는다. 이 조사 결과에 따르면, 평범한 아시아 여성들의 경우 ‘여성 동지’라는 개념이 희박해 연대의 필요성을 절박하게 느끼지 않고 있으며, ‘강한 여성’이라는 이미지에도 크게 매력을 느끼지 않는다.

이들은 억압된 현실을 못견뎌 하면서도 그 억압에 정면으로 맞서기보다 ‘집안일만이 아니라 가정을 자기 것으로 한다’라든가 ‘여자는 약할지 모르지만 어머니는 강하다. 고로 내 인생은 긍정적이다’와 같은 자기 최면으로 이겨내려고 한다. 더 나아가 집안에서‘나 없으면 안돼’ 하는 식의 필수 불가결한 존재가 되기 위해 더더욱 몸부림 치기도 한다. 성 해방에 대해 강하게 얘기하지 않는 것도 서양 여성과의 차이점이다.
아시아 여성들이 갖고 있는 이런 뒤틀린 인식은 물론 여성에 대한 억압 구조 탓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제인 캠피온 감독의 영화 <여인의 초상>에서 잘 드러나듯이 19세기 미국과 유럽도 가부장주의가 팽배해 여성들의 삶은 고단했다. 그렇더라도 그것은 지난 세기의 얘기다. 하지만 동양권에서는 20세기가 끝나가는 지금도 실질적인 의미의 남녀 평등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이런 현실은 통계로도 나타난다. 유엔개발계획(UNDP)이 매년 펴내는 인간개발보고서는 아시아 여성이 구미 여성에 비해 지위가 낮고 권한이 작음을 잘 보여준다. 교육 수준, 국민 소득, 평균 수명 같은 지표의 남녀간 격차로 측정한 여성 관련 지수( 남녀 평등 지수)를 보면, 총 1백63개 나라 가운데 10위권에 든 나라는 전부 북미와 북유럽 국가였다. 아시아 지역에서는 일본· 싱가포르·홍콩·한국·태국·말레이시아 정도가 50위권에 들었을 뿐이다(48쪽 도표 참조).

여성이 정치·경제 활동과 정책 과정에 어느 만큼 참여하는가를 측정하는 지수인 여성 권한 척도는 더 열악했다. 중국·일본이 30위권에 들어 겨우 체면을 유지했을 뿐이다. 한국은 83위로 97년(73위)보다도 더 나빠졌다. 아시아 나라들은 바하마(15위), 트리니다드 토바고(17위), 바베이도스(18위) 같은 ‘후진’나라들보다 못한 것이다.

한국 여성의 정치·경제적 권한 세계 83위

여성의 지위는 아시아 나라 사이에서도 조금씩 차이를 보인다. 싱가포르·홍콩·말레이시아·태국·한국·일본·중국 같은 동남아시아와 동아시아 나라의 여성 지위는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 반면 인도·파키스탄·스리랑카 같은 서남아시아 나라들의 여성 지위는 매우 열악하다. 공식으로 4명의 부인을 인정하는 모슬렘(회교)의 인습과 카스트라는 신분 제도 등이 여성을 심각하게 억압하고 있다. 서남아시아에서의 가정 폭력은 신부를 불태우는 것에서부터 아내 강간에 이르기까지 야만적인 형태를 취하고 있다. 인도에서는 결혼 지참금이 충분치 않다는 이유로 신부가 죽임을 당한다. 모슬렘이 유교보다 더 혹독하게 여성을 학대하고 있는 셈이다. 오길비 앤드 매더 조사에서 인도와 스리랑카 여성들은 오랜 억압에 무기력해져 최대의 기대치가 남편으로부터 답례받기를 원하는 수준이었지만, 싱가포르·대만·홍콩·한국의 여성들은 자아 실현과 충족감을 원했다.

서남아시아 국가들에 비해 나은 편이라고는 하지만, 일본과 한국은 통계치와 여성들의 실제 지위와는 괴리가 큰 나라로 꼽힌다. <시사저널> 마닐라 주재 편집위원 김진화씨는 “세계 여러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비슷한 경제 수준을 가진 나라에 견주어 일본과 한국 여성들의 지위가 유독 뒤떨어진다”라고 지적한다.

이와 달리 동남·서남 아시아에는 필리핀의 코라손 아키노 전 대통령, 글로리아 마카파갈 아로요 현 부통령, 홍콩 행정청의 앤슨 찬(陳方安生) 부장관, 인도네시아의 야당 지도자 메가와티 수카르노푸르니, 인도의 인디라 간디 전 총리·소냐 간디 국민회의 당수· 마네카 간디 복지장관, 파키스탄의 베나지르 부토 전 대통령, 스리랑카의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전 총리와 찬드리카 반다라나이케 대통령(모녀간) 같은 여성 정치·행정가가 활약했거나 활약하고 있는 것이다. 이들 가운데 상당수가 아버지나 남편의 후광을 등에 업고 출세했다는 비난이 없지 않지만, 그 나라 국민들이 이들을 기꺼이 받아들이거나 선거로 뽑았다는 점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일본은 경제 수준에서나 인간 개발 지수(8위) 수준에서나 선진국 반열에 올라 있지만 구미 선진국에 비해 여성의 지위가 형편없다. 우선 남녀간 임금 격차가 매우 크다(남성의 51%). 여성 권한 척도를 좌우하는 지표들은 더 한심하다. 일본은 여성 국회의원 수(7.7%), 여성 지도자·관리자 수(8.9%)가 매우 적어 선진국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색할 지경이다. 스웨덴(40.4%), 노르웨이(36.4%) 같은 대부분의 서유럽 선진국에서는 여성 의원이 20%를 넘는다. 2∼3년 사이 지방 의회로 진출하는 여성이 늘어나고 첫 여성 사무차관이 나오는 등 일본도 변화하고 있지만 여전히 ‘남성 사회’다.

물론 한국은 일본보다 한술 더 뜬다. 여성 공무원이 전체 공무원의 28.7%를 차지하지만 5급(사무관) 이상 인력은 3.2%에 그친다. 1∼3급은 1%도 되지 않는다. 김송자 노동부 국장이 1급인 서울지방노동위원장에 임용된 것이 얼마 전의 일이다. 교원도 마찬가지다. 여성 교사는 전체 교원의 절반(46.5%)에 가깝지만, 교장·교감은 각각 5.0%, 6.1%에 그친다.
그 많은 고학력 여성 어디서 무얼 하나

남성의 고유 영역으로 치부되는 정치와 경제 분야는 더하다. 정치적 동등성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잣대인 여성 국회의원 수가 11명(3.6%)에 불과하다. 세계 1백31개국 평균 비율이 11%(91년 기준)이고 보면 세계 최하위 수준이다. 이 가운데 지역구 의원은 2명(추미애·박근혜 의원) 뿐이다. 수적 열세이기는 매한가지이지만 좋은 평가를 받고 있는 여성 지방 의회 의원이 상당수 생겨나고 있는 것에 위안을 받아야 할 판이다. 이영자 교수 (가톨릭대·사회학)는 “한국 여성들은 그동안 정치 공간에 없었다. 요구 사항만을 ‘정치 이슈화’했을 뿐이다”라며, 공천 할당제 관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여성의 참여를 구조적으로 막고 있는 정치 제도를 개혁하는 일이라고 주장한다.

경제 분야에서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다. 종업원을 1인 이상 고용해 기업을 꾸리고 있는 여성 경제인은 19.3%(30만명)이다. 수의 열세보다 더 큰 문제는 여성 경제인이 경영하는 기업들이 대부분 영세하고 숙박 음식업·개인 서비스업 등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대부분의 여성 노동자가그렇듯 여성 경제인도 경제의 주류에 끼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한국 정부는 유엔 여성차별철폐위원회에서 심의를 받았다. 이 자리에서 정부는 위원회로부터 지난 10년간 법과 제도상으로 여성 지위 향상을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서 대표단은 A.아카라는 위원으로부터 ‘그 많은 한국의 고학력 여성들은 다 어디에서 무얼 하고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는 질문을 받았다. 정치·행정·경제와 같은 의사 결정 직에서 여성의 참여가 매우 낮다는 점을 질타한 것이다.

물론 이 점을 한국 정부나 여성계도 잘 안다. 한국여성의전화연합 신혜수 회장(한일장신대 교수)은 “여성계와 정부는 95년 베이징 여성대회 이후 줄곧 가장 뒤떨어진 분야인 정치·행정·경제 분야에서 주류 세력이 되기 위해 애써 왔다”라고 말한다. 최근 ‘정치 개혁을 위한 대토론회’‘여성 기업 활동의 현황과 정책 과제’같은 행사를 잇달아 연 것도 이런 노력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여성의 관점에서 정책을 조율하기 위해 남성이 점령하다시피 한 많은 ‘남성 부처’와 싸우고 있는 대통령 직속 여성특별위원회의 장성자 정책조정관도 “법률적 남녀 평등은 눈앞에 왔지만, 실질적 평등은 아직 요원하다”라고 말한다.

아시아는 언제까지 여성 인권의 사각 지대로 남아 있을 것인가. 이를 용납하지 않겠다는 기운은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의 많은 여성·인권 단체들이 국제 기구와 연대해 자국 정부와 남성들을 압박하는 움직임이 거세다. 이보다 더 중요한 점은, ‘내 인생의 주체로서 나 자신에 대해 확신을 갖고 살겠다’는 보통 여성들의 내면적 반란이 이미 일어나고 있다는 사실이다. 한 나라 여성의 지위는 그 나라 인권 수준이나 다름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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