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가동산 '진실게임은 끝나지 않았다
  • 고재열 (scoop@sisapress.com)
  • 승인 2003.09.3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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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동산은 정말 사이비 종교였나. 아니면 마녀 사냥식 검찰 수사의 희생양이었나? 법원의 무죄 선고로 종결된 아가동산 사건의 실체를 둘러싼 공방이 재연했다.
하얀 공주옷을 입은 여자 교주를 ‘아가야’라고 부르며 따르는 신도들이 여신도와 어린아이를 때려죽이고 암매장했다고 해서 화제가 되었던 아가동산 사건. 사람들의 기억에서는 벌써 잊혔지만, 이 사건이 발생한 지는 채 10년도 지나지 않았다. 당시 사건 수사를 맡았던 담당 검사가 최근 이 사건을 소설로 재구성한 <뽕나무와 돼지똥>을 내놓았다.

사건 당시 ‘시체 없는 살인 사건’으로 논란을 일으켰던 아가동산 사건은 검찰의 저돌적인 수사로 시작되었지만 결국 아가동산측과 변호인단의 압승으로 끝났다.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아가동산 사건은 ‘살인’ 사건과 ‘사이비 종교’와 관련된 사기 사건 모두 무죄를 선고받았다. 교주로 지목된 김기순씨는 단지 조세포탈로 처벌받았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흥미있는 사실은, 수사검사진과 변호인단이 걷고 있는 훗날의 정치·인생 역정이다. 이들의 정치적 행보는 정확하게 대칭을 이루고 있다.
검찰이 일방적으로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고 몰아갔던 아가동산을 변호해 무죄를 이끌어낸 김종훈 변호사는 노무현 정부 들어 대북송금 특검보에 임명되었다. 함께 변론을 폈던 양인석 변호사는 현재 청와대 사정비서관으로 있다. 사건과 직접 관계는 없지만 김기순씨가 후원한 언론인권센터 초대 이사장을 맡았던 고영구 변호사는 국정원장으로 재직하고 있다.

이에 반해 아가동산을 비난하던 쪽은 모두 한나라당에서 정치 행보를 하고 있다. 수사 후반 수사팀에 합류했던 원희룡 검사는 한나라당 의원이 되었고, 사건을 적극적으로 보도한 기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동아일보> 박종희 기자 역시 한나라당 의원이 되었다. 이 사건 수사를 주도한 강민구 검사는 최근 검사복을 벗고 잠깐 변호사로 일하다가 한나라당 금천지구당 공천 경쟁에 뛰어들었다.

사법 다툼에서 패한 뒤 소설을 통해 명예 회복에 나선 강변호사는 이 사건 수사가 ‘절반의 승리’였다고 주장한다. 비록 공소 시효 때문에 무죄로 판결되었지만 사건의 실체적 진실만은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사건 담당 검사였던 강민구 변호사와 교주로 지목된 김기순씨(64)는 이제 법정에서 정반대 처지로 만나게 되었다. 김씨가 강변호사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기 때문이다. 강변호사에 대해 5억원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한 김씨는, 소설에 대해서는 별도로 출판금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소송을 계기로 아가동산 사건과 관련된 이야기를 듣기 위해 김기순씨를 직접 만나보았다.

김기순씨 “사건 배후에 이교부씨 있었다”

김씨는 강변호사가 법원의 판결을 무시하고 아가동산을 또다시 모함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사건 당시에도 강변호사의 일방적인 '마녀 사냥' 때문에 아가동산이 언론에 잘못 알려지면서 피해를 보았다고 주장하는 그는, 강변호사가 소설을 내자 즉각 소송으로 맞섰다.
김씨는 아가동산이 사이비 종교 집단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사브와 같은 ‘협업 마을’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자기가 검찰이 말하는 것처럼 아가동산을 통해서 사리사욕을 채우지 않았고 문란한 성생활을 하지도 않았으며, 자신을 신격화하지도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아가동산 사람들이 원래 따랐던 이교부씨가 아가동산 사건을 이해하는 데 핵심적인 인물이라고 말했다. 일명 ‘삭발교’로 알려진 주현교부를 창시한 이씨는 ‘신나라’에 이르기 위해서는 ‘정욕선’ ‘물질선’ ‘인정선’을 끊어야 한다는 교리를 펼쳤다. 그러나 1979년 이른바 ‘천국 댄스’ 사건과 목사 구타 사건으로 그가 구속되자 수천명에 이르렀던 신도들은 모두 뿔뿔이 흩어졌다.

김기순씨는 이때 갈 곳 없는 몇몇 신도를 모아 공동체를 만들었다. 모여든 사람들과 함께 그는 떡 장사와 어묵 장사, 음반 장사에 나섰다. 돈이 조금 모이자 경기도 이천에 땅을 사서 농장을 만들고 사람들을 정착시켰다. 이 농장이 바로 현재의 아가동산이다. 만평으로 시작한 농장은 금세 불어나 지금은 14만평으로까지 늘었다.

음반 유통업 역시 순조롭게 성장했다. 5평짜리 조그만 레코드 가게에서 시작한 이 사업은 독특한 소매 전략과 현금 전략 덕분에 빠르게 성장했다. 그렇게 전성기를 구가하던 아가동산은 1996년 말 사건이 불거지면서 추락했다. 김씨는 당시 아가동산 이탈자들이 이씨의 지시를 받고 아가동산을 음해했다고 주장했다.

이런 김씨의 주장에 대해서 이교부씨는 일부 사실을 인정했다. <시사저널>과의 전화 인터뷰에 응한 이교부씨는, 자신이 이탈자들을 이끌고 검찰에 가서 수사를 도왔다고 확인해 주었다. 그는 김기순씨가 자신의 방식을 그대로 답습했다며 구체적인 내용들을 검찰에서 소상히 설명했다고 말했다.

오랜 내부 갈등으로 활기 잃고 쇠락

그러나 이교부씨는 아가동산 수사에 협조한 이유가 아가동산을 빼앗기 위한 것이 아니라 문제를 알리기 위해서였다고 주장했다. 그는 순수한 의도에서 도왔으며, 당시 검찰은 자신의 도움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했다고 기억했다. 그는 지금도 이탈자의 절반 이상이 자신의 말을 따른다며 자신이 그들의 정신적인 지도자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씨가 순수한 의도에서 검찰 수사를 도운 것은 아닌 듯하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이씨가 그 무렵 본격적으로 교단 재건에 나섰다는 점이다. 사이비 종교 전문가로 있다가 의문사한 고 탁명환씨가 발행했던 <현대종교> 1997년 3월호는 이교부씨가 그해 1월부터 다시 주현교부 간판을 내걸고 재건에 나섰다고 보도했다. 검찰이 사이비 종교 수사를 위해 사이비 종교 교주를 이용했다는 지적이 나올 만한 대목이다.

근황을 묻자 이교부씨는 사회사업을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아가동산의 상황을 손금 들여다보듯이 훤히 알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마음을 완전히 비우지는 않은 것 같다. 2002년 5월께 그가 설교한 내용을 보면, 그는 신도들을 향해 “가라, 가서 김기순을 찾아서 죽이라고 그랬어! 내가. 김기순을 못 죽이면, 그 아들들이라도 죽이라고 했어. 내가”라고 말하기도 했다. 아가동산 사건은 2001년에 다시 불거졌다. 김기순씨가 해외 출장을 간 틈을 타서 강 아무개씨 등 김씨의 핵심 측근들이 반기를 든 것이다. 이들이 1996년 재판에서 위증을 했다며 재수사를 촉구하자 아가동산은 또다시 뉴스의 중심이 되었다.
주목할 만한 사실은, 쿠데타에 앞장섰던 사람들이 예전에 김씨 신격화에 앞장섰던 인물이라는 점이다. 이들은 자신들이 성령을 받았다며 다시 신앙 생활을 하자고 김씨를 압박했다. 아가동산을 다시 사이비 종교로 만들기 위해 쿠데타를 이끈 강 아무개씨는 처음에 세를 규합하기 위해 이교부씨를 내세웠으나 곧 지도자임을 자처했다.

사이비 종교 성향을 가진 사람들이 이교부씨에게 귀의하거나 강 아무개씨를 따라 나가면서 아가동산은 다시 평온을 되찾았다. 그러나 아가동산측이 초기의 순수성을 잃고 사이비 종교로 기울었을 때 생긴 얼룩은 상당한 기간 지워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아직 기성 교단이 아가동산에 면죄부를 주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주간 <교회와 신앙> 기자인 양봉식 목사는 최근 소송을 통해 아가동산이 법적으로도 면죄부를 받지 못했음을 증명했다. 아가동산이 사이비 종교 집단이 아니라고 확인받았다고 볼 수 없다는 판결을 이끌어낸 것이다.

최근 찾은 아가동산은 오랜 내부 갈등으로 많은 사람이 빠져나간 까닭에 활기를 찾기 어려웠다. 짓다 만 건물이 을씨년스럽게 버티고 있고 여러 시설이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쇠락해 있었다. 오갈 데 없는 이탈자 7~8명은 나가지도 들어가지도 못하고 모퉁이 건물에서 하루하루를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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