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북한 어깨 겯고 한반도 질서 재편성
  • 南文熙 기자 ()
  • 승인 1996.01.2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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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둘러싸고 1월11~13일 하와이에서 있은 미·북한 군사 접촉은, 미국측의 철저한 실무적 협상 전략과 북한측의 정치 공세가 맞서 타협점을 모색하는 데 일단 실패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협상에서 미국측은 협상 안건을 미군 유해 문제에 한정하는 입장을 견지해, 평화협정 체결 등 협상 수위를 정치 차원으로 높이려는 북한측 협상 전략을 차단한 것으로 전해진다.

양측 입장이 정면 충돌해 일단 협상이 결렬된 상태이나 이번 회담이 이대로 끝날 것으로 보는 전문가는 거의 없다. 오히려 앞으로 있을 본격적인 협상을 위한 출발점이라는 견해가 우세하다. 협상 직후 미국측도 “가능한 한 북한과 군사 채널을 유지하기를 바란다. 어떤 식으로든 돌파구가 열릴 것이다”라며 낙관적 입장을 보였다.

전문가들이 하와이 회담을 단순히 일회성으로 보지 않는 이유는, 이번 회담이 지난해 6월부터 은밀하게 시작돼 약 6개월간 수면 아래에서 진행돼온 군부 접촉의 결과에 따른 것이며, 그동안의 비공식 접촉을 공개 협상으로 전환하기 위한 신호탄이기 때문이다. 가까운 사례로, 하와이 군사 문제 접촉은 바로 그 직전에 있었던 지난해 11월 말의 미·북한 장성급 고위 접촉과 직접 연동돼 있다고 볼 수 있다. 이 장성급 비밀 접촉을 <시사저널>은 단독으로 취재 보도했다(95년 12월7일자 제319호 참조). 당시 보도에 따르면, 미군의 장성급 협상팀이 지난해 11월 중순께 예비 실무 접촉을 거쳐 11월 말께 극비리에 평양에 들어가 북한 군부의 핵심 실세 그룹과 미·북한 군사 현안에 대해 협의했으며, 협의 내용 중에는 미군의 주요 관심사인 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비롯해 미국 군부와 북한 군부의 향후 역할 조정 및 경제 협력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11월 말의 장성급 비밀 접촉과 연계해 보면, 이번 하와이 군사 문제 접촉은 당시 논의된 내용 중 일부인 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공식으로 다루기 위한 첫 모임일 뿐이다. 당시 논의됐던 내용이 상당수 베일에 가려져 있으나, 앞으로 미·북한 관계 개선 과정과 연계돼 표면화하리라는 사실은 불을 보듯 뻔하다.

북한 군부가 ‘우성호 송환’ 결정

지난해 11월 말 평양에서 있었던 미·북한 장성급 회동은 지난해 6월부터 시작된 일련의 양국 군부 접촉의 하이라이트였다고 볼 수 있다. 양측이 약 6개월간 밀고 당기는 협상을 거쳐 좁힌 내용을 중심으로 장성급 인사들이 만나 커다란 물꼬를 트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북한 군부가 이 접촉 이후 대외 정책 방향을 전환할 조짐을 보인 것이 바로 우성호 송환 조처였다. 국내 북한 정보 소식통들에 따르면, 우성호 송환은 특이하게도 노동당이 결정했다기보다는 ‘우성호를 잡은’ 군의 결정에 따른 것이었다고 한다. 즉, 북한 군부가 미국 군부와 가진 고위 접촉 이후 미국측에 보낼 긍정적 메시지로 우성호를 선택한 것이며, 이는 앞으로의 접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분위기 조성용이었던 것이다.

11월 말 장성급 접촉과 관련한 보도 이후에도 <시사저널>은 베일에 싸인 이 접촉의 실체를 규명하기 위해 취재를 계속해 왔다. 그 결과 몇 가지 사실이 더 밝혀졌다. 우선 당시 평양에 들어갔던 미군측 인사는 정보 계통에서 근무하는 예비역 준장이었던 것으로 확인됐다. 미군측이 현역 장성을 내세우지 않은 이유는 이 사실이 드러날 경우의 위험 부담을 고려한 때문이다. 정보 계통 인물이 들어간 것은, 그동안 군부 접촉을 추진한 그룹이 미군 내에서도 정보팀 쪽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당시 미국측은 북한 군부와 예비 접촉을 벌이던 지난해 11월17일께 이 사실을 한국 군부에 통보했다고 한다. 우리측이 이에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96년도 국방 정책을 발표하면서 하와이 회담 이외의 미·북한 군부 직접 접촉은 반대한다는 내용을 삽입한 것을 보면, 내심으로는 상당히 심각하게 바라보았음을 알 수 있다. 이같은 내용 외에 중요한 사실이 몇 가지 더 있다.
16인 군사위원회, 대미 접촉 주도

미국측이 북한 군부와 계속 접촉한 결과 현재 북한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핵심 실세 그룹의 실체가 밝혀졌다. 미국 정보 소식통들이 최근 확인한 바에 따르면, 현재 북한 군부는 ‘16인 군사위원회’라는, 친김정일파 군부 핵심 그룹이 완전 장악하고 있다. 이 16인 군사위원회는 김일성 주석 사망 후 김정일이 군부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김정일에 대한 충성이 확실하며 그의 대내외 정책 노선을 충실히 추종하는 군부내 핵심 인물들로 구성돼 있다고 한다. 현재로서는 군사평의회 같은 일사불란한 조직이라기보다는 김정일의 정책 노선을 추종하고 집행하기 위한 일종의 비상위원회 성격이 강한데, 다소 산발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다. 16인 군사위원회가 알려진 초기에는 군내의 혁명 2세대 그룹이 주축이 되어 군부 세대 교체의 의미를 띠고 있을 것으로 관측되기도 했으나, 구성원 중 혁명 1세대인 백학림 사회안전부장이 포함돼 있는 것이 알려지면서 1세대와 2세대가 혼재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중요한 것은, 북한 군부를 실질적으로 장악하고 있는 이 16인 군사위원회가 바로 북한 군부에서 미국과 군사 접촉을 주도하는 추진력이 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같은 사실은 16인 군사위원회 핵심 인물인 이하일 당군사부장이 지난해 11월 말 미·북한 장성급 접촉의 북한측 파트너였다는 사실에서도 확인된다. 사실 미국측은 북한 군부와 접촉을 시작한 초기부터 이하일 군사부장을 그 첫 번째 대상으로 지목해 왔다고 한다. 그것은 이하일 군사부장이 36년생으로 만경대혁명학원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을 졸업한 혁명 2세대 군부 핵심 실세로 지난 92년 당군사부장에 임명된 이래 조명록 총정치국장, 김영춘 총참모장과 더불어 군부내 실세 3인방을 이루고 있는 인물이기 때문이다. 또 그가 책임지고 있는 당군사부는 당중앙위원회 군사위원회의 상설 기구로, 평화시 북한 군부의 실질적 최고 사령부여서 김정일의 군부 장악을 뒷받침하는 핵심 요직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현재 북한 군부의 대미 접촉은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북한 군부내 최고 실세 그룹의 결단에 의해 추진되고 있다는 점이 명확해진 것이다.

미·북한, 매주 한 번꼴 접촉

11월 말 미·북한 장성급 접촉의 주요 의제는 크게 미군 유해 송환 문제, 양측 군부의 역할 찾기, 경제 협력으로 나뉜다. 이는 다시 군사(미군 유해) 정보(역할 찾기) 경제(경제 협력) 영역으로 구분할 수 있는데, 현재까지 알려진 것은 미군 유해 송환 문제뿐이고, 나머지 정보 및 경제 영역은 베일에 가려 있다. 그런데 11월 말 협상이 이루어질 즈음 정보 소식통들 사이에 북한 군부가 미국 군부에 화력발전소를 지어 달라고 요청했다는 얘기가 나돌기 시작했다. 이같은 정보는 북한 정보통들 사이에 대단한 관심을 끌었다.

북한 군부는 왜 군부와는 무관한 문제처럼 보이는 화력발전소 지원 문제를 협상거리로 끄집어냈을까. 여기에는 복잡한 문제가 얽혀 있다. 첫째로 관심을 끄는 것은 미국 스탠턴 그룹과의 관계이다. 현재 북한의 화력발전소와 관련한 용역은 스탠턴 그룹이 중심이 돼 이와 관련한 조사·연구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고 알려져 있다. 이런 와중에 북한 군부가 미국측에 화력발전소 지원을 요청한 것은 이미 스탠턴 그룹과 군부 사이에 이와 관련한 묵계가 성립되어 있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제시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앞으로 있을 북한 권력 내의 나눠 먹기 게임에서 화력발전소는 군부 몫으로 이미 할당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이 점은 미·북한 관계에서 북한 군부의 역할 찾기와 관련해 상당히 중요하다. 즉, 앞으로 미·북한 군사 협의는 미군 유해 송환 문제 이후 장거리 미사일 수출 문제와 생산 감축 문제 등 군비 감축 문제를 필연적으로 다룰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무기 수출이 바로 북한 군부의 주요 자금원이 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미국측이 협상을 진행시키기 위해서는 무기 수출을 상쇄할 만한 새로운 자금원을 북한 군부에 제시하지 않으면 안된다. 이와 관련해 현재 북한 전문가들이 주목하는 것이 앞으로 있을 국제 금융기구의 대북 차관 운영권 일부를 군부에 떼어주는 방식이다. 이는 화력발전소 문제와 연동돼 벌써 북한 권력 내에서 암묵적 동의가 이루어졌을 가능성도 있다는 것이다.
11월 말 장성급 접촉과 관련한 내용은 아직도 상당 부분 베일에 가려 있다. 나머지 내용들은 지난해 6월부터 있었던 미·북한 비공식 접촉의 쟁점들을 통해 간접 추정할 수밖에 없다.

미·북한 비공식 접촉의 역사는 어쩌면 핵문제가 시작된 93년부터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핵문제 이외의 쟁점에 대한 양측 협의가 본격화하기 시작한 것은 지난해 6월 콸라룸푸르 회담에서 핵문제가 일단락된 이후부터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이 북한에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송환 문제를 비공식 제의한 것은 지난해 6월 전후였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해 9월 북한군 판문점 대표단 수석 대표인 이찬복 중장이 북한을 방문한 셀리그 해리슨 카네기재단 수석 연구원에게 밝힘으로써 명확해졌다. 당시 북한측은 미국에 경제 제재를 추가로 완화해 달라고 집요하게 요구했다. 지난해 8월 LA국제경영연구원이 주최한 ‘북한 투자 세미나’에서 한성렬 유엔주재 북한대표부 공사는 경제 제재 추가 완화, 북한 해외 자산 1천4백만달러 동결 해제, 제3국 은행에서의 북한 달러 결제 허용, 미국 기업인들의 대북 직접 투자 및 무역 허용 등을 관계 개선의 전제 조건으로 미국측에 요구했다. 이에 대해 데이비드 브라운 미국 국무부 한국과장은 한국전 참전 미군 유해 및 실종자 문제를 조사하기 위한 조사단 파견 협조, 미사일 등 대량 학살 무기 수출 전면 금지를 포함한 국제 테러 금지, 남북 대화, 인권 문제 개선 등을 북한측에 요구했다. 그동안 핵과 경수로 문제에 가려 있던 양측의 상호 관심사가 이제 전면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문제들을 논의하기 위한 양측의 고위 협상 채널도 바로 같은 시기에 가동되기 시작했다. 북한측에서는 유엔주재 북한대표부가 중심이 되었고, 미국측은 국무부가 중심이 되었다. 양측은 거의 매주 한 번꼴로 뉴욕과 워싱턴을 오가면서 빈번하게 접촉했다고 한다.

이름 밝히기를 꺼리는 한 정보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 양측의 협의 안건은 크게 네 가지였다고 한다. 첫째는,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협상 문제이다. 한국이 중심 역할을 맡는 문제로 난항을 보이던 이 협상은 콸라룸푸르 회담 이후 북한측의 추가 비용 요청으로 또다시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두 번째 안건은 서로의 협상 조건을 어떤 순서로 타결할 것인가, 세 번째는 이 과정에서 무엇을 주고 무엇을 받을 것인가이며, 마지막이 군사 접촉 창구 개설 문제였다. 전체적으로 보아 6월부터 8월까지는 북한과 미국 양측이 협상 안건들을 정리하고, 양측 협상 창구를 정비하는 시기였다고 볼 수 있다.

협상 창구 정비와 관련해 북한측은 당시 심한 내부 몸살을 앓고 있었다. 특히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 협상에서는 외교부·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군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었다. 6월 이전까지만 해도 군은 외교부와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의 전향적인 대외 교섭에 제동을 거는 역할을 주로 해왔다. 그러나 6월부터 미·북한 군부 접촉이 시작되면서 군의 태도는 상당히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대미 협상이 대세를 이루고 있는 가운데 군부도 독자적인 역할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6월부터 8월 사이에 빈번하게 이루어졌던 미·북한 비공식 군부 접촉은 주로 북경과 평양을 무대로 하여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측은 주로 북경대사관의 군사 및 정보 담당 요원들이 주축이 되었고, 북한측은 당군사위원회 고위 인사들이 주축이 되었다.

당시 북경주재 미국대사관의 대북 접촉 요원들은 대사관이 아닌 본국 정부의 직접 지휘를 받아 움직인 것으로 알려졌다. 또 판문점 군사정전위원회 창구를 이용한 영관급 군사 접촉도 10여 차례 넘게 이루어졌다. 그리고 유엔주재 북한대표부와 미국 국무부 라인도 간접 채널로 이용되었다.

이 시기에 특기할 것은, 쌀문제를 중심으로 한 남북 대화와 미·북한 비공식 접촉의 상관 관계이다. 즉, 쌀회담이 시작된 6월부터 8월까지가 바로 미·북한 비공식 접촉이 진행되던 시기라는 점을 볼 때, 당시 남북 대화는 미·북한 대화의 분위기 조성용으로 미국이 북한측에 요구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3개월 간의 접촉 결과 미·북한 협상이 상당히 진전됨에 따라 더 이상 쌀회담의 효용성이 없어지자 자연스럽게 폐기된 것으로 분석된다.

지난해 9월은 미·북한 비공식 접촉이 분수령을 이룬 시기라고 정보 소식통들은 지적한다. 9월은 북한 정권 처지에서 여러 모로 중요한 시기였다. 우선 김정일의 군부 장악이 거의 끝내기 단계에 들어갔다. 이는 김정일이 이 시기를 기점으로 지난 1년간 전개한 군부대에 대한 현지 지도를 중단하고 당이나 정무원 쪽 활동을 강화한 것으로도 입증된다. 16인 군사위원회가 결성된 것도 이 시기이고, 또한 군부가 미국과 협상하면서 새로운 역할 찾기에 나서기 시작한 것도 이 때라고 할 수 있다. 정권 차원에서는 김일성 주석 사망 1주기를 보낸 뒤 김정일의 전면 등장을 상정한 대내외 정치 일정을 새롭게 확정한 시기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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