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수로는 정치게임의 제물
  • 南裕喆 기자 ()
  • 승인 1995.05.0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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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요자금 40억달러, 결국은 ‘수교’용 경비
북한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고 있다. 그들이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 가장 먼저 갖추어야 할 조건으로는 안정적인 전력 공급이 손꼽힌다. 남포공단을 둘러본 대우그룹의 한 관계자는 “독자적인 발전 설비를 갖추지 않는 한 전력 수급 불안정으로 인해 안정적인 생산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고 말했다. 전력 부족으로 모든 산업 시설이 마비되다시피 한 북한은 5년째 마이너스 경제 성장을 면치 못하고 있다.

유엔 자료에 따르면, 79년까지만 해도 북한의 발전량은 한국의 2백80억kWh보다 20억kWh가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석탄과 수력 자원이 풍부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력갱생’을 추구한 북한의 에너지 정책은 대규모 수력 발전소 건설에 치중해 극심한 투자 낭비를 초래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최근에는 풍부하던 석탄마저 채굴량이 감소했고, 그나마 탄질이 급속히 나빠져 화력 발전도 전력 생산에 한계를 보이기 시작했다. 최근 평양을 방문한 외국인들에 따르면, 외국인들이 머무는 1급 고려호텔에서조차 정전 사태가 일어나는 실정이다.

북한은 미·북한 협상에서 줄곧, 영변에 핵발전소를 건설하려고 한 것은 오로지 전력 증산을 위해서라고 주장해 왔다. 부족한 전력을 원자력 발전으로 해소하려는 것이지 핵무기를 개발할 의도가 아니라는 주장이다. 북한이 영변 원자력 발전소를 포기하는 대가로 경수로를 제공키로 미국이 합의한 것도, ‘명분’상으로는 영변 원자력발전소를 폐기함으로 말미암아 북한이 상실하는 전력을 보상해 주기 위해서라는 논리이다.

“원전보다 화력발전이 전력난 해소에 더 효과”

그렇다면 경수로 2기가 완공될 경우 북한의 전력난은 얼마나 해소될 수 있는가. 에너지 전문가들은 1기당 백만kW 용량의 경수로 2기로 북한이 당면한 현재의 전력난을 해소하기는 어렵다고 말한다. 그러기에는 우선 경수로의 전력 생산량이 턱없이 작다. 유엔과 국제에너지기구 자료에 의하면, 북한의 90년도 총발전용량은 9백50만kW로 추정된다. 경수로를 2기 건설하면 북한의 총발전용량이 약 20% 정도 늘어나는 효과를 낼 뿐이다. 게다가 완공까지는 최소 7년이라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 이런 이유을 들어 최근 <북한의 에너지 경제>를 저술한 뉴욕 주립대 장영식 교수는 “북한은 경제성 있는 발전을 위해서 원전을 계획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북한에게는 석탄을 이용한 화력 발전이 원전보다 값싸고 효율적이라는 설명이다.

물론 기회 비용을 생각하는 자본주의 경제논리로만 북한의 에너지 정책을 재단하는 데는 무리가 따른다. 자급자족을 강조하는 주체사상에 따라 북한은 국산 에너지 활용에 초점을 맞추어 왔다. 경제성을 따지기에 앞서 자체 매장량이 풍부한 석탄 사용을 최대한 늘리고 석유 소비는 병적이리만큼 극단적으로 회피해 왔다. 원자력 발전에 필요한 우라늄을 가지고 있는 북한으로서는, 원전 기술만 확보한다면 에너지 자급자족이 가능하다고 판단했을 가능성이 높다. 에너지경제연구원 정우진 선임연구원은 “우라늄은 수입 에너지가 아니기 때문에 북한이 원전을 주체사상에 어울리는 가장 좋은 대안으로 생각했을 수 있다”고 관측했다. 미국의 한반도 핵전문가인 피터 헤이즈 박사도 “북한의 핵발전소 건설을 지나치게 핵무기 개발이라는 측면에서만 주목한 것이 사실이다”라고 지적했다.

미 스탠턴그룹, 북한 정유공장 인수

어쨌든 산업시설을 마비시키고 있는 극심한 전력난은 북한으로서는 발등에 떨어진 불이다. 경수로가 건설된다고 전력난이 해소되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 북한은 2001년까지 기다릴 시간적 여유가 없다. 외국인 투자를 유치하기 위해서라도 북한은 새로운 발전 시설이 당장 필요한 상황이다. 경수로 이외의 또 다른 전력 확보 방안을 당장 찾아야 하는 것이다. 북한이 최근 미국의 발전설비 전문 업체인 스탠턴그룹과 합작 계약을 맺은 것은 이러한 북한의 자구 노력과 미국 기업의 이익이 맞아 떨어진 경우이다.

미국 보스턴에 본사를 두고 있는 스탠턴그룹은 북한에 화력 발전소를 짓고 선봉에 있는 연산 2백만t 규모의 정유공장인 승리화학공장을 보수해 원유를 정제할 것으로 알려졌다. 서울의 한 소식통에 따르면, 스탠턴그룹은 미국 정부로부터 상당한 금융 지원을 받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과 미국이 난항을 겪는 경수로 협상 테이블 밑으로 ‘밀월’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한국을 배제하려는 북한의 정치 전략과 한국의 입장을 가볍게 생각하는 클린턴 행정부의 단견은, 한반도를 둘러싼 경제논리 앞에서 결국은 한계를 보일 가능성이 높다. 미국은 한국이 고집을 부리면 일본과 둘이서만 손잡고 경수로 공급하겠다고 최근 한국 정부를 외교적으로 위협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한국이 아니면 경수로 자금 40억달러를 댈 나라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일본의 경우 수교가 전제되야 하는데, 북한에 대한 일본의 영향력 확대는 미국이나 중국이 결코 바라는 바가 아니다. 결국 북한의 경제 발전을 위한 자금 요청은 한국으로 돌아오게 되어 있다. 스탠턴그룹과 북한의 합작 사업이 이를 보여주는 좋은 예이다.

북한은 현재 화력 발전소 건설비도, 승리화학이 정제할 원유를 사들여 올 자금도 한 푼 없는 형편이다. 물론 북한은 이런 사정 때문에 스탠턴그룹이 필요하다. 스탠턴그룹은 서방의 거의 모든 은행으로부터 파산 선고를 받은 북한 대신 건설 자금을 빌리고 원유를 도입해 정제한 석유제품을 판매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 석유제품이 가격 경쟁력을 갖는 최적의 거리에 있는 나라는 ‘불행히도’ 한국과 일본뿐이다. 북한이 스탠턴그룹에 현금 대신 지급할 현물을 (이익을 남기며) 처리할 수 있는 나라도, 수송 거리가 짧고 무관세 혜택을 부여하는 한국뿐이다. 이 때문에 스탠턴그룹 임원들이 최근 서울을 방문해 한국 재벌 그룹들을 열심히 접촉하려 했던 것이다.

북한의 전력난을 해소하는 가장 빠르고 값싼 방법은 한국의 남는 전력을 북한에 보내는 것이라는 데 전문가들은 이견이 없다. 북한의 전력난은 절대 발전량 부족보다는 송·배전 시설 낙후에 더 큰 원인이 있다. 송·배전 시설에 대한 보수 없이는 경수로 10기를 지어도 북한의 전력난은 해소되지 않는다. 더욱이 전력 수요 피크 시간대가 서로 다른 남북한의 전력 수요 유형 때문에 남북간 전력 교환은 남북한 모두에게 환상적인 경협 프로젝트로 손꼽힌다. 뉴욕 주립대 장영식 교수는 “의정부 변전소와 개성 변전소를 연결하면 단 몇백만달러가 드는 송전 시설로도 당장 원전을 완공한 것과 맞먹는 양의 추가 전력 확보가 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막대한 자금이 들고 환경을 파괴할 우려가 있는 경수로 건설은 미·북한 협상이 처음 개시될 때부터 (협상 전략상의 이유에서라도) 아예 실현 가능한 대안으로 검토되지 않았어야 했다는 지적이 있다. 한국은 미국을 상대로 경수로의 ‘논리적 모순’을 지적하는 외교 노력을 적극 전개해야 했다는 것이다. 재선 도전 이전에 어떻게든 북한 핵 문제를 해결하려는 데만 몰두해 온 클린턴 행정부는 한반도 화해를 위한 거시적인 목표보다는 정권의 단기적 이익을 먼저 생각하고 있다. 경수로 건설이 북한에게 진정 경제적으로 실익이 된다면 한국도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미·북한 관계 개선을 위한 정치 게임에 40억달러라는 막대한 자금을 쓰는 것은 남북한 모두에게 과중한 부담이고 낭비일 뿐이다. 또한 10년이란 공사 기간에 미국과 일본은 ‘자동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되어 있다. 경수로는 진정한 남북 화해보다 남북 갈등을 심화시킬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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