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경제 피 빠는 흡혈귀를 박멸하라
  • 이철현 기자 (leon@sisapress.com)
  • 승인 2004.01.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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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단계 도약할 것인가, 아니면 장기 침체의 늪에 빠질 것인가.’ 2004년 한국 경제는 갈림길에 서 있다. 세계 경기 회복이라는 훈풍을 타고 성장 엔진에 다시 불을 붙이느냐, 아니면 내수 침체와 투자 위축의 악순환에 빠져 장기 침체의 길로 들어서느냐.

난제에 직면했을 때 현자를 찾듯이 한국 경제가 안고 있는 과제와 해법을 찾기 위해 <시사저널>은 세계 최고의 경영 컨설턴트들을 만났다. 최종규 매킨지서울사무소 공동대표(디렉터), 박성준 보스턴컨설팅그룹(BCG) 파트너, 장효곤 베인앤컴퍼니 이사. 이들은 각각 세계 1, 2, 3위를 차지하고 있는 전략 컨설팅 업체에 소속된 경영 컨설턴트이다. 이들은 2004년이 한국 경제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시기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한국이 처한 경제 현실이 겉으로 드러난 것보다 훨씬 심각한 상태라고 진단하는 이들은, 한국 경제의 성장 궤도에 숨어 있는 지뢰들을 제거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이들이 보기에 국민소득 1만 달러 정체 상태에서 벗어나 선진국으로 진입하느냐 여부는 배부른 고민이 아니라 한국 경제에 미래가 있느냐 없느냐라는 근원적인 문제다.

한국 경제의 앞날을 가로막고 있는 가장 심각한 장애물은 4백조원에 가까운 가계 부채와 크게 위축된 잠재성장률이다. 가계 부실에서 비롯된 소비 침체가 투자 위축을 부르고 투자 위축이 일자리 감소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거듭되고 있다. 또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에 불과한 한국 경제가 국민소득 4만 달러인 미국 경제보다 성장률이 둔해지고 있다.

이 와중에 한국은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보기 힘들 만큼 빠른 속도로 고령화 사회로 진입하고 있다. 박성준 파트너는 “고령화 추세를 감안할때, 앞으로 10년 안에 1인당 국민소득을 2만 달러까지 끌어올리지 못하면 한국 경제는 사라질 것이다”라고 말했다(오른쪽 상자 기사 참조). 한국 경제는 절체절명의 순간을 맞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 경제가 최악의 시나리오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최정규 매킨지서울사무소 공동대표는 한국 경제를 ‘뱀파이어 이코노미’(흡혈귀 경제)에 비유했다. 한국에서는 죽어야 할 기업들이 살아서 걸어다닌다는 것이다. 도저히 생존할 수 없는 기업들이 화의·워크아웃·법정관리 등 온갖 부실 기업 구제 제도에 의존해 목숨을 부지하고 있다. 이 기업들은 단지 목숨만 연명하는 것이 아니라 멀쩡한 기업까지 물어뜯는 뱀파이어로 돌변한다. 채권단이 빚을 줄여주거나 출자전환하면 덤핑을 일삼아 정상으로 영업하는 경쟁 업체들까지 힘들게 만들었다.

뱀파이어를 죽이려면 햇빛을 쬐어야 한다. 경영 투명성이 바로 그 햇빛이다. 경영 투명성을 높이면 죽어야 할 기업들은 죽는다. 회계 처리가 투명하면 경영 실적이 그대로 공개되므로 실적이 형편없는 업체에는 금융기관이 함부로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SK글로벌이 천문학적인 적자에 시달리면서도 금융기관으로부터 돈을 빌릴 수 있었던 것은 회계의 불투명성 탓이다. 또 LG카드가 경영 투명성을 확보했다면 은행들이 20조원이나 물리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성준 BCG 파트너는 “LG카드 사태가 제대로 수습되지 않으면 금융 위기로 치달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LG카드는 ‘트리거 이펙트(trigger effect·방아쇠 효과)’의 진원지가 될 소지가 충분하다. 금융산업 곳곳에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들이 숨겨져 있기 때문이다.
금융산업 붕괴를 초래할 뇌관은 가계 부채이다. 국내총생산(GDP)의 80%에 이르는 가계 부채 규모는 선진국과 비슷한 수준이다. 문제는 너무 빨리 늘어났다는 것이다. 몇년 전만 해도 가계 부채는 GDP의 30% 수준이었다. 빚잔치의 후유증은 컸다. 신용불량자 수가 4백만명까지 육박하고 가계 부실 규모는 해결할 수 있는 수준을 넘어섰다. 박성준 BOG 파트너는 “전체 가계 부채 4백조원 가운데 30%가 부실 채권인 것을 감안하면, 1백20조원 가량이 갚지 못하는 빚이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부실 채권 1백20조원이 갖는 심각성은 채무자들이 상환 능력이 없다는 데 있다. 유동성이 부족하지만 보유 자산을 처분하면 갚을 수 있는 성격의 부채가 아니다. 봉급 가지고는 달마다 불어나는 이자를 갚기도 힘든 형편이다. 박성준 파트너는 “갚을 수 없는 빚이라면 5~10년에 걸쳐 갚을 수 있도록 채무 상환 기간과 금리를 조정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같은 정책은 금융기관 부실로 이어질 수 있다. 박성준 파트너는 “은행들이 가계 대출 재조정으로 인해 발생하는 수익성 악화를 보전하기 위해 수수료를 올리는 것을 용인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최정규 디렉터는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중소기업 대출 부문에서 추가 부실이 예상된다”라고 지적했다. 외환 위기 때 대기업들이 부채를 못 갚고 줄지어 쓰러지자 은행들이 대기업보다는 가계에 돈을 빌려주었다. 지난해 가계 부실이 커지자 이번에는 중소기업에 돈을 빌려주었다. 하지만 내수가 오랫동안 침체하면서 내수 소비에 의존하고 있는 중소기업들은 대출 이자를 내지 못할 정도로 수익성이 나빠지고 있다. 이 시한 폭탄은 경기가 극적으로 좋아지지 않는 한 가계 부실로 허덕이는 은행에 결정타를 가할 전망이다. 최정규 디렉터는 “(중소기업 대출 부실은) 국내 은행들의 리스크(위험) 관리가 허점투성이라는 것을 보여준다”라고 말했다.

생명보험사들은 지급 여력을 늘리기 위해 애쓰고 있다. 생보사들은 외환 위기 이후 높은 금리로 상품을 팔았으나 채권과 주식 시장이 오랫동안 침체해 투자할 대상을 찾지 못하고 있다. 3대 투신업체 가운데 현대투신만 주인을 찾았고 대한투신과 한국투신은 엄청난 부실을 안고 난파선처럼 표류하고 있다. 투신사에 대한 구조 조정을 늦춘 것이 사태를 악화시킨 것이다.

외환 위기 이후 한국 경제는 구조 조정을 성공적으로 마무리한 것처럼 보였다. 국제통화기금(IMF) 구제 금융을 받으면서 1년 반 동안은 구조 조정을 착착 진행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진전된 것이 없다. 구조 조정 작업을 마치기 전에 한국 경제가 호황을 맞이했기 때문이다. 세계 경제호의 단발 엔진인 미국 경제가 살아나고 정보 기술(IT) 산업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면서 전자·반도체·통신 산업이 경제 성장을 이끌었다. 또 IT 호황은 벤처 창업 열풍으로 이어져 투자와 일자리가 잇달아 늘어났다. IT 열풍이 시들해진 2002년에는 내수 소비가 경기를 이끌었다. 가계 대출이 증가하고 신용카드가 남발되면서 소비가 급격히 늘어난 것이다.

이처럼 구조 조정은 성공적으로 완수된 것이 아니고 외부 변수에 의해 중단된 셈이다. 장효곤 베인앤컴퍼니 이사는 “한국 경제가 외환 위기 이후 구조 조정을 추진했다고 하지만 바뀐 것이 없다”라고 말했다. 그 후유증을 가장 먼저 심하게 겪고 있는 곳이 금융권이다. 장효곤 이사는 “부실 금융기관은 원칙대로 망하게 해 경영 실패의 책임을 주주·경영진·종업원·채권자가 질 수밖에 없다는 선례를 만들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금융산업이 안고 있는 부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본 시장이 성숙해야 한다. 우량 기업이든 부실 기업이든 마음껏 사고 파는 환경을 조성해야 한다. 장효곤 이사는 “경영 실패에 책임이 있는 주주와 경영진은 손해를 보고 새 주인이 싼값에 부실 기업을 인수하는 기제가 원활하게 작동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재정경제부가 서둘러 칼라일이나 뉴브리지 같은 사모펀드를 육성하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하지만 인위적으로 대형 사모펀드 업체를 키우기는 쉽지 않다. 장효곤 이사는 “규제와 위험이 적은 투자 부문에서 경험을 쌓은 국내 펀드가 차츰 성장하기를 기대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자본 시장이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몇 가지 전제 조건이 있다. 박성준 파트너는 “우선 진입·퇴출과 상장 폐지 기준을 분명하게 정비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미국도 1970년대 후반∼1980년대 후반 한국과 비슷한 금융 위기를 겪었다. 이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던 것은 시장성과 투명성을 강조했기 때문이다. 기업 매매와 합병·매수를 활성화했고 회계 투명성을 강화하면서 해결의 실마리를 찾았다.

금융 불안 해소가 과거부터 쌓인 잔존 과제를 해결하는 것이라면 성장잠재력 확충은 한국 경제의 미래를 준비하는 작업이다. 가장 주의해야 할 것이 제조업에 관한 잘못된 견해다. 국내 제조업의 경쟁력이 떨어지는 원인을 노조나 중국에서 찾으면 안된다. 최정규 파트너는 “한국 기업들이 갖고 있는 비효율이 경쟁력 하락의 주범이다”라고 말했다.

제조업은 가만히 있으면 경쟁력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이른바 제품 가격은 떨어지고 생산 비용은 올라가 이윤이 줄어드는 ‘프라이스 코스트 스퀴즈(price cost squeeze)’ 법칙이다. 고도 성장기인 1970∼1980년대에는 수요가 공급을 초과해 많이 생산하는 것이 최선이었다. 하지만 1990년대 들어서 수요가 공급보다 떨어지는 사태가 발생했다. 시장 경쟁이 치열해지고 성장은 둔해지면서 무조건 생산 설비를 늘리는 전략은 효과를 내지 못하게 되었다. 따라서 앞으로 투자가 집중되어야 할 곳은 비효율을 제거하는 소프트웨어 부문이다. 기업들은 영업·물류·관리에서 효율성을 높여야 한다. 제너럴일렉트릭(GE)이 채택해 유명해진 6시그마가 대표 사례다.

1인당 국민소득 2만 달러에 다다를 때까지는 제조업이 큰형 노릇을 해야 한다. 제조업체들은 끊임없이 제품 포트폴리오를 고부가가치로 재편해야 한다. 박성준 파트너는 “제조업의 ‘트레이드 업(trade up)’이 긴요한 시점이다”라고 지적했다. 일본 도요타자동차가 일반 승용차 ‘캄리’에서 고급차 ‘렉서스’를 생산했듯이 주력 제품의 부가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현대자동차가 저가인 소형차 엑센트보다 고가인 스포츠유틸리티 차량 싼타페의 수출을 늘리고 있는 것은 바람직하다.

철강·자동차·석유화학처럼 저기술(low tech) 제조업이 주도하는 환경에서 첨단 산업의 묘목이 싹터야 한다. 이 과정에서 제조업의 부하를 나누어 져야 한다. 첨단 산업에는 하이테크 제조업뿐만 아니라 지식 기반 서비스산업이 포함된다. 서비스산업이라고 해서 먹고 마시는 업종을 일컫는 것이 아니다. 고부가가치 지식 기반 서비스 업종인 물류·콜센터·종합신용조사·광고·마케팅 전문 업체가 발달해야 한다. 지식 서비스 업체들은 고급 인력을 흡수할 수 있어 청년 실업을 줄이는 데 효과가 있다. 하지만 첨단 서비스산업은 온갖 규제로 인해 제대로 발아하지 못하고 있다. 종합신용정보회사인 크레디트뷰로(credit bureau)가 대표적인 예다. 종합신용정보회사는 개인의 적정 대출 규모나 상환 능력을 금융기관에 알려 대출 부실을 줄이는 데 크게 기여할 수 있다. 하지만 개인 신용 보호가 철저한 국내 법규로 인해 서비스가 불가능한 형편이다. 이를 풀면 첨단 서비스산업이 성장할 것이고, 그만큼 고용 인력도 늘어날 것이다.

국가 경제에서 정부의 역할은 중요하다. 박성준 파트너는 “정부가 성장 전략을 제시하고 과감한 기술 투자를 주도해야 한다. 미국은 그 역할을 항공우주국(NASA)과 국방부가 수행한다”라고 말했다. 보잉747은 군사용 항공기로 개발되었다가 여객기로 전용된 것이다. 항공우주국은 우주탐사선을 개발하면서 얻은 신소재와 전자 기술을 민간 업체에 넘겨 첨단 산업을 일으켰다.

유럽 정부는 더 전략적이다. 네덜란드는 ING베어링이나 ABN암로 같은 세계 최대 규모의 금융기관을 갖고 있는가 하면, 핀란드는 세계 1위의 이동통신 단말기 업체인 노키아를 키워냈다. 따라서 한국 정부가 차세대 성장 동력을 지정하고 전략적으로 키운다는 것은 바람직하다. 최정규 디렉터는 “선정한 다음 (정부가) 개입하는 것은 옳지 않다. 성장 동력으로 지정된 산업의 인프라스트럭처를 조성하고 대규모 기술 투자를 지원하는 것은 좋지만 해당 기업들에게 감 놔라 대추 놔라 하면 안된다”라고 말했다. 차세대 성장 동력으로 지정된 업체들은 정부가 간섭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 더욱이 산업자원부·정보통신부·과학기술부가 차세대 성장 동력 프로젝트를 진행하다 보니 ‘이제 시어머니가 3명이나 되었다’고 걱정하는 기업도 있다.

박성준 파트너는 “정부가 동북아 허브 전략을 내세운 것은 탁월한 선택이었다”라고 말했다. 동북아 허브는 ‘되면 좋고 안되면 말고’ 할 사안이 아니다. 최정규 디렉터는 “동북아 허브에 한국 경제의 미래가 달려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라고 지적했다. 자본 축적과 기술이 앞선 일본과 엄청난 내수 기반을 가진 중국 사이에 낀 한국이 지정학적인 위치를 활용해 동북아의 물류나 금융 중심지로 떠올라야 세계 경제에서 명함을 내밀 수 있기 때문이다. 최정규 디렉터는 “동북아 허브 전략에 대해서는 지역 안배보다는 효율성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부산항과 광양항으로 나뉜 물류 기지를 일반항과 특수항으로 구분하는 방안을 검토해 중국 상하이나 싱가포르와 겨룰 수 있는 경쟁력을 갖추어야 한다.

경영 컨설턴트들이 제시하는 해법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합의가 전제되어야 한다. 최정규 디렉터는 “난제들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단순한 ‘금 모으기’가 아니라 국가적 총력이 동원되어야 한다”라고 말했다. 과거 박정희 대통령 시절처럼 ‘잘살아 보자’는 단순한 캐치프레이즈로 국민을 동원할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이해 집단들의 요구가 분출하고 있고 의식 수준은 높아졌다. 박성준 파트너는 “미래의 청사진을 제시하고 국민을 설득할 수 있는 리더십이 요구되고 있다”라고 말했다. 탁월한 정치적 리더십이 요구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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