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넷 새 날개 달고 날아오르는 여성들
  • 安殷周·高在烈 기자 ()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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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버 공간 ‘파죽지세’ 점령… 자아 실현·사회 진출 통로로
한여성이 있다. 그녀는 아이를 하나 낳을 때까지 직장 생활을 하다가 둘째 아이를 낳자 전업 주부로 들어앉았다. 일하는 즐거움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지만, 아이를 둘씩이나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아이들이 커 가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때때로 행복감에 젖기도 하지만, 자유로웠던 지난날을 떠올릴 때마다 불행하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녀는 “나무꾼 남편이 숨겨둔 날개옷을 찾고 싶다”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마침내 그녀는 결혼 10년 만에 ‘날개옷‘을 찾았다. 날개옷 덕분에 원하는 것을 다 할 수 있게 된 그녀는 더 이상 불행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날개옷은 장롱 속이 아니라 문명의 바람을 타고 날아온 ‘인터넷’에서 찾았다.

남성 그늘에서 벗어날 기회 제공

인터넷이 여자에게 날개를 달아 주고 있다. 수천년 동안 누에고치 같은 편견과 울타리에 갇혔던 여성들은 마우스를 누르고 클릭하는 순간 전세계와 연결되며 자유로워진다. 일상에서부터 정치적인 영역까지 가로막던 온갖 벽이 인터넷으로 인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수천리 떨어진 뚱뗑이 아줌마와 수다를 떨고, 머리 속에 묵혀 두었던 아이디어와 숙련된 손재주로 돈을 벌 수 있다. 뜻 맞는 사람들을 모아 세상의 부조리를 파헤치고 개선할 수도 있다. 여성은 더 이상 얌전히 뒷전에 앉아서 남성 또는 사회가 무엇인가 해주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된다. 이코퍼레이션 김이숙 사장 말마따나 여성들은 지금 천년에 한 번 올까말까한 기회를 만났다. 딸로, 아내로, 어머니로 남자의 그늘에 갇힌 삶이 아니라 자신을 문패로 내걸 수 있는 절호의 찬스를 맞이한 것이다.

기회를 살리려는 여성들의 움직임이 분주하다. 지난 5월24일 한국광고단체연합회와 아이엠리서치가 발표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인터넷 사용자 중 여성이 46.5%를 차지한다. 지난해 하반기(29.3%)에 비해 17.2%가 증가한 수치이다. 정보통신부 지정 주부 인터넷 교실을 비롯한 인터넷 교육기관에는 넷맹에서 탈출하고자 하는 주부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고 있다(64쪽 상자 기사 참조).

5월31일 용인 에버랜드에서는 아줌마들의 작은 반란이 일어났다. 기혼 여성을 위한 웹사이트 아줌마닷컴의 사이버 공간에서 활동하던 아줌마들이 모여 ‘아줌마의 날’을 선포하고 자축하는 모임을 가졌다. 이 자리에 모인 아줌마들은 인터넷 덕분에 자아에 눈을 뜨고 인간 관계를 넓혔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결혼한 지 9년 만에 처음 자신만을 위해 외출한 기성자씨(64쪽 변신 1 참조), 사이버 공간에서 두 인생을 멋지게 소화하는 김정진씨(변신 2 참조), 자아 실현과 함께 고부간 갈등의 싹마저 잘라낸 남상순·김수진 씨(변신 3 참조) 등 온라인에서 친해진 아줌마들은 한바탕 수다 보따리를 풀어놓았다. 아줌마닷컴 황인영 사장은 “가정이나 일상에 포위되어 고립되기 쉬운 아줌마에게 인터넷은 새로운 친구를 만나게 하고,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수 있게 한다. 사고와 환경이 비슷한 아줌마들의 끈끈한 공동체는 조만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다. 아줌마들은 사이버 공간의 교류를 통해 서로의 사고와 의식도 변화시키고 있다. 아줌마에게 인터넷은 정말 혁명이다”라고 말했다.

인터넷이 여성의 자잘한 일상만을 바꾸는 것은 아니다. 인터넷은 여성에게 사회에 진출하는 원동력이 되기도 한다. 인터넷 환경은 적은 자본으로 재택 근무를 하면서 실생활에 유용한 정보를 지닌 여성들이 아이디어와 능력을 활용할 수 있는 적절한 텃밭이기 때문이다.
인터넷 사업에서도 두각

PC통신 넷츠고가 최근 20~50대 주부 5백17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 따르면, 전체 응답자의 73%가 자신의 경제력 확보나 자기 계발을 위해 사회 활동을 원하고 있다고 답했다. 이런 욕구를 반영하듯 여성의 사이버 비즈니스를 위한 네트워크 ‘사비즈’에는 하루에도 수십 건씩 창업 문의가 잇따른다. 이곳에서 컨설팅을 받아 창업에 성공한 여성도 수두룩하다.

인터넷 사이트 산타플라워를 운영하는 정규은씨(29)는 인터넷으로 자기를 계발하고 경제력을 확보했다. 1년 전 컴퓨터를 켤 줄도 몰랐던 정씨는 인터넷 덕분에 결혼한 지 4년 만에 새 명함을 만들었다. 전자 상거래 설명회에서 ‘컴퓨터와 아이디어만 있으면 백만장자가 될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무턱대고 일을 저질렀다. 비록 시작은 얼떨결에 했지만, 그녀는 아줌마 특유의 감성과 직관력, 유연한 사고로 꽃배달 서비스 웹사이트를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엄마와 아이가 함께 하는 생활공예 사이트 맘키드를 운영하는 김명효씨(43)나 국내 최초의 인터넷 떡 판매 사이트 와우복떡의 문혜숙씨(38)도 인터넷 덕분에 경제 활동과 자기 계발의 꿈을 한꺼번에 이루었다. 사비즈 김희정 사장은 인터넷으로 사업을 시작한 여성들의 공통된 특징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과거 가정 경제에 보탬이 되기 위해 부업을 하던 세대와는 다르다. 가정 경제를 위해 일한다기보다 경제 자립과 자기 계발을 목표로 하는 것이 공통된 특징이다. 따라서 처음부터 ‘하다 안되면 말지’ 하는 자세로 사업을 시작하는 여성은 많지 않다.”

인터넷이 여성으로 하여금 자아를 실현하고, 사회 진출을 도모하는 데만 영향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개방과 평등’을 특징으로 하는 인터넷은 여성에게 자신의 문제에서 사회·국가·지구의 미래까지 내다보고 염려할 수 있는 넓은 시야를 제공한다. 굳이 돈이 벌리는 경제 활동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목소리를 내는 사회 활동에 적극 참여토록 채근하는 것이다.

5월25일 (주)우먼코리아의 사이버 기자단 발대식에서는 5 대 1 경쟁을 뚫고 선정된 주부 50명이 기자로 데뷔했다. 여성 포털 사이트 ‘우먼코리아’에 글과 사진을 올릴 주부기자단은 ‘주부가 필요로 하는 정보는 주부가 가장 잘 찾는다’는 전제 아래 구성되었다. (주)우먼코리아 안윤정 팀장은 “터득한 인터넷 기술을 온라인에서 직접 실습하고 활용하는 것은 물론 일상에서 느끼는 문제점을 공개적으로 풀려는 주부들이 기자가 되겠다고 나섰다. 일상의 다양한 모습을 주부 특유의 시각으로 담아낼 터이므로 우리 사회의 점진적인 변화를 추진하는 하나의 힘으로 작용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우먼파워로 사회 변혁 리드

인터넷 뉴스 미디어 <오마이 뉴스>에서 사이버 기자로 활약하면서 사회 변화를 리드하는 여성도 적지 않다. 최은경씨(22)는 “인터넷 미디어를 통해 내 목소리를 내고 문제 제기를 하는 일은 매우 매력적이다. 사이버 기자로 활동하면서 사회 문제에 관심을 많이 갖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배을선씨(27)는 월급이 3분의 1로 줄어드는 것을 감수하면서 증권회사에서 <오마이 뉴스>로 직장을 옮겼다. “내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사회 의식도 키울 수 있기 때문에 후회하지 않는다”라는 것이 배씨의 설명이다.

캠코더 아줌마 강미란씨(변신4 참조) 역시 인터넷으로 일상에서부터 사회 활동까지 변혁을 이루어낸 대표적인 인물이다. 강씨는 “인터넷은 거미줄처럼 얽혀 있어서, 한번 알게 되면 마치 고구마를 캘 때처럼 줄줄이 엮인 정보를 만날 수 있다. 새로운 정보를 만날 때마다 새로운 세계로 넘나들 수 있어서 웅크리고 살았던 여성을 여러 모로 변화시킨다”라고 주장했다.

인터넷 미디어 가운데서도 여성을 타깃으로 한 웹진은 여성의 변화를 이끄는 대표적인 견인차이다. 이들 웹진은 여성으로 하여금 자아에 눈뜨게 하고 사회 문제에 눈을 돌리게 함으로써 불평등했던 여성의 지위를 복원하는 데 앞장선다(66쪽 기사 참조). 여성들은 이러한 웹진을 만들고 읽으면서 공동체 의식을 다져 모두의 삶을 개혁할 힘을 기르고 있다.

뉴스 미디어나 웹진에서 여러 가지 문제를 제기하는 차원을 넘어서면 ‘호주제 폐지’나 ‘공동 육아’처럼 사회 문제를 직접 개선하는 움직임으로 발전하기도 한다. 특히 호주제 폐지 운동은 여성을 중심으로 하여 사이버 공간에서 들불처럼 번져 가면서 사회적인 이슈로 떠오르기도 했다. 이숙경씨(시립대 강사·여성학)는 “여성이 인터넷을 이용해 일상적인 수다를 공동체 의식으로 승화시키고 경제 활동과 사회 참여도를 높여 간다면, 여성의 정치 세력화 또한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이씨는 여성 포털 사이트를 중심으로 해서 조심스럽게 일고 있는 ‘공동 구매’나 ‘소비자 권리 찾기 운동’을 그 근거로 들었다. 인터넷이 있기 때문에 손쉽게 공동 구매자를 모집해 소비자인 여성 스스로 가격을 결정하고, 제조사에 압력을 넣고, 모니터 활동을 통해 제품의 질을 개선하도록 힘을 행사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성이 꿈꾸는 사이버 공화국은?

인터넷이 남성에게보다 훨씬 강도 높은 영향을 미치며 여성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 수 있는 까닭은 무엇일까. 조한혜정 교수(연세대·사회학)의 설명에 따르면 여성과 인터넷은 ‘찰떡 궁합’이다. 인터넷을 통한 가상 공간에서는 사람의 얼굴을 볼 수 없기 때문에 고정 관념이 들어설 여지가 크게 줄어든다. 고정 관념으로 인해 부당하게 차별 받아온 여성이라도 가상 공간에서는 자신을 있는 그대로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또 인터넷은 기득권층을 해체하고 뒷전으로 밀려나 있던 ‘가난한’ 사람(여성도 가난하다)에게 기회를 제공한다. 아이디어와 능력만 있으면 큰 자본이 없어도 사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인터넷 시대에는 점점 더 인간적이고 개인화한 문화가 주류를 이루어 가기 때문에 그동안 하찮게 취급되던 ‘여성성’이 오히려 대접받는 현실이다. ‘여성적인 것’이 대접받는 시대로 변화하면서 가정에서 익힌 취미와 기술이 사업 기반이 되고 있다.

물론 여성이 인터넷을 인터랙티브하게 활용하는 데 따른 부작용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음성적인 채팅으로 인해 불륜으로 빠져들거나 주부 인터넷 중독증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러나 인터넷이 여성에게 주는 혁명적인 변화에 비하면 부작용은 하잘것없다. “여성도 점차 인터넷을 생산적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모색하고 있어 우려할 수준은 아니다”라는 것이 우먼플러스 마케팅팀 서은숙 팀장의 주장이다.

그렇다면 인터넷으로 인해 변화하고, 인터넷을 능동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여성이 궁극적으로 이루고자 하는 것은 무엇인가. 조한혜정 교수 말대로 사이버 공간에 여성의 경험이 존중되는 새로운 땅을 마련하고, 이를 기폭제로 삼아 현실에서도 차별 받지 않고 한 사람의 인간으로 동등하게 대접받는 세상을 이루는 것이다. 사이버문화연구실 최은정 연구원은 “인터넷이 가져다 준 이 기회를 여성이 적극 활용하지 못한다면 여성은 다시 남성의 손발 노릇만 하게 될 가능성이 적지 않다”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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