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독은 ''나쁜 습관'' 아닌 뇌질환
  • 안은주 기자 (anjoo@sisapress.com)
  • 승인 2000.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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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콜·니코틴·쇼핑·도박·섹스 탐닉 확산
알코올과 니코틴에 중독된 김과장은 30분마다 담배를 피우지 않거나 단 하루라도 술을 마시지 않으면 불안하다. 한동안 경마에 빠져 전재산을 날린 이대리는 최근 주식에 흠뻑 빠져 근무 시간에도 사이버 주식 거래를 해야 마음이 편안하다. 쇼핑에 중독된 주부 윤 아무개씨는 쇼핑할 거리가 없으면 불안해서 닥치는 대로 아무 물건이나 마구 사들인다. 인터넷에 맛을 들인 학생 최 아무개군은 방과 후 PC방을 드나드는 것도 모자라 아예 PC방에 총무로 취직해서 숙식하며 인터넷을 한다. 자신도 모르게 야한 생각과 자극을 좇는 섹스 중독자 양씨는 섹스 중독 때문에 아내와 이혼할 지경에 있다.

연세대 세브란스 정신 병원에 따르면, 우리나라 성인 중 16%가 알코올을 남용하고, 10%가 알코올 중독자라고 한다. 또 한국금연운동협의회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1천2백만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다. 삼성생명 공익재단 사회정신건강연구소가 1999년 실시한 설문 조사에 따르면, 우리 사회 구성원의 11%가 도박에 중독되었거나 중독될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드러났다. 섹스 중독이나 인터넷 중독에 대한 사회 조사는 아직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아 현황을 파악하기 어렵지만 ‘섹스·인터넷·쇼핑 따위에 중독된 환자가 급격하게 늘고 있다’는 것이 정신의학계의 설명이다. 이처럼 우리 사회 전체가 ‘중독증’을 앓고 있다고 할 만큼 무엇인가에 중독된 사람을 주변에서 찾기란 어렵지 않다.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하리만큼 심각한 중독 증세를 앓고 있는 사람이 적지 않은데도 이를 병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것이 우리 문화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주로 약물의 독성에 치여서 기능 장애를 일으키는 증상을 중독이라고 하는데, 내성(약물을 반복 사용하다 보면 효과가 떨어지는 현상)과 금단 증상 같은 생리적인 의존성을 동반하는 충동 조절 장애도 중독으로 본다. 도박·섹스·쇼핑 등 습관화한 특정 행동이 내성과 금단 증상을 보일 경우도 중독으로 간주한다. 알코올이나 마약에 중독된 경우 내성이 생겨 점점 약물의 강도를 높여야 자극이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것처럼 도박이나 쇼핑 중독자도 행위 자극 강도를 점점 높여야 하고, 중단할 경우 불안·초조를 느끼는 금단 증상을 겪기 때문이다. “중독은 나쁜 습관 아닌 뇌질환”

사실 중독은 악행(惡行)이나 나쁜 습관이라기보다는 뇌의 병에 가깝다는 것이 의학계의 견해다.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서유헌 교수는 “알코올 중독이든 도박 중독이든 모든 중독은 일정한 중독 메커니즘을 갖고 있다. 우리 뇌의 유전자 정보가 독성 물질이나 특정 자극에 오랫동안 노출되면서 중독 증상이 나타난다”라고 말한다.

중독은 신체 조건·심리 상태·사회 요인이 상호 작용해 발생하지만 뇌내의 중독 메커니즘을 통해 강화된다. 중독 메커니즘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험을 통해 도파민 신경계가 중독에 깊이 관여한다는 이론이 제시되어 있다.

필로폰·코카인·모르핀·헤로인 같은 약물은 마약성 수용체를 통해 뇌에 전달되지만, 이들은 결국 도파민 신경계에 영향을 미쳐 생리적으로 약물을 계속 찾게 만드는 시스템을 구성한다. 가령 술을 계속해 마시게 되면 신경 세포막과 신경 전달 물질의 균형에 변화가 생겨 특수한 신경 회로(보상 회로)가 강화되고, 그 결과 술을 갈망하고 조절 능력을 상실하는 알코올 중독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니코틴 역시 폐의 작은 폐포를 통해 흡수된 지 8~15초 만에 뇌에 도달해 자극을 가한다. 그 이후에는 역시 뇌내에 보상 회로를 만들어 지속적으로 니코틴을 찾게 만든다. 니코틴 금단 현상은 12분~90분 만에 나타나고, 24시간 내에 최고조에 달해 48시간까지 지속된다. 니코틴 중독자는 니코틴이 지속적으로 공급되지 않으면 불안 초조해진다. 심장 박동도 느려지고, 혈압이 떨어지며 운동 기능이 감퇴한다. 또 근육 긴장이 증가하고 뇌파가 느려진다. 이 금단 현상을 견디지 못해 다시 담배를 찾게 된다면 중독 현상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중독되기 쉬운 사람 따로 있다

뇌의 보상 회로 시스템에 관련된 신경 전달 물질은 도파민·세로토닌이다. 세로토닌은 쾌락 시스템에 작용하며, 도파민은 우리 뇌의 인지나 운동 등 여러 가지 작용에 깊이 관여하는 신경 전달 물질이다. 약물이 이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쳐 한번 즐거움을 맛보면 그것을 잊지 못하고 다시 찾게끔 만드는 보상 회로를 만드는 것이다. 약물만 도파민과 세로토닌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쇼핑이나 도박처럼 행동을 통한 자극 역시 이들 신경 전달 물질에 영향을 미쳐 중독으로 빠져들게 한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설명이다. 포르노 중독의 경우 처음 한두 번은 호기심으로 포르노를 보면서 쾌락을 맛보지만, 이 쾌락이 뇌에 자극을 가해 보상 회로 체계를 구성하면 지속적으로 성적 자극을 찾게 만든다. 문제는 같은 양의 쾌락을 맛보기 위해서는 점점 더 자극적인 포르노를 찾고,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해야 한다는 점.

약물이나 특정 자극이 모든 사람에게 동등하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즉 똑같은 약물을 투여하고 특정 자극을 지속적으로 준다 해도 중독되지 않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남보다 빨리 중독되는 사람도 있다. 이는 유전에 의해서 결정된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알코올 중독. 연세대학교 세브란스 정신 병원 이필구 박사는 “알코올 중독의 가장 강력한 원인 중 하나가 유전적 요인이다. 부모가 알코올 중독인 아이는 부모가 알코올 중독이 아닌 아이에 비해 알코올에 중독될 확률이 4배나 높다”라고 말한다.

알코올 중독 외에 다른 중독의 유전적 영향에 대해서는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중독되기 쉬운 유형이 따로 있다는 것이 서울대 의대 정신과 류인근 교수의 주장이다. 류교수는 “책임감이 없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자, 욕구가 지나치게 많은 사람(특히 이룰 수 없는 꿈이 많은 사람), 즉각적 만족을 추구하는 사람, 좌절감을 못견디는 사람이 중독에 빠지기 쉽다”라고 경고한다. 따라서 한 가지에 중독된 사람이 다른 것에 중독되기 쉬운 것은 물론이다. 또 중독에 빠지기 쉬운 사람이 ‘중독거리’가 많은 환경에 노출되면 중독에서 헤어나오기 힘들다는 것이 정신과 의사들의 견해다. 상담·약물 치료 병행해야

현재 중독을 치료하는 방법은 중독 원인에 따라 조금씩 다를 뿐 치료 원리는 비슷하다. 중독이 있는 환경으로부터 격리한 뒤 충동·불안·우울 등의 원인을 없애고 충동성을 억제하는 약물을 투여하면서 상담 치료한다. 특히 알코올·니코틴·마약 등 약물에 중독된 경우 상담 치료만으로 효과를 보기 어려우므로 약물을 투여하면서 상담 치료한다. 우리나라에는 지난해 처음으로 알코올 중독 치료제가 들어 왔다. 날트렉손과 아캄프로세이트인데, 이들은 뇌의 보상 회로 체계가 작동되는 것을 방해해 술을 마셔도 무덤덤한 상태로 만들어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한다. 이 약을 활용해 중독 상태가 심하지 않은 경우에는 통원 치료도 가능하게 되었다. 니코틴 중독 치료에는 니코틴 껌과 니코틴 패치를 주로 사용한다. 니코틴을 포함한 껌이나 패치를 사용해 수 개월에 걸쳐 점진적으로 니코틴 복용량을 줄여 감으로써 금단 증상을 완화하는 방법이다. 도파민 등의 신경 전달 물질에 선택적으로 작용하여 금단 증상을 완화하는 부프로피온을 니코틴 중독 치료제로 사용하기도 한다. 비약물 중독의 경우에는 상담 등을 통한 인지 행동 치료가 우선하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항우울제 성분의 약을 사용하기도 한다.

중독을 치료하는 최선책은 초기에 발견해 조기 치료하는 것이다. 중독이 뇌의 생물학적 변화를 초래하는 질병이기 때문에 남용이나 집착 단계에서 중독으로 진행하지 않도록 대책을 세워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가족에 중독자가 있는 사람이나 심리 상태가 불안정한 사람은 ‘중독거리’를 피하는 것이 예방법이다. 중독을 잘못된 습관쯤으로 생각하는 사회 풍토를 바꾸는 것 또한 우리 사회를 중독에서 해방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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