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화 작가들 “차라리 붓 꺾겠다”
  • 成宇濟 기자 ()
  • 승인 1997.08.0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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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세·박산하 씨 검찰 소환에 작가들 반발…청소년보호법 등으로 앞길 ‘캄캄’
구속되고 안 되고의 문제가 아니다. 엄연한 문화 장르 하나가 침몰 위기에 처해 있다. 창작하는 이들이 의욕을 잃고 붓을 놓고 있는 데다, 그 유통망마저 괴멸되어 가고 있다. 90년대 들어 21세기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만화가 지금 이 지경에 와 있다.

이같은 사태는 지난해 청소년보호법 제정에 관한 논의가 시작되면서 이미 예견되었다. 지난 7월1일 청소년보호법이 발효된 후 한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간의 우려는 순식간에 현실로 나타났다. 7월 초 일진회 사건이 터지면서 일본의 불법 복제 만화가 청소년의‘폭력 교과서’로 지목된 다음, 비판의 화살이 만화계 전체로 금방 날아갔고, 만화가 이현세(43)·박산하(30) 씨가‘음란물’‘폭력물’ 제조 혐의로 잇달아 소환당하기에 이르렀다.

문제는 이같은 일이 만화가 1~2명이나 작품 1~2편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만화라는 장르가 싸잡아 비난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데 있다. 만화가들은 이 사태를 문화에 대한‘공안 정국’이라 규정하고, 연일 뜨거운 토론을 벌이는 PC통신의 젊은 토론자들은‘현대판 분서갱유’로 표현한다.

툭하면 청소년 문제 ‘원흉’으로 지목

놀라운 사실은 이 사태가 국제 애니메이션 축전이 4개씩이나 잇달아 열려‘한국 애니메이션의 중흥 원년’이라 불리는 올해 여름에 터졌다는 점이다. 한켠에서는 정부(문화체육부)가 적극 지원하는(올해로 3회째를 맞는 서울국제만화페스티벌은 2회까지 문체부가 주최했다) 성대한 축전이 진행되는가 하면, 다른 한켠에서는 국가 기관인 검찰이 그 축전의 젖줄이자 뿌리인 출판 만화에 사법의 칼을 들이댄 것이다.

박산하씨는 1시간 동안 조사만 받았고, 이현세씨에 대한 사법 처리도 일단 유보되었으나, 두 사람에 대한 검찰 소환이 일으킨 파장은 만화계를 송두리째 뒤흔들었다.‘그로기 상태’에 있는 한국 만화계에 결정타를 날린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일본 만화가 한국 시장의 60% 이상을 점유하고, 청소년보호법까지 발효되어 총판이나 서점 운영자들이 만화 유통을 꺼리는 터였다. 어린이·청소년물과 성인물을 엄격하게 구별해 진열·판매해야 하고, 위반하면 3년 이하 징역이나 2천만원 이하 벌금을 내야 하기 때문에 우량이든 불량이든 만화 자체가 서가에서 빠져나가는 중이었다.

서울 교보문고의 한 매장 관계자는 “<천국의 신화>는 검찰에 의해 음란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모두 치웠다. 앞으로 교보문고에서는 교육용 만화만 진열할 예정이다”라고 밝혔다. 성인 만화가 대여점이 아니라 서점의 책으로 발돋움하려다 꼬리를 물고 이어진 일련의 사태로 또다시 주저앉고 만 셈이다.

게다가 이현세·박산하라는 두 만화가가 갖는 대표성 때문에 만화계가 받은 충격은 더 컸다. 이씨는 83년 <공포의 외인구단>을 발표하면서 만화를 성인 문화로 끌어올린 명실 상부한 간판 스타이고, 박산하씨는 95년에 완간한 <진짜 사나이>를 통해 청소년들의 스타로 떠올랐다. 지금은 판매가 거의 끝났으나, <진짜 사나이>(전12권)는 2백만부 가까이 팔려나간 것으로 알려졌다. “검찰이 나를 왜 소환했는지 지금도 이해가 되지 않는다. 검찰에서 들은 말은‘다른 만화에 비해 폭력적인 부분이 별로 없다. 앞으로 문제가 생기지 않게끔 조심해 달라’는 게 전부였다”라고 박씨는 말했다. 검찰의 의도야 어떻든, 이들이 소환당함으로써 만화계가 받은 상처는 더 깊었다.
지난 2월부터 출간되기 시작한 <천국의 신화>는 이현세씨가‘마지막이라는 각오’로 10년 전부터 준비해온 작품이다. 이씨는 앞으로 5년 동안 고조선에서부터 발해에 이르는 한국 고대사를 백권의 만화로 복원할 계획이었다. 만화적 상상력으로 만년 전 한반도에서 벌어진 역사를 쓰겠다는 그의 야심찬 계획이 예기치 못한 암초에 부딪혀 좌초할 위기에 놓인 셈이다.

지난 7월23일 검찰에 출두한 그는 “다른 작품도 아니고 <천국의 신화>가 음란·폭력 시비에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납득이 가지 않는다. 창작을 제한한다면 작가 생활을 그만두겠다”라며 당혹스러워했다.

“역사가 씌어지기 이전 인류에게는 생존과 생식만이 지상 과제였다. 사실성에 기초를 두고 작품을 쓰는 동안 독자들이 폭력과 음란한 장면을 즐기기 위해 이 작품을 보지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라고 이씨는 말했다. 그는‘성인용’과‘소년용’을 동시에 펴내고 텔레비전·극장용 애니메이션과 캐릭터 사업에 이르기까지 상품으로서 <천국의 신화>의 부가가치를 극대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의 역사 만화와 본격적으로 경쟁해 보겠다던 이씨의 의욕은 지금 많이 식어 있다.

“만화를 작가의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이같은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만화를 불량 식품이나 마약처럼 만만하게 생각하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다”라고 만화가 박재동씨는 말했다. 만화가들 사이에‘만만해서 만화’라는 자조적인 말이 있을 만큼 만화에는 늘‘천박하다’‘애들이나 보는 것이다’라는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한국 만화사는 곧 수난의 역사라 해도 틀린 말이 아니다.

“만화가로서 요즘처럼 후회스러운 적 없었다”

유명 만화가 가운데 심의 혹은 규제와 관련해 웃지 못할 에피소드 한 편을 갖지 않은 이가 없다. 70년대에는 성인 만화를 출판했다는 이유로 고우영씨 같은 만화가들이 정보기관에 끌려가기도 했고, 한국을 대표하는 캐릭터로 성장한 아기 공룡 둘리도 엄격한 규제의 산물이었다.‘만화에서는 어린이가 어른에게 반말을 할 수 없다’는 규제를 피하려고 동물을 등장시킨 것이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처음에는‘어른을 놀리는 장면이 많다’는 이유로 불량 만화 판정을 받았다.

“30년 동안 만화를 그려 왔으나 지금처럼 후회스러운 적이 없었다”라는 만화가 허영만씨의 말은, 만화계의 최근 분위기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사회가 어지러울 때마다, 만화가 혼란의 주범인 양 표적이 되어왔기 때문이다. 개개의 작품이 문제가 되는 문학이나 영화 같은 다른 장르와 달리 만화는 언제나 장르 자체가 문제시되곤 했다.

만화가 21세기 산업으로 한껏 뜨고 있는 데다, 90년 이후 전국 10개 대학이 만화과를 개설해 고무적인 분위기가 널리 확산되던 터에 생긴 일이라 만화계는 이 사태를 더욱 충격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어떤 분야든 다 오류가 있게 마련이다. 왜 청소년 문제의 원인을 만화가 다 뒤집어써야 하는가. 만화가 가장 약한 장르이기 때문에 그렇게 몰아붙이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지우기 어렵다.” 그동안 하도 많이 당해서 그런 느낌을 갖지 않을 수 없다는 만화가 이두호씨의 말이다.

만화는 지난 수십 년 동안 창작과 표현의 자유를 단 한 차례도 누리지 못했다고 해도 크게 틀린 말이 아니다. 다른 장르가 표현의 자유를 위해 싸우면 부러워하기만 했고, 만화에 대한 비판이 일면 속앓이만 했을 뿐 변변한 항변조차 못했다. 그러나 최근 만화가들 사이에 형성된 기류는 창작의 자유 문제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청소년보호법 제정과 일진회 사건, 그리고 만화가 검찰 소환이라는 일련의 사태가 만화를 또다시‘뒷골목 문화’로 만들 수 있다는 위기감에 휩싸인 것이다.

만화가들 사이에서는‘이제 더 밀릴 곳도 없다. 여기서 밀리면 죽는다’는 반응도 나오고 있다. 시위를 포함해 가능한 모든 방법을 동원해 대처해 나가겠다는 것이다. 두 만화가가 검찰에 불려간 7월23일 오후 한국 만화계를 대표하는 이두호·박재동·허영만·이희재·황미나·권영섭 씨 등은 비상대책위원회를 열어 이같이 결의했고, 젊은 만화가들은 일간지 광고 등에 필요한 기금 마련 운동을 벌여 그날 하루에만 1천2백만원을 모았다.

만화가들의 결의에는 상황이 더 악화한다면‘모두 붓을 꺾겠다’는 극단적인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이들은 작가의 창작 의욕과 유통 시장이 위축되면 만화의 국제 경쟁력은 물론, 만화가로서 생존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보고 있다.

만화가들의 눈에는 지금 화려하게 펼쳐지고 있는 애니메이션 축전들이 모두 공허하게만 보인다. 만화의 미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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