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구를 뒤흔든 ‘대~한민국’
  • 정리·문정우 기자 ()
  • 승인 2002.07.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교민들은 “요즘처럼 한국인인 것이 자랑스러운 적은 없었다. 정말 살맛 난다”라며 환호한다. 또 “한국의 인지도와 국가 신인도가 껑충 뛰어올랐을 것이다”라고 기꺼워한다. 하지만 좋은 일에는 마(魔)가 끼는 법. 한국이 심판의 도움을 받아 승승장구하고 있다는 현지 언론이나 현지인들의 비난이 거세 마음의 상처를 받은 교민들도 적지 않다. 다음은 <시사저널> 해외 주재 편집위원과 통신원, 그리고 현지 소식통들이 보내온, 각국 교민들이 치르고 있는 월드컵 소식을 정리한 것이다.






이번 월드컵에서 가장 복받은 이들은 북미 교민들이다. 미국팀이 한국팀의 도움을 받아 16강에 진출한 데다 캐나다팀은 일찌감치 예선에서 탈락해, 약자를 응원하는 현지 언론의 지원까지 받으며 승리를 즐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 교민이 가장 많이 몰려 사는 미국 로스앤젤레스 일원의 코리아타운 곳곳에는 한국팀의 선전을 기원하는 플래카드가 붙어 있다. 간판업체마다 주문이 폭주한다. 8강전이 열린 6월22일 코리아타운 중심가의 대표적인 오피스 건물인 에퀴터블 빌딩 주차장에는 교민 5천여 명이 모여 붉은 티셔츠를 입고 응원을 펼쳤다. 로스앤젤레스뿐만 아니라 뉴욕 시카고 필라델피아와 워싱턴 근교인 매릴랜드·버지니아 등에서도 한국팀 경기가 열릴 때면 수많은 교민들이 합동 응원을 펼친다.


현지 언론도 한국팀의 선전에 대해 칭찬 일색이다. <워싱턴 포스트>는 6월23일 ‘초라한 월드컵 성적에 시달려온 애숭이팀이 이제는 우승을 넘보고 있다’라고 쓰고, 같은 날 <뉴욕 타임스>는 ‘한국이 싸우는 경기는 제3 세계 출신의 초라한 축구팀이 소풍에 나서는 정도가 아니다’라고 평했다.
소수 민족이 기 펴고 사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인 캐나다의 교민들은 그야말로 ‘광란의 나날’을 보내고 있다. 지금 토론토는 태극기가 뒤덮고 있다. 한인 상가들은 마치 국경일이라도 맞은 것처럼 태극기를 두세 개씩 내걸었다. 10 달러짜리 붉은 티셔츠는 불티 나게 팔려나간다. 스포츠채널 TSN의 아나운서는 한국팀 경기를 중계하면서 연신 ‘대~한민국’을 따라 하면서 즐거워한다.





캐나다 교민들 ‘광란의 나날’


6월22일 한국이 스페인을 꺾고 4강에 오르던 날 교민들은 토론토의 한쪽 방향 차선을 모두 점거하고 행진을 벌였다. 캐나다 이민 역사상 이런 일은 처음이었다.
미국이나 캐나다에서는 월드컵이 거의 교포들만의 잔치에 그치지만 유럽에서는 다르다. 유럽에서 축구는 공기와도 같다. 아마추어 동호회만도 수십만 개를 헤아리고, 프로 4부 리그의 경기를 놓고도 낯을 붉히며 토론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는 곳이 유럽이다. 연일 유럽의 강호를 격파하고 있는 한국팀에 대한 관심도 그만큼 뜨겁다. 우리 교포들은 한국팀에 쏟아지는 찬사에 가슴 벅차하면서도 ‘심판을 매수했다’는 극단적인 비난이 쏟아질 때면 당혹스럽다고 말한다.


이 와중에도 유럽에서 가장 마음 편하게 게임을 즐긴 이들은 영국 교민이다. 한국팀과 영국팀은 서로 결승에나 올라가야 만날 대진이었기 때문이다(물론 성사되지는 않았지만). 런던의 남서부 뉴몰던 지역에 몰려 사는 한인들은 주로 퍼브(선술집)에서 열띤 응원을 펼쳤다. 특히 이탈리아와 스페인을 격파하던 날은 흥분에 들뜬 한인 수백 명이 붉은 티셔츠를 입고 대형 태극기를 휘감은 채 런던 도심을 활보했다.


“개고기 요리 문화에 대한 반감, 남북 대치 등으로 영국에서 한국에 대한 이미지는 좋은 편이 아니었다. 방송에서도 ‘코리아 재팬 월드컵’을 굳이 ‘재팬 사우스 코리아 월드컵’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그러나 한국팀이 거듭 선전하면서부터 한국을 보는 눈이 달라졌다." 영국에서 유학하는 원종원씨(뮤자컬 평론가)의 말이다.





영국의 축구 해설자 중에는 조별 리그가 끝난 뒤부터 한국의 팬이 된 사람이 많다고 한다. 갈수록 상업화해 가는 영국 프로 축구협회와 잘난 척하는 스타에 식상해 있다가 열정과 투지로 뭉친 한국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고 매료된 것이다.


4강에서 한국과 맞붙은 독일의 교민들은 학생회·교회·한인회가 구심점이 되어 합동 응원을 주도해 왔다. 스페인전 때는 프랑크푸르트에서만 관전 카페를 3개나 마련했다. 이탈리아전에 이어 스페인전이 끝난 뒤에도 즉석 카퍼레이드를 벌였다.


교민 한 사람은 “혹 태극기를 못 알아볼까 봐 천천히 달렸다. 누가 모이자고 한 것도 아닌데, 그냥 태극기를 단 차를 몰고 나와서 퍼레이드하는 차를 뒤따라 가는 것이다. 그렇게 세 바퀴를 돌았다”라고 말했다.


국기를 못 알아볼까 봐 천천히 달려야 할 만큼 독일에서 한국은 여전히 낯선 나라이지만, 지금 교포들은 자부심으로 한껏 부풀어 있다. 이제 겨우 삼성과 대우·현대는 알아도 한국 자체는, 그저 차범근의 고향일 뿐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국이 선전하면서 매일 아침 한국에 대한 보도가 홍수를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김치 담그는 법, 축구 좋아하는 스님, 제주도 4·3사건까지 다루더니 급기야 독일 방송은 히딩크 감독의 고향에까지 취재진을 파견하기에 이르렀다.


민간 방송인 SAT(월드컵 1차 요약 중계권을 갖고 있고 정통한 해설과 따끈한 토론을 하는 채널이다)가 히딩크의 고향을 찾아 네덜란드인에게 마이크를 들이대자 그는 “(당신에게는)유감스러운 일이지만, 한국이 이길 거다. 그럴 수 있다고 확신한다”라고 소리쳤다. 앙숙인 독일과 네덜란드는 독일과 한국의 경기를 독일과 네덜란드의 싸움으로 간주하고 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때 직접 경기장을 찾아 응원했다는 교포 류효선씨(25·마인츠 대학 재학)는 “우리 선수들의 움직임이 그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가볍다. 한국팀에 대한 자부심을 느낀다”라고 말했다. 류씨에 따르면, 독일인은 여러 가지 면에서 충격을 받았다.





이탈리아 언론만 흥분, 시민들은 차분


“기량도 기량이지만 나라 전체가 밀어주고, 또 그만큼 애국심으로 똘똘 뭉친 선수들을 보는 게 신기한 모양이다. 여기 선수들은 대표가 되어도 내심 소속 구단을 더 중요하게 여긴다. 그래서 나라를 위해서 죽을힘을 다해 뛰는 한국 선수들을 더 인상 깊게 받아들인다.”


독일 교포들이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것은 편파 판정 시비가 줄곧 한국팀을 따라다닌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명백한 오심도 여럿 보였기 때문에 영 뒷맛이 개운치 못하다. 한국과 스페인전이 끝난 뒤 국제축구연맹(FIFA)은 항의 메일을 40만통이나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프랑크푸르트의 한 교포는 “8강전에서는 차라리 져도 좋았을 것이다. 사람들이 또 뭐라고 할지 걱정이다”라고 말했다. 영국이나 독일 언론이 이탈리아의 볼멘 소리, 스페인의 격렬한 항의를 여과 없이 전달하고 있어 교포들은 더욱 속이 상한다. 그들은 유럽에 입이 있지만 한국은 없는 셈이다.


한국팀에 가장 거칠게 시비를 걸고 있는 이탈리아 교민들이 느끼는 중압감은 말도 못한다. 경기 직후 국영 RAI 방송의 흐름은 한국인을 상대로 전쟁이라도 하자는 것 같은 분위기였다고 한다. 한국인에게 폭언을 퍼붓거나 불쾌감을 유발하는 행동을 하는 사례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예컨대 집까지 따라와 문을 두드리거나, 지나가는 자동차 안에서 한국인을 향해서 무언가를 집어던지든가 하는 식이다.


하지만 유학생 이한성씨는 방송이나 옐로 페이퍼만 열을 올릴 뿐이고 일반 시민들은 승패를 떠나 경기를 즐기는 분위기라고 전한다.
그는 오히려 한국 사람들이 목숨 걸고 응원하는 것을 보고 조금은 신기해 한다며, 대학에서 스페인전이 끝난 뒤 지도교수와 나눈 대화 내용을 소개했다.


-오늘 한국이 스페인도 이겼습니다.

-축하한다. 한국 대단하다.

-조금은 부끄럽습니다.

-왜 심판 판정에 관한 문제냐?

-그렇습니다. 홈팀 이점을 오늘도 조금 본 것 같습니다.




-그건 어쩔 수 없다. 그리고 심판 판정이 승부를 내는 것도 아니다. 이탈리아가 진 것은 한 골에 만족해서이다. 이탈리아나 멕시코는 경기당 3~4골은 넣을 수 있는 팀이다. 그러나 선수들이 자신의 돈만 생각해서 그냥 대충 넘어간다. 이탈리아도 수비 일변도 축구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래도 깔끔하게 이겼으면 좋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피파도 홈 어드밴티지를 바랄 것이다. 유럽 축구 시장은 지금 한계 상황이다. 각 구단은 부채에 허덕이고 있다. 오죽하면 인터 밀란이나 AS로마가 증권 사업을 하겠나. 피파는 월드컵 호재를 틈 타 아시아 시장을 개척하고 싶을 것이다.

요컨대 거의가 축구 9단인 유럽 사람들은 이번 한국팀의 승승장구를 유럽 축구계가 처한 여러 가지 한계 상황을 고려해가며 요모조모 냉정하게 분석하고 있다는 얘기이다. 따라서 현재 유럽에서 일고 있는 반한(反韓) 움직임을 지나치게 우려할 필요는 없다는 지적이다. 교민들은 한국이 월드컵을 공동 개최해 ‘투자한 만큼’의 홍보 효과는 확실히 거두었다고 본다.


이번 월드컵에 아시아 대표로 참가한 일본과 중국의 반응은 대조적이다. 공동 개최국이라는 유대감 때문인지 일본의 언론과 여론은 한국팀의 선전에 뜨거운 박수를 보내고 있다. 그만큼 교포들의 기쁨도 크다.


도쿄의 최고 번화가 신주쿠 옆에 있는 신오쿠보 거리는 도쿄 속의 작은 한국이다. 여기에 가면 한국인에게 필요한 모든 일이 다 해결된다. 스페인전이 열린 6월22일 이 거리 역시 모두 빨간색으로 뒤덮였다.


일본 ‘박수’, 중국은 ‘악담’


이번 월드컵을 통해 이름이 가장 많이 알려진 ‘대사관’이라는 식당의 주차장에 붉은 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몰려든 것이다. 여기만 아니라 신주쿠의 한국인 식당이나 술집에는 거의 모두 한국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식당에 켜놓은 텔레비전 바로 밑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텔레비전을 보지 않았다. 자세히 보니 그는 시각장애자였다. 그러나 그 역시 같이 뭉쳐서 환호하기 위해 집에 앉아 있을 수는 없었다. 귀로 아나운서 얘기를 들으며 그는 사람들과 같이 손을 들어올리며 기뻐했다.





경기가 끝나자 일본 경찰이 닭장차까지 동원해 긴장하고 있는 가운데 붉은 무리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거기에는 한국 사람들만 있지 않았다. 축구를 좋아하는, 그리고 한국의 그런 광란의 응원을 신기해 하는 일본 사람들이 같이 섞여 있었다.


월드컵에 첫 출전해 조별 리그에서 3패만 기록하고 짐을 싼 중국의 반응은 유럽의 당사자들 못지 않게 적대적이다. 스페인전이 끝난 뒤 <티위저우바오(體育週報)>는 6월23일 ‘이런 승리는 개똥이다’ ‘독일팀, 한국을 꺾어 버려라’는 제목을 달고 한국팀과 한국인이 갈수록 고립되고 있다고 전했다. <광저우르바오(廣州日報)>는 같은 날 ‘한국팀 승부차기로 4강 오르다, 의혹 투성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한국팀에 대해 계속 악담을 퍼부어온 중국 CCTV의 스포츠 채널 진행자 중의 한 사람인 류젠홍(劉建宏)은 스페인전이 끝난 뒤에도 ‘이번 월드컵으로 아시아 축구의 판도는 바뀌지 않는다. 여전히 일본이 1위, 사우디아라비아가 2위, 한국이 3위이다’ ‘한국이 주최국만 되면 경기가 이상해진다’는 발언을 했다.


한국 교민들은 중국 언론의 이같은 보도에 상당한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게다가 조별 리그 때는 베이징 체육대학에서 함께 모여 응원했으나 16강 진출 뒤에는 중국 당국이 막아 모이지도 못하고 있다. 한국인이 스페인전이 끝난 뒤 거리에 나와 환호하자 출동한 공안이 막으며 “중국은 현재 홍수로 수백여 명이 죽고 인터넷 카페 방화 사건으로 수십명이 죽었다. 굉장히 어려운 상황이니 한국인이 이해하라”고 말했다.


베이징에 파견된 회사원 ㄱ씨(41)는 “중국이 지나치다. 한국 축구가 잘 하니까 시기와 질투가 발동한 것 같다”라고 말했다. 조별 예선에서 탈락했을 때 ‘군자의 복수는 10년도 늦지 않다’며 대범한 척했던 중국의 본모습은 달랐다.



취재/워싱턴·변창섭 편집위원, 런던·원종원씨(뮤지컬 평론가), 프랑크푸르트·노순동 기자, 도쿄·이성욱씨(문학평론가), 베이징·주장환 통신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