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후 일전' 갑옷 입는 양갑
  • 안철흥 기자 (epigon@e-sisa.co.kr)
  • 승인 2001.12.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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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갑 - 권노갑, 후보 경선 놓고 팽팽한 힘 겨루기…
한고문 대권 포기 없이 화해 불가능
옛 동지였던 민주당의 권노갑 전 고문과 한화갑 상임고문 사이에 힘 겨루기가 거세지고 있다. 겉으로는 화해 제스처를 보이고 있지만, 한고문이 대권 행보를 멈추지 않는 한 접점을 찾기가 어려운 형국이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 중요한 변수가 될 '갑의 전쟁'은 과연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한화갑 민주당 상임고문은 지난 11월10일 〈시사저널〉과의 인터뷰에서, 권노갑 전 고문과 화해할 것이며 "(동교동계 좌장으로) 받들어 모시겠다"라고 밝혔다. 그 즈음은 한고문이 여러 매체와 인터뷰하며 경선 출마를 다짐하던 무렵이다. 동교동계의 단합을 통해 대권까지 쟁취하겠다는 내심을 드러낸 셈이다.




한고문은 그날 〈시사저널〉 팀과 만나기 직전 동교동계 비서 출신인 윤철상 의원과 단둘이 조우했다. 두 사람이 단독 회동한 것은 집권 후 처음이었다. 그는 이날 윤의원에게 동교동계 단합 의사를 내비치며, '동생이 중간에서 힘을 써달라'고 부탁했다. 11월18일에는 전남 영암에서 열린 새시대새정치연합청년회(연청) 주최 체육대회에 참석해 김옥두 의원과도 자리를 함께했다.


한고문의 이런 화해 제스처는 일단 효과가 나타난 듯 보였다. "(외유설을)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만들어서 얘기하고 있다"라며 한고문을 의심했던 권노갑씨도, 화해 메시지가 보도된 뒤 "생각할 시간은 필요하겠지만 못 만날 이유가 없다"라고 화답했다. 동교동계 의원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구파에 속하는 윤철상 의원은 두 분의 갈등은 견해 차이일 뿐 극복될 것이라며 화해를 긍정적으로 전망했다. 그는 또한 권고문 주변 사람들이 입이 너무 가볍다고 말하기도 했다. 김옥두 의원도 '한고문은 같은 동교동 식구'라고 말하며, 화해 가능성을 내비쳤다.


한화갑 고문은 이어 11월 20일 서울 올림픽공원 펜싱경기장에서 대규모 후원회를 열었다. 버스를 4백대를 동원하고, 2만명 이상이 참석한 행사였다. 집권 이후 최초의 후원회 모임이기도 했다. 한고문 측근은 "당원들에게 대통령 비서가 아닌 정치인으로서 새출발하는 모습을 확인시키는 것이 목적이었다"라고 말했다. 한고문은 이날 "대통령과 이심전심 상의를 끝냈다"라며 사실상 대권 행보에 나설 것임을 선언했다.


그러나 이 날은 진전되는 듯하던 양갑의 화해 전선에 새로운 난기류가 형성된 날이기도 했다. 동교동계 구파가 일부 언론에 '한화갑의 대선 출마 4대 불가론'을 흘린 것이다. 또한 권노갑 고문은 후원회에 나타나지 않았고, 화환도 보내지 않았다. 이후 두 사람 사이는 다시 냉랭해졌다. 양쪽 모두 여전히 화해를 언급하고 있지만, 가능성은 현저히 줄어든 느낌이다. 양갑은 과연 화해할까, 아니면 양갑 최후의 결전이 시작되는 것일까.


우선 한고문이 화해를 제의하고 나선 배경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가 화해 발언을 꺼낸 11월10일은 김대중 대통령이 총재 직을 사퇴한 이틀 후다. 대통령이 브루나이로 출국하기 전 쇄신 건의서까지 올렸던 한고문으로서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사태 전개였다. 8일 청와대 간담회를 마치고 나온 한고문은 상당히 충격을 받은 모습이었다. '두 사람의 갈등 때문에 대통령이 마음에 상처를 입었다'는 청와대의 반응도 그에게 그대로 전달되었다. DJ 장남인 김홍일 의원이 '아버지께서 불편해 하신다'며 화해를 요구한 것도 작용했다. 결국 한고문이 먼저 권노갑 전 위원에게 손을 내밀었다. 한고문의 한 측근은 이에 대해 "신심으로 다가설 것이다"라고 밝혔다.


겉으로는 "잘해보자", 안으로는 각개 전투




그러나 한고문이 정치적 화해까지 고려하고 있는 것은 아닌 듯하다.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로 인해 정치적 실체로서의 동교동은 끝났다." 한고문의 말이다. 이 말에는 '권씨는 이미 정치적 역할이 끝났기에 인간적으로 보듬고 가겠다'는 자신감이 묻어 있다. 권씨측이 화해의 전제 조건으로 생각하는 후보 경선 포기를 전혀 고려하지 않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오히려 한고문은 후원회 성공에 대단히 만족해 하면서, 발언 수위를 점점 높이고 있다. 이 때문에 한고문의 내심은 동교동계를 해체·흡수하려는 것이라는 관측까지 나오고 있다.


또한 화해 제의는 한고문에게 '실은 없고 득만 있는' 절묘한 전략이기도 하다. 화해가 이루어지면 대의원들에게 화합적인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고, 화해가 안되더라도 그 또한 동교동계의 수구적인 이미지에서 벗어나는 계기로 삼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고문은 구시대 정치인이 아니라 이제야 자기 정치를 시작하는 신진 정치인이다"라는 한고문 측근의 말에서도 이런 내심이 엿보인다.


동교동 구파가 한고문의 화해 제의에 선뜻 응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런 불신감 때문이다. 권씨의 최측근인 이훈평 의원은 "두 분이 인간적으로 화해하더라도 권고문이 한고문을 정치적으로 지지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라고 못박았다. 그는 또한 지난 9월 권씨가 한고문을 만난 자리에서 후보가 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를 설명했으며, 대신 당 대표를 맡으라고 했으나 한고문이 이를 거부했다는 사실까지 공개했다.


두 사람이 결정적으로 갈라선 것은 재집권에 대한 견해 차이 때문이다. 한고문은 DJ 통치 철학을 계승하는 사람이 후보가 되어야 하며, 자신이 그 역할을 맡겠다는 입장인 반면, 권씨는 될 사람을 밀어야 한다는 쪽. 호남 후보 불가론도 '한화갑은 안 된다'는 권씨의 생각이 일부 반영된 것이다. 결국 한고문이 대권 포기를 선언하지 않는 한 진정한 화해는 불가능한 셈이다.


두 사람의 이런 내심이 처음으로 충돌한 것이 지난해 전당대회 때다. 한고문이 최고위원 경선에 나서자 동교동계 구파는 한고문의 1등 당선을 막기 위해 노력했다. 1등을 하면 대권 욕심까지 낼 것이라는 것이 권씨측의 생각이었다. 그러나 한고문은 김홍일 의원의 지지를 바탕으로 최고위원 경선 1등을 차지했고, 권씨측이 우려한 대로 대선 출마까지 공언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물론 양갑 갈등이 내연된 것은 이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두 사람의 갈등이 처음으로 노출된 것은 1995년. 한고문이 전남도지사에 출마하려던 것을 권씨가 막으면서부터다. 당시 두 사람은 심각한 대립 직전까지 갔었다. 이후 한고문은 권씨로부터 줄곧 견제 당했다. DJ가 집권할 때까지 그는 당직 운이 없는 평범한 야당 의원으로 지내야 했다. 한고문이 발탁된 것은 DJ 집권 초, 권씨가 일본에 머물고 있던 1년 정도뿐이다. 당시 그는 원내총무와 사무총장을 연이어 맡으면서 실세로 떠올랐으나, 권씨가 귀국한 이후 다시 이선으로 물러났다. 반면 권씨는 일선에 선 적은 거의 없지만, 내내 이인자로 군림했다.


최근의 양갑 갈등은 이런 오래된 앙금이 임계점을 넘어 폭발한 것이다. 따라서 화해는 제스처일 뿐 양갑이 결국은 최후 결전을 벌이게 될 것이라는 것이 민주당 주변의 분석이다. 더구나 지난해 전당대회 때와는 달리, 이번 전당대회에는 대권과 당권의 향방이 달려 있다. 승패 여하에 따라 모든 것을 거머쥘 수도,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양측도 이 점을 잘 알고 있다. 표면적인 화해 제의와 달리, 물밑에서는 각개 전투가 치열하다. 이와 관련해 '동교동계 의원 중 대부분은 우리를 지지하고 있다'는 한고문측의 주장은 눈여겨볼 대목이다. 실제로 설 훈 배기선 배기운 문희상 의원 등 DJ 비서 출신 동교동계 의원 가운데 절반 이상이 한고문과 뜻을 함께 하고 있다. 그동안 구파로 분류되었던 전갑길 의원은 11월 20일 한고문 후원회 때 자신의 비서진을 대거 동원해 행사를 돕기도 했다.


한화갑 공세 강화, 권노갑은 '정중동'




이런 사례를 들면서 한고문측은 동교동계 의원 가운데 권씨와 뜻을 같이하는 의원은 김옥두 의원 정도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구파로 분류되었던 최재승 윤철상 의원도 이제는 중립적인 태도를 취하고 있다는 것이 한고문측 주장이다. 또한 한고문측은 동교동계를 언급하면서 이훈평 조재환 박양수 김방림 의원 등은 의식적으로 제외하고 있다. 비서 출신 동교동계와 범 동교동계를 분리하고, 권씨 측근들이 동교동계의 목소리를 독점하는 것을 막겠다는 뜻이다. 한고문의 한 측근은 "'대통령을 모신 동교동계'는 중립을 지키고 있으며, '권노갑 전 위원 밑에서 일했던 이른바 권노갑계'만이 이인제 고문을 지지하고 있다"라고 말했다.


한고문의 공세적 태도와 달리, 권노갑씨를 비롯한 동교동 구파는 아직은 정중동 자세다. 권고문은 최근 동교동 구파 의원들에게 정치 현안에 대해 함구할 것을 지시했다. 김옥두 의원도 연말까지는 아무 말도 하지 않을 것이라며 엄정 중립 의지를 내비쳤다.


김대중 대통령이 경선 중립을 공식 선언한 마당에 섣불리 정치 일정을 언급할 경우 '김심 논란'이 일어날 수 있으며, DJ의 총재직 사퇴 의미가 퇴색한다는 현실적 고려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부 정비가 필요다는 것이 더 근본적인 이유다. 민주당내 쇄신파 의원들의 표적에서 한 발짝 벗어남으로써 내년 경선에 대비한 힘을 비축하려는 포석인 셈이다.


권씨로서는 우선 시급한 것이 홀로 서기다. 'DJ 대리인'으로 평생 살아온 그가 DJ 딱지를 떼고도 살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전망이 엇갈리고 있다. 그는 일단 청와대의 사퇴 압력에 버티는 것으로 승부수를 던졌다. 이훈평 의원은 "장수는 주군을 위해 전장에서 죽을 수는 있지만, 죄를 뒤집어쓰고 죽을 수는 없는 것 아니냐"라며 권씨의 홀로 서기 의지를 전했다. 이의원은 또한 (총재직 사퇴는) 대통령이 국정에 전념하겠다는 뜻이며, 권고문에게 행동의 자유를 준 것이라고 해석하면서, 권노갑 고문의 영향력이 있는지 없는지는 경선 때 두고보면 알 것이라고 말했다. 양갑의 명운을 걸고 마지막 한판 승부를 하겠다는 뜻이다.


물론 양갑이 극적으로 화해할 가능성은 여전히 배제할 수 없다. 권씨와 가까운 사이인 이인제 상임고문 쪽에서 양갑 화해론 가능성이 조심스레 거론되고 있는 점도 눈여겨볼 대목이다. 이고문의 한 측근은, 후보가 정해지면 동교동은 어차피 화해할 수밖에 없는 것 아니냐면서, 사견임을 전제로 '이인제 후보-한화갑 대표' 가능성을 제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해 한고문측은 '이인제 고문의 희망사항일 뿐'이라며, 중도 포기는 결코 없을 것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최후의 결전뿐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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