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신 ‘탄핵정변’
  • 시사저널윤무영 (foto@sisapress.com)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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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당이 탄핵이라는 핵탄두를 쏘아올림으로써 여야의 총선 올인 작전이 극점에 이르렀다. 4·15 총선은 이제 국회의원 선거가 아니라 수구와 진보, 민주와 반민주가 격돌하는 ‘대선’ 구도로 바뀌었다.
야만이다, 쿠데타다, 독재로의 회귀다. 이런 문어적 표현도 사치인 모양이다. 네티즌들은 단 한마디로 ‘3·12 사태’를 표현한다. “국회가 미쳤다!” 한 달이면 임기가 끝날 국회가 임기 4년을 남겨둔 대통령을 탄핵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태’가 빚어지면서 공화국의 시민들은 말 그대로 ‘망치로 후두부를 가격당한 듯한’(딴지일보 김어준 총수) 거대한 충격에 휩싸여 있다.

그런데도 탄핵을 주도한 야 3당은 여전히 ‘네 탓’ 만을 하고 있다. 편파적인 언론 때문에, 극렬 ‘노빠’(노무현 지지자) 때문에 탄핵의 정당성이 가려지고 있을 뿐 자기들이 직접 나서 대민 접촉을 벌이면 여론이 돌아서게 되리라고 그들은 공언한다.

그렇지만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상황이 그렇게 낙관적이지만은 않은 듯하다. 시간이 흘러도 탄핵 비판 여론은 수그러질 줄을 모르고 있다. 대선 당시의 ‘친노-반노’ 구도는 ‘민주-반민주’ 구도로 새롭게 재편되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2004년 3월,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탄핵 정국의 한복판을 <시사저널> 취재팀이 찾아가 보았다.

<아침 이슬>이 울려 퍼졌다. <임을 위한 행진곡>이 울려 퍼졌다. 허름한 옷을 입은 40대 남자가 껌을 상자째 들고 시위대가 앉아 있는 대열 이곳저곳에 껌 한 통씩을 던졌다. “앗!” 껌이 날아드는 방향을 향해 팔을 뻗었다가 우연히 껌을 거머쥔 20대 여성이 관중석에 날아든 홈런 볼을 낚은 야구팬마냥 까르르 웃었다. 껌통 껍질을 벗긴 이 여성은 껌 하나를 자기 입에 넣고 옆에 앉은 남자 친구에게도 하나를 물려 주더니 남은 껌을 옆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 건넸다.

잠시 후 집회 사회자가 안내 방송을 했다. 아주머니 한 사람이 잃어버린 검정 지갑을 애타게 찾고 있으니 지갑을 발견한 사람은 연단 쪽으로 갖다 달라는 것이었다. 이때 집회 참가자는 어림잡아 7만명. 애는 써 보지만 당사자 또한 지갑을 찾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지는 않는 눈치였다. 그런데 잠시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500m는 족히 넘을 시위 행렬 저 끝에서부터 무언가가 파도타기하듯 앞으로, 앞으로 전달되어 왔다. 지갑이었다. 그것을 받아든 여인은 “카드·현금 모두 그대로다!”라며 기쁨을 감추지 못했다.
낯설지만 낯설지 않은 광경. 2004년 3월, 대통령 탄핵 무효를 촉구하며 광화문에 모인 시위대는 강렬한 집단 기시감(旣視感)에 빠져들었다. 자발적으로 음료수를 사 나르고, 옆사람을 배려하며, 수만 명의 시위대가 한자리에 모였어도 절도·폭행 사건 따위를 거의 찾아보기 힘든 수준 높은 시민 공동체. 그것은 집회 사회를 맡은 최광기씨 말마따나 1980년 5월 광주에서, 1987년 6월 전국 방방곡곡에서 조직되었던 바로 그 공동체의 재현이었다.

잊힌 줄 알았던 이 공동체를 역사에서 부활시킨 것은 다름 아닌 정치권이었다. 운명의 그 날, 3월12일 오전까지만 해도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탄핵안이 가결될 것이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

당시 노대통령과 여당은 수세에 몰릴 대로 몰려 있었다. 이미 지지율 30%대마저 무너져 있던 노대통령은 전날 있었던 대국민 기자회견으로 더 이상 잃을 것도 없을 점수를 또 한번 잃은 상태였다. 기자회견 직후 SBS와 TN소프레스가 벌인 여론조사에 따르면, 일반 국민 10명 중 6명(58.3%)은 자기 친인척과 측근들의 비리 의혹에 대한 노대통령의 사과와 해명이 불충분했다고 받아들이고 있었다. 여기에 대우건설 남상국 사장의 투신과 노사모 회원의 분신 건이 겹치면서 일반의 여론은 급속도로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이대로라면 야당은 탄핵안 카드를 손에 쥐고 슬쩍 흔드는 것만으로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을 흠집 내는 한편 총선을 앞두고 자기네 지지층을 결집하는 ‘꿩 먹고 알 먹고’식 효과를 거둘 수 있었다. 그러나 야당은 여기서 만족하지 않았다. 지난 몇 달간 노대통령의 ‘총선 올인’을 그토록 저주했던 야당은 그들 스스로 ‘탄핵 올인’을 선택했다.

그 결과는 일단 참담했다. 3월12일 당일 KBS SBS 중앙일보 한국일보 한겨레 등 언론기관이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탄핵 가결이 잘못되었다는 의견은 70% 안팎을 오르내렸다. 이때만 해도 야당 지도부는 이를 거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탄핵 사흘째인 3월14일 <시사저널>이 미디어리서치에 의뢰해 실시한 여론조사 결과를 보면 탄핵 비판 여론이 전혀 수그러지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번 조사에 따르면, 탄핵안 가결이 잘못된 일이라는 응답자는 75.8%로 잘된 일이라는 응답자(22.2%)를 월등하게 앞지른다. 이는 같은 조사 기관이 탄핵 당일 벌인 여론조사 결과보다 오히려 3.0% 포인트 높아진 수치이다(잘못된 일 72.8%, 잘한 일 25.7%).

그렇다면 한나라당과 민주당은 이같은 ‘역풍’을 예견하지 못했던 것일까? 일각에서는 두 야당이 남상국 사장 투신 이후 탄핵 찬성 여론이 잠시 상승하는 조짐에 혹해 자충수를 두었다는 분석이 제기되기도 한다. 대통령이 탄핵을 ‘유도’했다는 음모론도 있다(아래 상자기사 참조).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들이 그렇게 우발적으로 일을 처리했을 것으로만은 볼 수 없는 정황들이 발견된다.

일단 이번 탄핵을 앞장서 주도한 민주당의 경우는 탄핵말고 달리 돌파구가 없었으리라는 분석이다. 민주당 지지율은 2월 이래 한 자릿수로 내려앉아 반등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난 3월9일 조선일보와 한국갤럽이 수도권 지역 14곳을 상대로 각 당 출마자 가상 대결을 벌인 결과에 따르면, 민주당은 단 한 곳에서도 의석을 얻지 못하는 것으로 드러났다. 수도권뿐만이 아니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자체 조사 결과 2월 말께부터는 호남 지역에서조차 거의 모든 후보가 열린우리당 후보에게 추월당한 것으로 나타났다”라고 전한다. 이 때문에 수도권 의원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느긋하던 호남 의원들까지 비장한 각오로 뭉칠 수밖에 없었다는 것이다.

노대통령이 민주당의 씨를 말리려 한다는, 나름으로는 이유 있는 피해 의식 또한 민주당을 극단으로 몰고 갔다. 특히 검찰이 한화갑 전 대표의 경선 자금마저 문제 삼으면서 민주당 내부에서는 ‘총선에서 설사 몇 석을 건진다 해도 노대통령이 검찰 수사 내지는 선거법을 이용해 결국 민주당을 고사시킬 것’이라는 불안이 팽배했다. 조순형 대표는 조대표대로 리더십 위기를 겪고 있었다. 추미애 의원을 위시한 소장파는 당 쇄신을 요구하며 지도부를 흔들어댔다. 이래저래 민주당으로서는 특단의 카드가 필요한 시점이었다.

이에 반해 한나라당은 사정이 느긋한 편이었다. 최병렬 대표가 리더십 위기를 겪고는 있었지만 한나라당은 새 대표를 뽑는 전당대회를 코앞에 두고 있었고, 현재의 1백47석만큼은 아닐지라도 여전히 충성도 높은 지지층을 기반으로 총선에서 1백20석 이상 석권할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한나라당은 결국 민주당이 주도한 위험한 도박에 스스로를 엮어넣었다. 이를 두고 정가에서는 한나라당과 민주당이 탄핵 이후 ‘그랜드 플랜’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이 아니냐는 분석을 제기하고 있다. 분권형 대통령제 또는 내각제 개헌을 포함해 권력 구도 자체를 차제에 재편하려는 의도가 이번 탄핵 의결에 숨겨져 있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이럴 경우 시나리오는 크게 세 가지로 나뉜다.
첫째, 가장 낮은 단계의 시나리오는 내각을 중립화하고 지지층을 결집함으로써 일단 총선에서 승리한다는 전략이다. 대중은 결국 권력이 기우는 쪽으로 움직이게 돼 있다는 자신들의 경험칙을 한나라당은 굳게 믿고 있다. 곧 탄핵을 통해 대통령을 무력화하면 공무원·경찰·검찰은 물론 재계까지도 힘 있는 쪽의 눈치를 보게 되리라고 이들은 생각한다. 이 과정에서 권력 이동이 이루어지고, 지지층 또한 재결집하는 효과가 발생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으면 거국중립내각 구성을 요구하면 된다. 이미 조순형 대표는 탄핵 직후인 3월15일 KBS가 노대통령에게 유리한 편파 방송을 하고 있다고 비난하며 “이런 식이라면 노대통령을 돕는 데 정부 전체가 동원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노대통령이 그토록 총애하는 강금실 법무부장관이 앞장서지 않겠나”라고 으름장을 놓았다. 이른바 친노(親盧) 장관 흔들기를 예고하는 대목이다.

두 번째, 중간 단계의 시나리오는 노대통령에게 하야를 요구하면서 이번 총선을 자연스럽게 대선 분위기로 끌고 간다는 것이다. 하야론은 탄핵 흐름을 강경하게 주도한 친(親) 최병렬계와 영남권 의원들 사이에서 특히 강하게 제기되고 있다.

대통령의 이른바 10분의 1 발언을 물고늘어지면 헌재 판결 전 하야가 불가능하지만도 않다는 것이 양당의 인식이다. 민주당의 한 정세분석가는 “대통령이 탄핵된 이상 검찰이 더 이상 편파 수사를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삼성 등 검찰이 수사하다 말고 덮어버린 기업들의 자금 흐름에 대한 조사를 재개하면 대통령과 관련된 훨씬 어마어마한 규모의 비리가 밝혀질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사생활 등 대통령의 도덕성에 치명타를 입힐 만한 파일 또한 이들의 추적 대상이다.

문제는 대통령을 하야시킨다 한들 야당이 차기 대권을 잡는다는 보장이 없다는 사실이다. 지금 같은 정당·인물 경쟁력을 갖고 야당이 권력을 잡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제기되는 가장 높은 수준의 시나리오가 바로 개헌론이다. 현재 조순형 대표는 ‘분권형 대통령제’, 홍사덕 총무는 ‘내각제’ 식으로 양당이 주장하는 개헌 형태가 약간 다르긴 하다. 그렇지만 ‘언젠가는’ 개헌이 필요하다는 데는 인식을 같이하고 있다.

평소 내각제가 지론인 자민련 김종필 총재 또한 여기서 빠질 수 없다. 따지자면 야 3당 사이에 개헌 합의가 있었기에 이번 탄핵 가결 자체가 가능했다는 시각도 있다. 탄핵을 앞두고 가진 3월10일 기자회견에서 최병렬 대표는 “탄핵안이 가결되고 헌재의 최종 결정이 나면 국민의 뜻을 모아 다음 대통령 선거를 할지, 개헌을 할지 등의 문제가 자연스럽게 결정 날 것이다”라고 말했다. 최대표의 한 측근에 따르면, 이 말은 자민련을 향해 던진 메시지나 다름없다. 탄핵안 가결에 필요한 의석 수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해 최대표가 던진 미끼를 자민련은 막판에 물었다.

야 3당은 현재 한결같이 “지금은 개헌 얘기를 할 때가 아니다”라고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탄핵에 따른 여론 악화가 심해지면 개헌론을 꺼내드는 상황이 조만간 발생할 수도 있다. 정당 지지도가 현 추세대로 추락하면, 이제 초조해지는 쪽은 민주당만이 아니다. 야 3당이 공동 운명체가 되어 남은 16대 기간 동안 살 길을 모색할 수밖에 없다. 단 개헌을 위해서는 국민투표를 치러야 하기 때문에 최소한 20일 이상의 유예 기간이 필요하다. 그래서 제기되는 것이 4·15 총선 연기론이다. 실제로 일부 야당 의원은 “탄핵 정국을 오도하는 편파 방송이 이뤄지는 상황에서 총선연기론은 설득력이 있다”(3월14일 홍준표 의원)라는 식으로, 총선 연기를 위한 여론 떠보기를 시작했다.
그러나 <시사저널>의 이번 여론조사를 보면, 야당은 총선 연기의 ‘연’자를 꺼내든 순간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국민적 저항에 직면할 가능성이 크다(기사 상단 도표 참조). 말 그대로 제2의 6·10 항쟁을 각오해야 할 상황이다. 하야론·개헌론 또한 일반 여론은 ‘있을 수 없는 일’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현재의 야당 또한 이같은 위험성을 잘 알고 있다. 이에 야3당은 일단 △‘고 건 띄우기’를 통해 대통령이 없어도, 아니 없으니까 오히려 국정이 더 잘 수행된다는 점을 집중 부각함으로써 노대통령을 잊힌 인물로 만들고 △친노 대 반노 구도를 부각함으로써 지지층을 결집하며 △야 3당이 공조해 각각 호남·충청·영남 지역 기반을 공고히 하는 한편 수도권에서 3당 후보가 연합해 열린우리당 후보에 대항하는 구도를 형성해 간다는 전술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야당의 의도대로 될지는 의문이다. <시사저널> 여론조사는 이번 총선이 단순히 친노 대 반노 구도로 치러지지는 않을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고 건 대행을 띄운다고 민심이 돌아설 것 같지도 않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야당이 여론을 잘못 읽었다고 잘라말했다. “탄핵 반대 여론이 높은 것은 불안 때문이 아니라 분노 때문이다. 대통령이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아도 국민의 선택은 존중돼야 한다는 것, 그 기본적인 상식을 야당은 간과했다.”

김수진 교수(이화여대·정치학) 또한 이렇게 말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정치학자들은 이번 총선이 인물 대결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그렇지만 탄핵 결의로 이번 총선의 최대 화두는 ‘민주주의를 지키느냐 마느냐’가 되어 버렸다.” 실제로 지난 10년간 정치적 중립을 지켜온 시민·사회 단체는 이번 탄핵 사태를 ‘헌정 사상 세 번째 쿠데타’라고 규정하며 거리로 나섰다. ‘탄핵 무효/민주 수호’. 이것이 이들이 내세운 구호이다.

탄핵안이 가결되던 날 열린우리당 정동영 의장은 “오늘, 역사의 시계가 거꾸로 되돌아갔다”라고 선언했다. 군부 정권이 종식되고 야당이 이미 두 번째 집권에 성공한 나라에서 ‘민주 수호’라는 고색창연한 구호가 되살아난 것은 분명 아이러니컬한 일이라 할 만하다. 정치학자들은 이것이 과거가 확고히 청산되지 않은 채 이루어진 한국 민주화 과정의 불완전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분석한다.

이같은 불완전성을 극복하느냐 마느냐가 이번 총선에 달려 있다. 한국사회여론연구소는 이번 탄핵 사태로 인해 한국 사회 지배 세력에 대대적인 개편이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이들이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이번 총선이 노대통령과 열린우리당의 승리로 끝난다면 광복 이후 우리 사회 지배층을 형성해 왔던 이른바 메인 스트림이 전면 교체된다. 반면 총선이 야 3당의 승리로 끝나 개헌이 이루어진다면 일본 자민당처럼 보수·우익 세력이 반영구적 집권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맞은 갑신년. 개화와 봉건이 충돌했던 1백20년 전에 이어 한국 사회는 다시 한번 나라의 명운을 건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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