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발 본색'', 빨·주·노·초·금·은·보
  • 노순동 ()
  • 승인 2000.11.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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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대에서 40대까지 머리 위에 ‘혁명의 물결’… “패션은 헤어 스타일에서 완성된다”
<왜불러> 라는 대중 가요가 장발을 단속하는 경찰을 조롱하는 노래로 읽히던 시절이 있었다. 20여 년 뒤인 1990년대 중반, 서태지는 4집 앨범을 내놓으면서 분홍색 염색 머리를 선보여 기성 세대를 경악시켰다. 그로부터 고작 5년. 길거리에서 만화 속에서 혹은 브라운관에서 튀어나온 듯한 젊은이들을 마주치는 것은 드문 일이 아니다. 연예인이나 클럽의 가수들이 아니다. 평범한 대학생, 심지어 중고등학생들도 방학을 틈타 ‘색깔 있는 머리’에 도전한다. 레게 퍼머, 바람머리(레이어드 커트), 민대머리. 그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것이 형형색색의 염색 머리다.

대표적인 젊음의 거리인 홍익대 주변에서는 자연 모발을 찾아보기가 더 어렵다. 이들에게 왜 머리를 물들였느냐는 질문은 성립하지 않는다. 색채에 민감한 그들에게는 머리카락 색깔도 패션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돌아오는 대답도 엇비슷하다. “예쁘잖아요” “그냥” “신기하잖아요”.

신세대뿐 아니다. 1960년생인 김미경씨(40)는 지난해 처음 머리 염색을 시도했다가 열성적인 염색 옹호자가 되었다. 지난해 김씨가 갈색 머리로 사무실에 들어섰을 때 주변 사람 대부분이 ‘뒤집어졌다’. 그녀는 일간지 <한겨레>의 기자였다. ‘취재원의 신뢰가 생명인 기자에게는 적절치 않다’는 조언은 그나마 합리적인 비판이었다. 어떻게 사대적 소비 문화를 무비판적으로 따를 수가 있느냐며 그녀를 ‘무뇌아’로 취급하려 들었고, 심지어 “우리 애가 저러면 머리털을 다 뽑아버리겠다”라며 드러내놓고 반감을 표하는 이도 있었다. 주위의 반응은 오히려 김씨를 확신범으로 만들었다. “어차피 패션은 자기 표현 수단이다. 타고난 머리 색을 바꿀 수 있다는 발상은 정말 혁명적이지 않은가. 아니 이 혁명은 너무 늦게 왔다.”

그녀가 자신의 청춘을 암울한 1980년대에 바쳤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녀의 옹호론에서는 과거의 강박에 대한 포한이 읽힌다. 79학번인 그녀가 개인의 취향을 표현하는 것을 죄스러워했던 것은 다름아닌 자기 검열 때문이었다. 그녀는 “운동권 언저리에서 20대를 보낼 때 나는 우리 사회가 변해서 꾸며 입은 옷이 잘 어울릴 때가 되면 내 취향을 표현하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대는 참으로 근엄했다”라며 웃었다. 거창하게 말하자면 계몽의 시대에 손발이 묶였던 감성을 해방하려는 욕구인 셈이다. 김씨는 올해 붉은 염색에까지 도전했다. 현재 그녀는 <인터넷 한겨레> 뉴스부장으로 일하고 있다. 직원들은 “부장의 머리 색을 보고 계절을 짐작할 수 있어 좋다”라고 농담을 건넨다.

얼떨결에 염색을 시도했다가 확신범이 된 것은 출판기획자 김준홍씨(39)도 마찬가지다. 그는 충동적으로 머리 색을 밝은 은발로 바꾸었다. 간혹 ‘대체 무슨 일을 벌인 거냐’고 핀잔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열에 아홉은 잘 어울린다며 신선해 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자기 상(像)에도 변화가 오더라는 것이다. “상대가 나를 보고 적극적이고 창의적인 사람이라고 느끼는 기색이었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도 나는 남다른 사람이라는 자신감이 샘솟았다.”
다큐멘터리 감독 변영주씨가 졸지에 금발이 된 사연도 재미나다. 그의 금발은 한 관객의 선물이다. 종군위안부의 삶을 다룬 다큐멘터리 <낮은 목소리>를 보고 감명받은 관객이 마침 미용사였다는 것. 그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가장 성의 있는 선물 품목으로 머리 염색을 골랐다. 의식이 남다른 다큐멘터리 감독에서 졸지에 ‘날라리’가 되는 순간이었다.

외모에 관심이 많은 10~20대는 좀더 의식적으로 이 대열에 합류한다. 과거 학교는 퍼머 머리·긴 머리와 전쟁을 벌였지만, 이제는 색깔 전쟁을 벌이고 있다. 대학교 1학년, 이른바 00학번 학생들은 머리 연출에 더 열성이다. 머리카락을 온통 은빛으로 물들인 대학생 김상현씨는 “자유를 만끽하고 있다. 내년부터는 이렇게 파격적인 머리는 하지 않을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10대의 염색 열풍은 고스란히 시장에 반영되었다. (주)태평양 브랜드 메니저 김수진 과장에 따르면, 염모제 시장은 2~3년 사이에 두 배 이상 늘었다. 10~20대 초반이 새로 유입된 탓에 자가 염색도 크게 늘었다. 성신여대 앞 화장품가게 점원 장윤선씨는 염색제 주고객이 10대라고 말한다. 방학 때면 판매가 급증하고, 성별 차이도 별로 없다. 그는 “남자 탤런트 차태현이 ‘과일나라’의 염색제 모델로 등장한 것도 이와 같은 세태를 반영한다”라고 말했다.

학부모들의 생각도 예전에 비해 훨씬 다양해졌다. 김강임씨는 그 가운데서도 파격적인 편이다. 제주도에 거주하는 40대 주부인 김씨는 새치 때문에 검은 염색을 하곤 했다. 어느날 딸이 ‘검은 머리는 간첩’이라고 놀리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 후 김씨의 머리는 오렌지 아니면 포도주 색이다. 그러면서도 학생이 염색한 것을 보면 ‘실업계 학생, 혹은 문제 학생’으로 여겼다고 한다. 하지만 올 여름 방학 때 고등학교 2학년인 딸의 손을 이끌고 미용실을 찾은 뒤 생각이 바뀌었다. 갈색으로 염색해 주었더니 딸의 인상이 밝아져 보기에도 좋고, 딸이 자신을 ‘뭔가 통하는 엄마’로 느끼는 기색이 역력하더라는 것이다. 고등학생인 딸에게 그런 호사는 방학 때나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김씨는 개학 전날 딸을 다시 미용실로 데려가야 했다.
이제 머리 염색은, 옷과 마찬가지로 자연스러운 패션 품목이 되었다. 당사자들은 하나같이 예찬론을 펴지만, 아직 주위의 시선은 호기심 반 우려 반이다. 비판 가운데 가장 흔한 것이 ‘개성을 빙자한 몰개성’이라는 것이다. 유행이라는 것이 결국 기업과 미디어가 결합한 소비 문화에 투항하는 것일 뿐이라는 비판도 만만치 않다. 여기에다 외래 사조에 대한 맹목적인 추종이라는 혐의까지 더해지면 유행에 민감한 사람을 무뇌아로 취급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병영 사회였던 시절에 두발은 오랫동안 규제의 주요 타깃이었다. 머리를 단속하는 강도와 열의에서 한반도 전체는 병영과 다르지 않았다. 게다가 황인종의 징표나 다름없는 검은 머리를 다른 색으로 바꾸는 것은, 머리를 기르거나 구부리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혐의를 더하는 것은 또 있다. 요즘 유행하는 밝은 금발이나 은발 염색은 얼마 전 일본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던 품목이다. 이화여대 앞에서 미용실을 하는 박경희씨는 “동양인 외모에는 갈색 등 짙은 색이 어울리지만 일본에서는 금발·밝은 갈색·회색이 유행했다. 일본인 특유의 구미 지향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수입되는 데 6개월도 채 걸리지 않았다”라고 말했다. 홍익대 부근 미용실 ‘자끄 데 상주’에서 일하는 헤어 디자이너 한기수씨도 염색에 관한 한 일본의 유행이 직수입된다는 것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는 한국 신세대가 그들을 무조건 모방하는 것은 아니라고 말한다.
개성을 가장한 몰개성 혐의가 짙다는 비판에 대해서는 프랑스의 사회심리학자 마르크 알랭 데캉의 답변을 참고할 만하다. 그에 따르면, 그와 같은 현상은 비난할 일이 아니라 유행의 고유한 속성이다. 그는 젊은이들의 복장이 언뜻 보면 다양하지만 특정 집단의 복장은 놀라울 정도로 일치한다고 말한다. “젊은이들은 기꺼이 (상징적인 의미의) 유니폼을 착용한다. 서로가 동료임을 확인하는 것이다.” 결국 유행이란 본인이 어떤 소집단에 소속하고 있음을 알리면서 동시에 더 큰 집단과 구별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니 애초부터 개성의 표현이라는 잣대로 잴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는 10대가 힙합 의상을 즐겨 입고 교복을 복고풍으로 줄여 입는 현상을 이해하는 데도 유용하다.

소비자를 소비 문화에 투항한 무기력한 존재로 보는 것에 반대하는 프랑스의 사회학자 질 리포베츠키의 주장에도 귀를 기울일 만하다. 그는 사소한 차이에 민감한 소비자는, 장사꾼들의 농간에 넘어갈 만큼 호락호락하지 않으며, 본인의 의지와 취향에 따라 결정을 내린다고 말한다. 그 과정을 통해 자율성을 얻는 법을 연습한다는 것이다. 그는 이들을 ‘네오 나르키소스’(신 개인주의자)라고 불렀다.

문화 평론가 이동연씨는 두 가지 측면을 고루 지적한다. 우선 그는 신세대가 선호하는 스타일에서 과거의 청년 문화 혹은 해외의 사례에서 찾아볼 수 있는 ‘저항으로서의 스타일’이라는 측면을 발견하는 것은 무리라는 것을 인정한다. 다분히 상품으로 획일화한 유행성 라이프 스타일을 따른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는 기성 문화에 대한 식상함과, 윤리적·법적으로 획일화한 규범에 대한 거부가 잠재되어 있다는 점을 아울러 지적한다. 그의 시각을 빌리면, 신세대는 색깔 있는 머리를 통해 ‘검은 교복에 하얀 운동화 그리고 단정한 머리’라는, 기성 세대가 원하는 학생다움의 신화를 가볍게 비웃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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