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 잃고 표류하는 네티즌
  • 김은남 기자 (ken@sisapress.com)
  • 승인 2003.05.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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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대통령의 우 군이었던 2030세대 지지자들이 하나둘 ‘애정의 코드’를 뽑고 있다. 특검법 파동·이라크 파병 논란 등을 잇 달아 겪으며 ‘잔치는 끝났다’는 푸념과 함께
'잔치는 끝났다.’ 최영미씨의 시집 제목이 아니다. 전문 논객 사이트인 서프라이즈(www.seoprise. com)를 방문하면 요즘 이런 제목의 글이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지난해 10월 ‘노무현 대통령 만들기’를 드러내놓고 표방한 이 사이트가 인터넷에 처음 등장했을 때만 해도 상황은 이렇지 않았다. 초야에 묻혀 있던 논객들이 내뿜는 격정에 찬 격문들로 사이트에는 활력과 긴장감이 넘쳐 흘렀다. 그런데 노무현 시대가 열린 지 두 달도 채 되지 않아, 잔치는 끝났다는 냉소가 이곳을 맴돌고 있는 것이다.

지난 2월25일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던 날 영국 일간지 <가디언>은 ‘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 로그온하다’는 제목으로 새 대통령 탄생 소식을 알렸다.

실제로 노대통령의 당선에 인터넷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다.

2030 세대에 속하는 개혁 성향의 젊은 유권자들이 인터넷을 통해 일찍이 상상할 수 없었던 강력한 ‘네티즌 파워’를 보여주었기에 노대통령은 소수파라는 한계를 극복하고 극적인 선거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었다


이쯤 되자 청와대에도 비상이 걸렸다. 인터넷에서의 민심 이반은 청와대가 요즘 심각하게 여기는 현안 중 하나이다. “정권 출범 직후 5 대 5 정도 비율이었던 친노 대 반노 게시물이 최근 들어 2 대 8 수준까지 뒤집히면서 뭔가 대책을 세워야 하는 것 아니냐는 얘기가 나오고 있다”라는 것이 한 관계자의 전언이다. 지난 3월 말 정보통신부가 인터넷 실명제를 시행하겠다고 밀어붙였을 때도 청와대측은 가뜩이나 악화일로인 네티즌 민심을 또다시 자극하게 되지 않을까 걱정했다는 후문이다.

당장 여론조사 수치만 살펴보아도 2030 네티즌의 동요는 분명하게 감지된다. 청와대 여론조사는 비공개로 한다는 원칙에 따라 정확한 수치를 밝힐 수 없지만, 지난 두 달간 노대통령 지지층에 약간의 변동이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이근형 청와대 여론조사 비서관은 말했다(27쪽 상자 기사 참조). 연령대 별로 살폈을 때 노대통령에 대한 지지층으로 분류되던 20∼30대에서 지지층이 일부 이탈하면서 40대 이상 연령층에서 지지층이 새로 유입되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논쟁이 한창일 때는 세대간 지지율에 편차가 거의 없을 정도였다는 것이 이비서관의 말이다. 이는 특검법 수용, 이라크 파병 결정 등 노대통령의 잇단 현실주의 행보에 젊은층이 실망감을 느낀 반면 중장년층은 안정감을 얻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단, 이것이 정색하고 주목할 만한 현상인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들도 의견이 엇갈린다. 이같은 추세가 중장기적으로 지속될지는 아직 지켜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정권 출범 초기에는 고연령·저학력·저소득 보수 계층의 대통령 지지율이 일반적으로 높아지게 돼 있다. 이들이 설사 대선 때 한나라당을 찍었더라도 그 이유는 특정 정파를 지지해서라기보다 안정을 선호해서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들은 누가 집권하든 당분간은 여당 선호 성향을 보이게 돼 있다.” 미디어리서치 사회조사실 김지연 차장의 설명이다.

더욱이 2030 세대 이탈은 당초 어느 정도 예상했던 현상이라는 것이 시사 평론가 유창선씨의 지적이다. 유씨는 지난해 이들 세대가 국민경선·정풍(鄭風)·후보 단일화 등 외생 변수에 따라 노무현→정몽준→노무현으로 지지 후보를 바꾼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곧 이들의 지지 자체가 특정한 정치 이념에 기반을 두었다기보다 유동적·한시적인 지지였던 만큼 이들이 돌출 이슈 때문에 지지를 거두어들일 가능성은 상존한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정권 처지에서 이를 마냥 방치할 수만은 없다. 인터넷에 힘입어 선출된 대통령답게 노대통령은 인터넷 여론 동향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청와대 각 부처가 만들어 올리는 동향 보고서 중 대통령이 가장 열심히 읽는 것도 인터넷 여론 1일 동향 보고서라고 한다. 이 보고서에는 노사모·<오마이뉴스>·<프레시안>·서프라이즈 등에 오른 여론과 <조선일보> <중앙일보> <한겨레> 등 기성 언론의 인터넷 사이트에 오른 여론이 종합 축약되어 있다.

이를 통해 노대통령 또한 네티즌들의 동요를 감지하고 있다고 청와대 관계자는 밝혔다. 지난 4월18일 노대통령이 청남대에 머무르는 동안 국민에게 보내는 편지를 작성해 인터넷에 띄운 것은, 그런 의미에서 네티즌 달래기의 일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의 편지 1-청남대에서’라는 제목이 붙은 이 편지는 청와대 홈페이지 회원, 노사모 회원, 공무원 등 40만 명에게 e메일로 발송되었다.

이 편지에서 대통령은, 개인이나 집단의 이익만 생각하는 사람들이 개혁에 대한 불안감으로 대통령을 아무리 흔들어대도 자신은 흔들리지 않고 호시우행(虎視牛行·호랑이처럼 보고 소처럼 걷다) 하겠다며, 개혁 세력의 변함 없는 지지를 호소했다. e메일을 받은 네티즌들은 ‘이때까지 대통령에게 메일 받아본 사람, 있으면 나와 보라고 하라’(권**)며 감격을 표시했다. ‘변함없는 당신’(S*L) ‘대통령의 신념과 의지를 믿는다’(anja**)는 격려도 청와대 홈페이지에 쏟아졌다. 그러나 이 정도로는 인터넷에 만연한 불신과 냉소를 걷어내기에는 아직 역부족으로 보인다.

네티즌의 동요에 대해 청와대측은, 북한 핵·이라크 파병 등 어쩔 수 없는 현안 때문에 젊은 네티즌 일부를 실망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아직 바닥층 민심이 등을 돌릴 정도는 아니라고 판단한다. 북한 핵 문제와 경제난 해법에서 어느 정도 가닥을 잡은 뒤 정치 개혁 등이 화두로 등장하면 네티즌들도 다시 활기를 찾으리라는 것이다(28쪽 딸린 기사 참조).

이는 일정 부분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새 정부가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것은 노대통령 핵심 지지층이라 할 개혁 세력의 ‘지지 유보’ 움직임이라고 정상호 한양대 연구교수(제3섹터연구소)는 지적했다. 네티즌이건 호남 사람이건 마찬가지이다. 노풍(盧風)·정풍(鄭風)에 따라 이리저리 흔들렸던 지지층은 사실 큰 변수가 되지 않을 수 있다. 그렇지만 개혁성과 자주적 외교 역량을 기대하고 노대통령을 일관되게 지지했던 층이라면 문제가 다르다.

유창선씨는 인사 편중 같은 지엽적인 문제보다는 노대통령이 지난 두 달간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적 비전을 뚜렷하게 제시하지 못하면서 이들 핵심 지지층을 실망시켰다고 지적했다. 강한 개혁 추진으로 승부한 것도 아니고, 북한 핵·경제 문제 같은 핵심 현안에 집중하지도 못하면서, 언론·재벌 개혁 문제 등에 대해 전혀 기술적이지 못한 방법으로 접근하는 바람에 대통령이 헛심만 쓰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검법 파동이나 이라크 파병에 대통령이 대처하는 모습 또한 이들을 상심하게 만들었다. 전문가들은 지난 대선의 주요 특징 중 하나로 민족 문제가 첨예한 이슈로 부각된 것을 꼽고 있다. 미군 장갑차로 인한 여중생 사망 사건 등으로 반미 감정이 이례적으로 격화한 상황에서 2030 세대는 햇볕정책 계승과 자주 외교 노선을 천명한 노대통령에게 일방적인 지지를 몰아주었다.

그런데 이들이 오늘날 노대통령을 향해 ‘이회창을 뽑은 것과 다를 게 뭐냐’고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한길리서치가 최근 벌인 여론조사를 보면 이 문제에 대해 젊은 세대가 얼마나 민감하게 반응하는지 알 수 있다. 한길리서치가 지난 3월22일과 4월12일 각각 대구·광주 시민을 상대로 벌인 설문 조사에 따르면, 노대통령에 대한 생각이 이전보다 더 나빠졌다는 응답자는 전체의 17.7%(광주)와 8.1%(대구)였다. 흥미있는 것은 그 이유이다. 광주의 30∼40대가 인사 소외, 대구의 30∼40대가 경제 불안정을 첫 번째 이유로 꼽은 데 반해 20대 응답자는 광주(42.9%)·대구(49.4%) 똑같이 ‘대미·대북 외교에서의 자주성과 원칙 부재’를 꼽았다.

청와대로서는 이같은 반응이 야속할 수 있다. 대통령이 청남대 편지에서 밝힌 대로, 대통령이라는 자리는 누구를 편드는 자리가 아니다. 더욱이 외교는 옳고 그름을 넘어 한반도의 생존이 걸린 문제이다. 그럼에도 ‘절망의 강’이라는 필명으로 유명한 인터넷 논객 이태준씨는, 새 정부가 고비마다 중대 결단을 내리는 과정에서 핵심 지지층을 세심하게 배려하는 데 미숙했다고 지적한다. 특검법이나 이라크 파병을 둘러싸고 논란이 벌어졌을 때 대통령이 ‘최선의 고뇌’를 하는 모습을 보였어야 하는데도, 그간 개혁 세력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단 한 방에 날려 버리는 듯한 관성적 결론을 내림으로써 지지층의 자존심을 상하게 했다는 것이다.

물론 대통령은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다. 최장집 교수(고려대·정치학)는 우리 사회가 어떤 ‘영웅적 해결자’를 갈구하는 것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라고 지적하고 있다(<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후마니타스). 정당과 언론이 제구실을 못하는 상황에서 특정인에게 기대는 것은 과도한 기대와 실망을 되풀이하게 만들 우려가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정치·언론 부문 개혁을 위해서도 필수인 것이 네티즌들의 참여이다. 네티즌들의 말마따나 ‘노무현 정권이 수구 세력에 집중 난타당할 때 그래도 앞장서 달려갈 사람들은 여전히 진보이고, 호남이고, 개혁 세력’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이들의 열정이 서서히 식어간다는 사실이다. 정상호 교수는 노대통령이 지난 대선에서 자신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주었던 힘, 곧 시민 사회 저변에 꿈틀대는 개혁적 열망에 확신을 갖지 못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상황이 자꾸 꼬이고 있다고 말했다. ‘성공한 대통령’보다 ‘위대한 대통령’을 소망했던 이들의 코드를 놓쳐 버리면 참여정부의 앞날은 예상보다 훨씬 더 험난해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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