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뻥축구’의 비밀을 알려주마
  • 주진우 기자 (ace@sisapress.com)
  • 승인 2004.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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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대표팀 졸전, 썰렁한 프로 리그, 대표팀 감독 경질·재선임, 벼락치기식 월드컵 준비…. 한국 축구가 청사진도 시스템도 없이 수렁에서 허우적거리고 있다. 그 원인과 해결책을 11개의 숫자로 풀었다.
‘또‘0’…힘드네’(동아일보), ‘골 대신 속만 터진 밤’(조선일보), ‘타오르지 못한 성화’(한겨레). 국가대표 축구팀이 파라과이와 평가전을 치른 다음날인 4월29일, 일간지 스포츠 면은 글짓기 경연장을 보는 듯했다.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이면 동아일보 스포츠 1면 편집을 담당하는 이지훈 기자는 답답하다. 이기자는 “주로 대표팀이 질 경우를 대비해 제목을 준비해 놓는데 단어가 바닥났다”라고 말했다. 이기자는 선수들의 일그러진 표정 사진을 먼저 찾고 제목을 다는 요령이 생겼다고 한다.

가판에서 제목 장사를 해야 하는 스포츠 신문사 편집 기자의 부담은 더 크다. 굿데이 편집부 노재필 기자는 “‘헛발질’ ‘고질병’ ‘뻥축구’ 등 쓸 말은 다 써먹었다”라고 말했다.

2002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창조하며 전세계를 온통 붉게 만들었던 한국 축구. 올림픽 본선 진출 티켓을 거머쥐었지만 한국 축구 발전과는 거리가 있다. 월드컵으로 달구어진 축구 열기도 식은 지 오래다. 축구 발전을 위한 청사진과 시스템은 전혀 마련되지 않았다. 대표팀은 졸전을 거듭하고 프로 리그 경기장은 텅텅 비었다. 한국 축구 위기론이 다시 고개를 쳐들고 있다. 축구협회 고위 임원조차 “한국 축구가 서서히 몰락해 가는 느낌이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이후 축구 붐, 국가 대표팀 졸전, 프로 리그 열기 냉각, 한국 축구 위기론, 아시안컵 전후 감독 경질, 감독 재선임, 월드컵 대비 벼락치기…. 한국 축구는 4년 주기의 악순환 궤도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축구는 왜 악순환의 수렁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일까. 그 원인과 대안을 11개의 숫자로 풀어 점검해본다.
축구협회는 축구 발전을 위해 존재한다. 하지만 대한축구협회는 축구 발전에 앞서 정몽준 회장이라는 대명제가 존재한다. 축구협회 임원을 지낸 한 인사는 “협회 행정과 대표팀 경기가 모두 정치인 정몽준의 행보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라고 말했다.

축구협회의 한 회의에서 정회장은 “월드컵에서 4강에 들었는데 올림픽 메달도 가능하지 않겠느냐”라고 말했다. 이후 협회의 모든 시계는 올림픽에 맞추어졌다. 올림픽 예선 이란전을 위해 협회는 3억원을 투입해 전세기를 띄웠다. 축구협회의 한 직원은 올림픽팀에 대한 지원이 월드컵 때보다 파격적이라고 말했다. 올림픽팀에 이토록 집착하는 나라는 없다. 이탈리아는 은퇴한 바조를 와일드 카드로 올림픽 대표팀에 뽑을 가능성이 높다.

월드컵 4강 덕에 유력 대권 주자로 도약했던 정회장. 올림픽에서 메달을 따 노무현 대통령 지지 철회라는 부정적 이미지를 씻고 정치적 복권을 노리는 것 아니냐는 지적은 지나친 비약이 아니다. 지난 대선에서 민주노동당 권영길 대표는 “정회장은 축구협회를 축구인에게 돌려주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원로 축구인 허승표씨는 “정회장은 축구계를 떠날 사람이다. 정회장이 축구를 이벤트로 활용하고 있어 한국 축구 발전에 한계가 있다”라고 말했다.
정회장이 대선 가도에 나선 데다 ‘실세’ 남광우 총장의 사망으로 조중연 부회장이 협회에서 전권을 휘두르고 있다는 것이 공통된 목소리다. 그러나 조부회장은 “나는 대외 활동만 한다”라고 말했다.

월드컵 이후 축구협회는 축구 발전에 대한 청사진을 내놓지 못하고 대표팀 경기력 저하를 방치하고 있다. 코엘류를 퇴임시켜 비난의 불을 껐을 뿐이다. 가장 무거운 책임을 정회장과 더불어 조부회장이 져야 한다.

조부회장은 고려대 학맥을 주축으로 중동고-해병대-현대로 이어지는 자신의 인맥으로 친정 체제를 구축했다는 평을 받는다. 노흥섭 전무·김진국 기술위원장·조정수 상벌위원장·정건일 프로연맹 사무국장이 조중연 사람으로 꼽힌다. 특히 대표팀은 조중연 인맥으로 채워졌다. 조부회장은 올림픽팀 김호곤 감독과 이상철 수석 코치, 대표(월드컵)팀 최강희 코치를 현대호랑이구단 감독 시절 코치와 선수로 데리고 있었다. 대표팀 박성화 코치는 포항 감독과 청소년대표팀 감독 때 낙제점을 받았으나 조중연 사람이어서 살아 남았다는 것이 축구계의 중론이다. 박씨는 특이하게도 청소년대표팀 감독 직을 겸하고 있다.

코엘류와 함께 대표팀을 이끈 국내 코칭스태프는 공공연히 감독과의 갈등을 외부에 드러내 왔다. 축구인들은 한결같이 “김호곤·박성화·조영증 모두 프로팀에서 실패한 지도자들이다. 대표팀이 실업자 구제소냐”라고 꼬집었다.

대표팀이 죽을 쑬 때마다 축구협회와 언론사 게시판은 조부회장 욕으로 도배된다. “팬들이 왜 그렇게 조부회장 욕을 하는가”라는 질문에 조부회장은 “애정 표현으로 본다”라고 말했다.

3. 세 번째 외국인 감독 코엘류

그는 실패했다. 코엘류의 실패로 한국 축구는 중흥기 2년을 까먹었다. 조중연 부회장은 “누가 미래를 볼 수 있다는 말인가”라고 말했다. 그러나 코엘류의 단명은 예고되어 있었다.

협회는 히딩크 복귀를 대비해 별 고려 없이 코엘류를 선임해 아시안컵까지만 계약을 맺었다. 1996년 박종환, 2000년 허정무 감독이 아시안컵 부진으로 경질되었다. 올해는 대표팀이 출전하는 아시안컵(7월17일~8월7일)과 올림픽팀이 출전하는 올림픽(8월11일~28일)이 잇달아 열린다. 대표팀 주전이 올림픽팀 와일드카드로 빠지는 상황에서 대표팀이 아시안컵에서 좋은 성적을 내기는 어려워 보인다.

이회택 축구협회 부회장은 “외국인 감독을 불러 시스템을 배우려 하지 않고 1년 만에 뽑아먹으려는 도둑 심보를 보이고 있다”라고 말했다. 비싼 수업료를 지불했지만 코엘류에게 배운 것은 거의 없다. 코엘류를 보내는 과정 또한 영 개운치 않았다. 협회는 ‘자진 사퇴’라고 발표했지만, 코엘류는 반박했다. 협회가 남은 임금 24만 달러를 지급하기로 한 것을 보면 해임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다.

전 기술위원장 박경화 수원대 교수는 “코엘류의 남은 임기 동안 한국 축구에 대한 책이나 보고서라도 쓰게 했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박씨가 1998년 일본 J리그 오이타 팀을 이끌다가 중도 하차했을 때 팀은 남은 계약 기간 동안 유소년 팀을 가르치게 했다고 한다.
외국 축구 전문가들은 한결같이 2002년 월드컵 4강 신화를 잊으라고 주문한다. 김태형 선수는 “팬들 수준이 높아져 경기하기가 조금은 부담스럽다”라고 말했다.

팬들의 기대치는 한껏 높아졌고, 선수들의 플레이에는 겉멋이 들었다. 선수들은 좀더 성실해질 필요가 있다. 국민은 선수가 못한다고만 하지 말고 경기장을 자주 찾아야 한다. 4년에 한 번만 이겨달라고 하는 것은 무리한 요구다. 한국 축구의 목표는 다시 월드컵 본선과 16강 진출이다.

5. 5개 스포츠 신문의 한계

축구협회와 정회장을 비판하지 못하는 것이 물론 스포츠 신문 5개 사에게만 책임이 있는 것은 아니다. 모든 언론이 문제다. 축구 칼럼니스트 오은 스위니는 “한국 기자들은 왜 정회장 눈치만 보고 한마디도 못하는가”라고 말했다.

정회장에 대한 비판을 용인하지 않는 현실이 축구 발전에 걸림돌로 지적되고 있다. 한 축구 기자는 “정회장 비판 기사를 썼다고 경기장 출입 카드를 주지 않았다. 비판을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발전도 없다”라고 말했다.

6. FC 서울 주력 선수 6명 차출

정조국·김동진·최원권·박용호·이정열·박동석.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된 FC 서울 선수 여섯이다. 주력 6명이 빠지고는 팀을 꾸려갈 수 없다. 허약한 선수층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양 LG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을 위해 프로 축구는 죽으라는 말이냐”라고 말했다.

한국 축구는 대표팀 위주로 굴러간다. 대표팀 경기가 아니면 관중이 들지 않는다. 대표팀이 프로 축구의 인기를 상쇄하는 구조인 것이다. 프로 축구 발전이 대표팀 전력 강화로 이어지는 시스템이 갖추어져야 한다. 대표팀 20명만을 특공대로 만드는 시스템에서 하루빨리 탈피해야 한다.
월드컵 이후 대표팀이 해외에서 치른 경기는 일곱 경기다. “한국 축구가 발전하고 외국에서도 능력을 발휘하려면 자주 외국에 나가 경험을 쌓고 세계 축구와 교류해야 한다.” ‘축구 황제’ 펠레가 <시사저널> 인터뷰(제719호)에서 강조한 말이다.

재일동포 축구 전문 프리랜서 신무광씨는 “한국이 오만과 베트남하고만 경기를 하고 있다. 강팀에 패하더라도 싸워야 발전한다는 히딩크의 교훈을 잊었다”라고 말했다. 일본 대표팀은 선수들 모으기도 편하고 유망주가 아니라 진짜 A팀과 승부를 겨룰 수 있다는 점 때문에 유럽 원정에 자주 나선다.

8. 협회 8개 부서 운영 `기형적`

경기국·국제국·홍보국·사업국·기획실·지원부·기술교육부·심판실. 축구협회는 이렇게 8개 부서로 이루어져 있다. 하지만 행정 파트로 힘이 쏠려 있고 기술 파트는 구색 맞추기에 지나지 않는다. 한 쪽 날개만으로는 날 수 없다.

특히 국제국의 권력 집중을 우려하는 사람은 협회 내에도 많다. 국제국 가삼현 국장은 외국인 감독 선임에 가장 큰 역할을 하고 있다. 브르노 메추·세놀 귀네스·필립 트루시에 등 감독 후보군은 모두 지난 월드컵 때 낯익은 얼굴들이다. 외국 축구 전문가들은 이들이 성적을 내는 데에는 능할지 몰라도 한국 축구의 밑그림을 그리는 데에는 적합하지 않다고 지적한다. 국제국이 감독 선임 가이드 라인을 군사 기밀인 양 알려주지 않는 것도 이해할 수 없는 대목이다.
4월30일 효창운동장. 제33회 맹호기 서울시 남녀 초등학교 축구대회 결승전이 열렸다. 알로이시오 초등학교와 신상계 초등학교의 여자부 결승전, 얼음판 같은 운동장에서 무릎이 깨진 선수가 9명이었다. 한 초등학교 감독은 “이란 원정 응원비 3억원, 코엘류가 받은 공돈 24만 달러면 잔디 구장을 몇 개나 만들 수 있다”라고 말했다.

스탠드에서 만난 한 선수의 부모는 “월드컵 전에는 유소년 축구를 육성하자는 구호가 자주 들렸는데 지금은 그런 소리마저 쏙 들어갔다”라고 말했다. 옆에 있던 학부모는 “아이 축구시키는 데 돈이 너무 많이 든다”라고 말했다. 개천에서 용 나기 힘든 세상이다.

10. 월드컵 멤버 10명이 여전히 `주전`

월드컵 멤버 10명이 파라과이전에 선발 출격했다. 2002월드컵에서 한국은 홍명보·황선홍 등 일본팀에 비해 나이 든 선수가 많았다. 세대 교체의 필요성을 한국이 더욱 절박하게 느껴야 하는데 그렇지 않다.

수비의 ‘핵’ 김태형(35)과 최진철(34)의 뒤를 받칠 선수가 없다. 포백 라인을 꾸리기 위해서는 185cm 80kg 정도에 100m를 11초대에 끊을 수 있는 중앙 수비수 보강이 필수이다. 유상철(34)과 이운재(32)의 나이도 부담스럽다. 이천수·송종국·설기현·이영표 등 ‘황금 날개’를 살리기 위해 중앙을 키워야 하는데 박지성 이외에는 선수가 보이지 않는다.

체코전에서 골을 터뜨리며 일본의 희망으로 떠오른 구보와 쓰보이·야마다·다마타·오쿠보 등이 월드컵 이후 간판으로 자리 잡은 것은 부러운 대목이다.

11. 11명의 정신 상태 문제 있다

‘경기에 임하는 자세가 좋지 못하였던 거 같고 준비도 철저히 하지 못한 거 같습니다.’ 안정환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반성했다. 김태형 선수도 “경기에 임하는 11명 선수의 마음가짐이 월드컵 때와 다르다”라고 말했다.

느슨한 정신력은 성적 부진으로 나타났다. 주전 경쟁이 없어 선수 개개인의 경기력 저하로 이어졌다. 월드컵 때보다 나아진 경기력을 보여주는 선수가 눈에 띄지 않는다.

본선에 진출했다고 하지만 올림픽 대표선수들의 정신 상태에는 더 큰 문제가 있다. 최성국·김영광·김동현·임유환·김치곤 선수가 ‘청담동 호루라기’ 이진성과 어울려 선수 소집일 새벽 나이트클럽에서 폭음한 것이 언론에 보도되었다. 이들은 나이트클럽에 갔지만 물만 먹고 술을 안 먹었다며 법적으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김동현 선수는 “성인인데 술을 먹든 말든 왜 사생활에 참견하느냐”라며 목청을 높였다. 대표 자격이 있는지 의심케 하는 대목이다. 기자회견을 주선한 코칭스태프와 협회는 또 무슨 속셈인지 도무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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