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선의 추억’은 계속된다
  • 이숙이 기자 (sookyi@sisapress.com)
  • 승인 2004.10.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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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박근혜·정동영, 1,2위 급부상…정장관은 차기 대통령감 첫손가락
정동영 통일부장관과 박근혜 한나라당 대표. 두 사람은 지난해 조사에서 거의 주목되지 못했다. ‘한국을 움직이는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항목에서 정장관은 각각 45위와 21위에 그쳤고, 박대표는 아예 이름 석자도 올리지 못했다.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항목에서 정장관이 1위, 박대표가 11위를 기록했을 뿐이다.

하지만 불과 1년 사이에 두 사람은 한국 사회에서 가장 주목되는 쌍두마차로 떠올랐다. 전문가들은 이번 조사에서 ‘대통령을 제외하고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 1, 2위로 박대표(59.1%)와 정장관(36.5%)을 꼽았다. 이해찬 국무총리와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 이명박 서울시장이 그 뒤를 이었고, 네티즌 조사에서도 이 순위는 똑같았다.

전통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정치인’은 각 당 대표, 총리, 거물 정치인같이 그 사람이 맡고 있는 역할과 명성에 따라 순위가 매겨진다. 지난해만 해도 1위는 당시 노무현 대통령 탄핵을 외치며 대여 강경투쟁을 선도하던 최병렬 한나라당 대표가 차지했고, 2위는 고 건 총리, 3위는 박상천 민주당 대표였다.

이번에 박근혜 대표가 1위에 오른 것도 정부·여당을 견제하는 거대 야당의 지도자라는 점이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올해 초까지만 해도 당내 비주류로 분류되며 주변을 맴돌던 박대표는 최병렬 전 대표가 사퇴한 후 구원투수로 긴급 등판했다. 당시 한나라당은 ‘차떼기 정당’이라는 오명과 공천 갈등에 따른 내분, 탄핵 역풍이 겹쳐 한달 앞으로 다가온 총선을 제대로 치러낼 수나 있을지 위기감에 싸여 있었다.
하지만 박대표는 높은 인지도와 특유의 이미지로 단박에 보수층을 결집시켰고, 4·15 총선에서 침몰 직전의 한나라당을 1백21석이나 되는 제1 야당으로 회생시켰다. ‘대선자금 수사’와 ‘대통령 탄핵’이라는 역사적 사건이 박대표를 일약 신데렐라로 만든 것이다.

정동영·이해찬·김근태 트로이카 떠오르다

정동영·이해찬·김근태 트로이카가 영향력 있는 정치인 2,3,4위를 차지한 것은 이들이 노무현 정부의 2기 내각을 이끄는 실세들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차기 대권주자로 꼽히는 정동영·김근태 두 사람에게 각각 외교안보 분야와 사회문화 분야의 책임 장관이라는 중책을 맡겼고, 이해찬 총리에게는 이들을 아우르는 책임 총리 역할을 부여함으로써 후계자도 키우고 권력 누수도 막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리고 있다.

지난해와 비교해 ‘영향력 있는 정치인’ 순위는 한바탕 요동을 쳤다. 지난해 10위 안에 든 인물 가운데 재진입한 사람은 김근태·고 건 두 사람에 불과하고, 한 시절을 풍미한 김대중·김종필·이회창 전 총재나 김원기 국회의장은 열린우리당 이부영 의장·천정배 원내대표, 권영길 민주노동당 의원, 이헌재 경제 부총리 같은 현역들에게 자리를 내주었다.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항목에서는 정동영 장관이 간발의 차이로 박근혜 대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했다. 정치인·기업·금융인·문화예술인·시민사회단체에서는 정장관이, 교수·법조인·종교인 그룹에서는 박대표가 우세했다.
상승 폭으로만 따진다면, 11위에서 2위로 급부상한 박대표의 약진이 훨씬 인상적이다. 하지만 전문가들은 오히려 정장관의 1위 고수에 더 주목하는 분위기다. 한 정치학자는 “일반 국민 여론조사에서는 박대표가 상당한 격차로 정장관을 앞서가는 게 최근 추세다. 그런데도 여론주도층이 정장관을 1등으로 꼽았다는 것은 그만큼 ‘차기 가능성’에서 정장관 쪽에 더 무게를 싣고 있다는 의미다”라고 해석했다. 일반 국민을 상대로 한 여론조사가 현재를 반영한다면, 전문가 여론조사는 미래를 전망하는 지표로 더 유용하다는 분석이다. 실제로 네티즌 조사에서는 박대표(57.3%)가 정장관(26%)을 제치고 차기 대통령감 1위로 꼽혔다.

추석 직전 <시사저널>과 <한겨레21>이 실시한 일반인 여론조사에서 차기 대통령감 1위로 꼽혔던 고 건 전 총리가 전문가 조사에서 5위로 밀려난 것도 두 집단 사이의 시각 차이를 보여준다. 정치 구도와 각종 변수를 따져볼 때 전문가들은 ‘고 건 대통령’이 현실화하는 데 회의적인 셈이다.

전문가 집단이 정장관을 1순위로 꼽은 배경은 그간의 실적과 잠재력 때문이라는 것이 중론이다. 정장관은 올해 초 열린우리당 의장으로 선출된 후 현역 의원 46명, 지지율 3위이던 약체 여당을 3개월 만에 과반 여당으로 끌어올리는 견인차 역할을 했다. 물론 ‘탄핵’이라는 변수가 있었고 중간에 ‘노풍(老風)’이라는 복병도 만났지만, 그가 ‘몽골기병식’ 행보를 보이면서 열린우리당 지지율이 상승세를 탔고, 스스로 의원 직을 반납해 노풍을 차단한 것도 강한 인상을 남겼다.

통일부장관이 된 후에도 그는 조용히 실적을 쌓아가고 있다. 8월 말 미국으로 날아가 주한미군 감축 시기를 늦추고 온 것이 대표 사례다. 리처드 롤리스 미국 국방부 아태담당 부차관보는 최근 워싱턴 특파원들과 만나 “정동영 장관이 럼스펠드 국방장관을 만나 미국이 감축 연기에 협력할 것을 요구했고, 그의 말이 매우 설득력이 있어서 부시 대통령에게까지 보고가 되었다”라고 그간의 과정을 설명했다.

전문가들은 꼬일 대로 꼬인 남북관계가 탈출구를 찾을 경우 정장관의 입지가 더욱 탄탄해지리라고 본다. 내년은 6·15 남북정상회담 5주년인 데다, 광복 환갑을 맞는 해여서 여권은 돌파구를 찾는 데 부심하고 있다.
정동영 대 김근태, 박근혜 대 이명박 ‘대선 예선’ 예고

‘차기 대통령감’ 3, 4위는 이명박 서울시장과 김근태 보건복지부장관이 차지했다. 지난해에는 김장관이 3위, 이시장이 4위였는데, 서로 맞바꾸었다. 아무래도 이시장이 행정수도 이전 문제를 계기로 본격적인 이름 알리기에 나선 것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 선거를 치른 다음 해라는 점 때문인지 지난해 차기 대통령감을 묻는 조사에서는 무응답율이 50%에 이르렀지만, 이번에는 없다/무응답 비율이 19.4%로 크게 줄었다. 여론주도층을 중심으로 ‘차기’에 대한 고민이 본격적으로 시작되고 있다는 증거다.

이 흐름대로라면 열린우리당에서는 정동영 대 김근태, 한나라당에서는 박근혜 대 이명박의 예선 구도가 될 공산이 크다. 하지만 ‘정치권의 1년은 다른 분야의 10년’이라고 할 만큼 부침이 가팔라서, 내년에도 이런 추세가 계속될지는 예단하기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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