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더 싫어졌다” 56.1%
  • 박성준 (nype00@sisapress.com)
  • 승인 2002.03.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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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미디어리서치 ‘대미 감정’ 긴급 여론조사 “한총련, 미국상공회의소 점거에 공감” 47.1%‘ 악의 축’ 발언에 분노, ‘김동성 사태’로 대폭발
'세계 유일 초강대국’ 미국의 오만함에 ‘50년 혈맹’ 한국의 반감이 극에 달하고 있다. 적어도 현재 시점에서 한국은 결코 미국과 미국인을 친구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


주의를 집중할 때는 동그란 눈을 치켜 뜨고 이마에 여러 가닥 주름살을 새겨 넣는 독특한 버릇이 있는 조지 W. 부시 대통령은, 현재 미국의 한 여론조사에서 ‘미국 역사상 가장 위대한 대통령 3위’에 오를 만큼 절정의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하지만 한국인의 눈에 비친 그의 모습은 부정적이다.





〈시사저널〉은 최근, 미국과 미국인에 대한 한국인들의 대미 감정을 알아보는 긴급 여론조사를 실시했다. 조사 시점은 지난 2월23일. 부시 대통령이 취임 이후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해 김대중 대통령과 회담하고 중국으로 날아간 직후였다. 그의 방한 기간에 서울 시내는 시위로 소란스러웠고, 때마침 터진 ‘쇼트트랙 사건’으로 여론은 술렁거렸다. 긴급 여론조사는 바로 이같은 시점에서 이루어졌다.



중국에 대한 호감도 40.9%, 미국 앞질러



조사에 응한 사람은 전국의 만 20세 이상 성인 남녀 1천13명이었다. 〈시사저널〉은 이들에게 ‘한반도 주변 4강 중 가장 호감을 갖는 나라는 어디인가’를 묻는 질문을 포함해 모두 13개 문항을 질문했다. 결과는 예상보다도 훨씬 험악하게 나왔다. 여론조사를 대행한 미디어리서치측은 최종 결과에 대해 ‘이변이 속출했다’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조사에서 ‘충격의 결정판’은 지난 2월19일 부시 대통령의 방문에 때맞추어 주한 미국상공회의소를 점거한 한총련 대학생들의 소행에 대한 응답자들의 태도였다. ‘미 상공회의소 점거 사건에 대해 어느 정도 공감하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7.1%가 ‘공감한다’(‘전적으로 공감한다’와 ‘다소 공감한다’의 합계)고 답했다.



반면 ‘공감하지 않는다’(‘별로 공감하지 않는다’와 ‘전혀 공감하지 않는다’의 합계)는 비율은 전체 응답자의 49.0%. 차이는 미미하다. 점거 사건의 주체가 한총련이라는, 과거 공안 당국자들의 조작에 의해 거의 ‘이적 단체’와 동일시되었던 집단인데도 ‘공감한다’와 ‘공감하지 않는다’로 응답한 비율이 엇비슷하게 나온 것은 아무래도 심상치 않다. 과거에는 ‘반미’가 소수 운동권의 전유물이었다. 하지만 지금 한국의 일반 시민은 한총련 학생들의 행동에 공감하고 있다.



이같은 결과에 직접 여론조사를 한 담당자도 놀라움을 나타냈다. 미디어리서치 김지연 책임연구원은 “아무리 명분이 정당해도 범법 행위나 위법 행위가 개입된 사안에는 대개 반대 의사를 보여온 것이 지금까지 여론조사의 경험칙이었는데, 이번에 그 원칙이 깨졌다. 상황의 심각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대목이다”라고 촌평했다.



응답자들 스스로도 미국에 관한 생각에 큰 변화가 일고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 〈시사저널〉은 이번 여론조사에서, 우선 ‘미국에 대한 호감도 변화 여부’를 물었다. 이 질문에 응답자의 56.1%가 ‘(과거에 비해) 더 나빠졌다’고 답했다.





〈시사저널〉은 이들 응답자만을 상대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 등 다섯 가지 보기를 제시하며 다시 한번 질문했다. ‘(그렇다면) 감정이 더 나빠진 계기가 무엇인가.’ 반미 감정에 불을 지른 ‘결정타’는 솔트레이크 겨울 올림픽에서 벌어진 ‘김동성 금메달 도둑 사건’이었다. 이 질문에 대해 응답자의 65.0%가 ‘겨울 올림픽의 쇼트트랙 부문 심판 판정 사건’이라고 답한 것이다. 거의 모든 다른 답을 압도한 응답률이었다. 또 거의 모든 계층의 조사 대상이 이 응답에 가세했다.



이어서 ‘부시 대통령의 악의 축 발언’이 18.8% 응답을 얻어 2위, 아프가니스탄 정권과의 반 테러 전쟁이 3위(8.1%), 지난해 터진 주한미군 기지 독극물 방출 사건도 3.5% 응답률을 기록하며 4위에 올랐다.



13개 문항에 대한 응답 전반에 걸쳐 ‘김동성 사건’이 미친 영향이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한반도 주변 4강 가운데, 현재 어느 나라에 대해 가장 호감을 느끼는가’에 중국이 40.9% 응답을 얻어 29.6% ‘지지’를 얻은 미국을 멀찌감치 따돌리고 1위를 차지했다. 3위는 일본(12.3%).



중국과 미국의 격차를 벌려놓은 ‘주력 부대’는 20~30대 젊은층과 고학력자였다. 30대는 50.5%가 중국을 지지했다. 대학 졸업 이상 학력자들은 47.1%가 중국을 선호했다. 20대는 일본에 특히 호감을 가진 것으로 조사되었다. 다른 연령층의 2배인 22.6%가 ‘가장 호감 가는 나라’로 일본을 지목한 것이다. 20대 응답자의 미국 선호도는 18.7%에 그쳤다.



“반 테러 전쟁 확전에 반대” 71.4%



한편 ‘미국과 일본 사이에 축구 경기가 벌어지면 어느 나라를 응원하겠는가’라는 질문에 응답자의 47.1%는 ‘누가 이기든 상관없다’고 대답함으로써 과반수 정도가 냉소적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 질문에 대한 조사에서도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왔다. 비록 근소한 차이이기는 하지만 ‘일본을 응원하겠다’는 응답(29.0%)이 ‘미국을 응원하겠다’는 응답(23.9%)을 누른 것이다. 미국에 대한 반감은 이처럼 일본에 반사 이익을 주고 있다.



‘김동성 사건’에 뜨겁게 달아오른 응답자들은 ‘미국’ 그 자체나, ‘미국이 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시비를 걸고 넘어질 태세다. 미국의 아프가니스탄 반 테러 전쟁에 대한 반응도 그 가운데 하나다. 응답자들은 ‘대체로 반대한다’와 ‘전적으로 반대한다’를 모두 합쳐 71.4%가 미국의 반 테러 전쟁 확전 움직임에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미국에 대한 태도가 더 나빠진 계기를 묻는 질문에 ‘아프가니스탄 전쟁’이 3위를 차지한 것을 보면, 한국인들은 벌써부터 미국의 반 테러 전쟁에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온 듯하다.



부시 대통령의 대북 정책에 대해서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가 62.9%. 미국과 북한의 대화 중단 사태에 대해서는 응답자의 57.6%가 ‘양쪽 모두 잘못이 있다’고 답했지만, ‘미국의 잘못이 더 크다’는 쪽도 24.2%로 만만치 않은 비율을 보였다.





“용산기지 내 미군 아파트 건립 반대” 76.4%



현재의 반미 감정은 앞으로 한·미 간에 풀어야 할 현안의 진로에 대해서도 암운을 드리우고 있다. 현재 한국과 미국 정부는 대북 정책 외에도, 용산기지 내 아파트 건립 문제, 주한미군 주둔군지위협정(SOFA) 개정 문제, 미사일 방어(MD) 계획 참가 문제, 그리고 차세대 전투기 사업(FX) 등 외교·군사·사회 전부문에 걸쳐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 있다.



그런데 이번 조사에서 응답자들은 이 모든 사안에 대해 대부분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용산기지 내 미군 아파트 건립 문제에 대해 ‘반대’가 76.4%로 ‘찬성 18.9%’를 압도했다. 그뿐만 아니다. 미국 정부의 최고위급 인사들까지 판촉에 나서고 있는 F15기에 대해 ‘구입에 반대한다’는 대답이 63. 7%를 기록했다.





한국인의 체험 속에 미국은 ‘두 얼굴’을 갖고 있다. 하나는 한국을 전쟁의 잿더미에서 구해주고 북한의 남침 위협으로부터 한국민을 굳건히 보호해준 ‘50년 우방’의 얼굴이다. 그러나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을 기점으로 미국의 이같은 얼굴은 ‘독재자의 후견인’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역사의 진실은, 미국의 얼굴을 더 추악한 모습으로 덧칠했다.


그 사이 한국민은 6·25 때 노근리에서 미국이 죄 없는 양민을 학살했던 사실에 경악했고, IMF 시절 미국이 보였던 행동은 미국이 ‘고리대금업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했다. 그리고 최근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답게, 북한을 ‘악의 축’이라고 일방적으로 선포했다.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 이것은 최근 미국 상원 외교위원회의 조셉 바이든 위원장이 연설에서 토로했듯이 ‘미국에게 좋은 뉴스이면서 동시에 나쁜 뉴스이기도 한’ 미국의 ‘업보’이다. 그런데 문제는 한국에 ‘아직도 미국이 우리 우방이라고 생각하느냐’는 식의 반문이 일반 시민들 사이에서도 늘어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한·미 양쪽 정부에 큰 고민거리로서 새로운 접근을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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