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민심/“야당은 스스로 무덤을 팠다”
  • 소종섭 기자 (kumkang@sisapress.com)
  • 승인 2004.03.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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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민심/“무당층 10% 여당으로 돌아섰다”
거리는 평온했고 시민들은 말을 아꼈다. 부산역 지하상가에서 만난 한 상인은 국회가 노무현 대통령을 탄핵한 것에 대한 의견을 듣고 싶다고 하자 “먹고 살기도 힘든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인근에서 구두를 닦던 40대 남자는 “할 말이 없다”라며 입을 닫았다.

‘말’을 하는 사람들은 주장이 뚜렷했다. 3월14일 아침 자갈치시장으로 가는 길에 만난 50대 택시 기사는 “노대통령을 완전히 탄핵했으면 좋겠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치에 관심이 없다는 그는 “여야 의원들이 다 개새끼들이고 사기꾼이다”라며 서슴없이 욕을 내뱉었다. 그는 “도둑질해서 먹고 살아야 할 형편이다. 일단 먹고는 살아야 잘잘못을 따질 것 아니냐. 30년 동안 택시를 몰았지만 이렇게 어려운 것은 처음이다. 나도 LPG통 갖고 국회에 가서 터뜨리고 싶은 심정이다”라며 자신의 말을 꼭 보도해 달라고 신신당부했다.
반면 3월14일 오후 ‘부산의 여의도 공원’인 해운대 벡스코 광장에서 만난 30대 회사원은 “야당이 노대통령을 탄핵한 것은 한마디로 집단 이기주의이다. 화가 난다. 이번 총선에서 반드시 열린우리당 후보를 찍겠다”라고 말했다. 그는 “헌재가 탄핵 문제를 빨리 처리해야 하지만, 재판관들 성향을 보니 정말로 탄핵안이 통과되는 것 아닌가 걱정된다”라고 말했다.

말은 갈렸지만 부산 민심은 마그마처럼 밑바닥에서 크게 용트림하고 있었다. 민심의 변화를 가장 빠르게 체감하는 쪽은 역시 정치권이었다. 열린우리당 부산시지부 홍재균 홍보팀장은 “뒤집혔다”라며 들떠 있었다. 평소 하루 10여 명에 불과하던 입당 희망자가 요즘에는 7백∼8백 명, 많게는 1천여 명까지 크게 늘고 있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입당하겠다는 것이 아니라 당비와 후원금을 낼 테니 방법을 알려달라는 적극적인 사람들이 많다고 말했다. 반면 한나라당 부산시지부는 밀려드는 항의 전화에 곤욕을 치르고 있다.

부산 지역 국회의원들은 최근 공천에서 탈락한 데 불만을 품고 탈당한 박종웅 의원을 빼면 전부 한나라당 소속이다. 그러나 탄핵 정국을 계기로 부산은 겉으로는 ‘한나라당 텃밭’에서 ‘노대통령의 정치적인 고향’이라는 쪽으로 일단 무게추가 기울었다. 서면 쥬디스태화 앞에서 열린 탄핵 반대 집회가 그 현장이다.

3월13일에는 만명이 넘는 시민이, 일요일인 3월14일에는 5천명이 넘는 시민이 손에 손을 잡고 모여들었다. 정윤재 열린우리당 사상구 후보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 열기가 우리의 예상을 뛰어넘고 있다”라며 고무된 표정이었다. 3월13일 집회에 참석한 20대 회사원은 “지난 대선 때로 돌아간 느낌이다. 화가 나 집회에 참가했다”라고 말했다.

부산 최대 여론조사 기관인 다산리서치 강태문 사장도 탄핵 직후 열린우리당이 무서운 상승세를 탔다고 진단했다. 강사장은 “한나라당이 타격을 받고 흔들거리며 20% 남짓한 핵심 지지층을 제외한 10%가 무당층으로 빠졌다. 또 무당층 10%가 열린우리당으로 돌아섰다”라고 분석했다. 강사장은 부산 지역 특성상 한나라당 지지자가 바로 열린우리당 지지로 옮겨가지는 않기 때문에 앞으로 무당층을 잡기 위한 한나라당과 열린우리당의 샅바 싸움이 치열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다.

한나라당 부산시지부 전종민 정책부장은 “노대통령에게 말려들었다. 이대로는 안된다. 착잡하다”라고 위기감을 표현했다. 전부장은 “총선이 아니라 대선 구도가 되었다. 인물이나 정책 대결이 중요한 판단 기준이 되는, 총선 구도로 돌릴 방법을 찾아야 한다. 국회마저 노대통령이 장악하면 견제 장치가 없다는 것을 시민들에게 얼마나 설득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될 것 같다”라고 말했다. 한나라당 부산시지부는 3월13일 각 지구당에 ‘무거운 책임감으로 국민과 함께 나라를 지키겠습니다’라는 플래카드를 내걸라는 공문을 내려보냈다.

그렇지 않아도 약세였던 민주당은 더욱 위축되었다. <시사저널> 여론조사 결과 부산·경남·울산 지역의 민주당 지지도는 불과 1.1%였다. 그러나 정오규 민주당 시지부장은 “열린우리당측이 이미지 정치에 능하지만, 지난 대선 때 한번 속은 경험이 있는 국민이 이번에는 속지 않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이승재 민주당 영도지구당위원장은 지구당사에 탄핵을 반대한다는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이 상승세를 굳힐 수 있을지에 대해서는 전문가는 물론 열린우리당 관계자들도 자신하지 못하고 있다. 다산리서치 강사장은 “열린우리당이 잘해서 지지도가 올라간 것이 아니다. 3당 합당 이후 부산 지역을 주름잡아온 주류 세력은 여전히 한나라당을 지지하고 있다”라고 분석했다. 열린우리당이 이 벽을 넘지 못하면 지역구에서 약진하기는 어렵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이 탄핵 반대 집회의 주도권을 부산 지역 1백12개 시민·사회 단체로 구성된 ‘국회 쿠데타 분쇄를 위한 국민 비상 시국회의’로 넘기고 ‘주민 속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한 것도 이 때문이다. 이정호 열린우리당 부산시지부 사무처장은 “1주일이 고비다. 한나라당이 혼돈에 빠진 것을 틈타 앞으로 민생 투어를 하며 공약을 발표하는 등 지역구에서 정책 정당 이미지를 심기 위해 주력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열린우리당은 부산 전체의 선거 구도를 민주 대 반민주, 개혁 대 부패로 짜고 있다. 3월14일 오후 4시 해운대 벡스코 3층에서 열린우리당 주최로 열린 탄핵 규탄 대회는 마치 1980년대의 군사정권 성토 집회를 연상케 했다.

열린우리당 후보들은 “쿠데타 세력을 분쇄하는 데 분골쇄신하겠다”(박재율 부산진 을) “그들이 쿠데타를 한다면 4·15 혁명을 하겠다”(김용철 부산 남갑)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철(북 강서 갑)·노혜경(연제) 후보는 ‘군홧발이 의사봉으로 바뀌었으나, 쿠데타 세력의 본질이 바뀌지 않았음을 똑똑히 보았다’는 내용의 결의문을 낭독했다.

한나라당은 열린우리당과 달리 후보들이 각개 약진하고 있다. 하지만 권철현·김무성 의원이 사사건건 충돌하는 등 조직적인 단결력은 현저히 약해졌다. 선거전이 본격화하면 평소 “부산·경남은 내가 책임진다”라고 말해온 최병렬 대표가 자주 부산에 모습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그러나 최대표의 흡인력은 이회창씨에 비해서도 약하다는 것이 지역 정가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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