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혹에 약한 지방 행정의 꽃
  • 張榮熙·金恩男·丁喜相 기자 ()
  • 승인 1998.11.05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풍부한 실무 경험으로 지방 행정의 중추 역할 박봉 등 악조건 속 부패에 쉽게 노출
유산을 물려받은 것도 아닌데 6급 공무원이 2백억원대 재산가라는 사실은 ‘하위직 공무원=박봉’이라는 등식에 익숙한 국민들을 혼란스럽게 했다. 역시 비결은 뇌물 축재였다.

전 서울시 행정주사(6급) 이재오씨(62)는 84년부터 96년 정년 퇴직할 때까지 12년간 재개발과에 근무하면서 재개발 사업 총 93건에 간여해 돈을 갈퀴로 긁어모으다시피 했다. 그 돈을 경북 김천군의 땅 등에 투기한 결과 20여 년 사이에 재산을 자그마치 8백년치 월급(퇴직 직전 1백98만원)과 맞먹는 2백억원대로 불렸다. 이씨가 주무른 뇌물 액수가 컸다는 것은 이번에 검찰에 걸려든 (주)거삼 회장 최수현씨로부터 93년에 2억1천5백만원을 받은 사실에서 미루어 짐작된다.

이씨의 별명은 ‘이대감’. 그는 담당 구역이었던 서울 광화문 일대 재개발 업자 사이에서는 ‘이대감을 통하면 안되는 일이 없다’는 말이 나돌 정도로 재개발 업무에 절대적인 힘을 행사했다. 61년 경기도 파주 금촌우체국에서 교환원(기능직)으로 공직을 시작한 그가 서울시에서 물 좋은 자리를 줄곧 지키면서 이런 ‘명성’을 쌓은 비결은 물론 뇌물을 혼자 먹지 않고 고위층에 상납했기 때문이다. 상납을 받은 고위층들은 그의 뒤를 봐주는 튼튼한 보호막이 되었다.

‘서울시=복마전’이라는 풍문을 재확인시켜 준 이씨 사건은 최근 중·하위직 공무원, 특히 지방자치단체 하급 공무원들을 공포로 몰아넣고 있다. 김대중 대통령이 10월 초 내각에 강도 높은 중·하위직 공무원 사정을 지시했기 때문이다. 아랫물을 겨냥한 대통령의 사정 의지에 대해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사정 기관에서 중·하위직 공직자의 부패가 심각함을 알리는 보고서가 수 차례 올라왔으며, 관련 제도는 훌륭한데 일선 공무원들의 ‘딴죽’ 때문에 외국인 투자가 지지 부진하다는 보고가 있었던 참에 이씨 사건이 터졌다”라고 말했다. 이씨 사건이 중·하위직 사정의 기폭제가 된 셈이다.

현재 감사원, 검·경, 총리실 국무조정실, 각 부처 감사관실 등 국가의 모든 감사·수사 기관이 중·하위직 비리 공직자 색출 작업에 나서고 있다. 시·군·구청의 중·하위직 공무원들이 잇달아 수사망에 걸려들고 있는 것은 사정 활동을 강화한 결과일 것이다.

요즘 6급 공무원 사이에서는 ‘밖에 나가 6급이라고 말하고 다니지 말라’는 우스갯소리가 돌고 있다. 이 말에는 이씨 사건이 국민들에게 ‘6급=비리 온상’이라는 인식을 심어 주어 돌팔매질을 당할 것 같다는 위기 의식이 담겨 있다. 요즘 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는 김정길 행정자치부 장관이 쓴 〈공무원은 상전이 아니다〉이라는 책에서 묘사된 6급 공무원도 영락없는 비위 공직자의 전형이다. ‘오전에는 신문 보고 오후에는 계원들에게 잔소리나 일삼고 은행에 심부름 보내고, 하루 종일 하는 일이라고는 도장 찍는 일밖에 없는 사람들’인 것이다. “6급이 OK하면 결재 안되는 기안 없다”

이래저래 사람들의 혀끝에는 6급 공무원이 오르내리고 있다. 과연 6급 공무원은 어떤 사람들인가. 공직 사회에서 차지하는 그들의 영향력이 어느 정도이기에 이씨같이 전횡을 저지르는 공무원이 나올 수 있는가도 궁금해진다.

6급은 ‘주사’라는 공무원 이름을 갖고 있다. 정무직인 장·차관을 뺀다고 해도 1급(관리관)∼9급(서기보)이라는 일반·별정직 공무원 직급의 긴 사닥다리에서 밑에서 세는 것이 빠른 자리다. 그러나 공직 사회에서 6급이 하는 일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중앙 부처, 특히 경제 부처에서는 주로 5급 사무관이 기안을 하기 때문에 6급 주사는 5급을 보좌하는 데 머무른다. 하지만 지방자치단체에서 6급은 이른바 ‘끗발’이 세다. 6급은 시(광역시 제외)·군·구의 계장 자리를 맡는다. 5급(과장) 이상 공무원처럼 전결권은 없지만 상급자들이 6급의 도움 없이 정책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기는 사실상 어렵다.

왜 그럴까. 우선 6급은 지방 행정의 실무자로서 정점에 서 있다. 6급 공무원들은 풍부한 행정 경험을 갖고 있는 ‘지방 행정의 꽃’이다. 9급 공채로 공무원 생활을 시작했다면 적어도 20년 이상, 7급으로 들어갔다고 해도 10년은 지나야 6급 공무원이 될 수 있다. 행정 고시를 패스해 임용된 지 얼마 안된 5급 과장이라면 6급의 말에 더더욱 귀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서울 중구청의 한 8급(서기) 공무원은 “초임 시절 기안을 하면 번번이 과장으로부터 되돌림을 당했다. 계장에게 보여주자 몇몇 문구만 수정했는데도 통과가 되었다. 계장은 계원이 일을 진행하다 막혔을 때 뚫어 주는 역할을 한다”라고 말한다.

강서구청의 한 7급 주사보는 6급 공무원의 유용성을 관내에서 발이 넓다는 점에서도 찾았다. 공직 사회에서 민원인을 상대하는 것보다 더 어려운 일이 다른 과 공무원으로부터 업무 협조를 받아내는 일인데, 여러 과를 두루 거친 고참 계장은 전화 한 통화로 부서간 현안을 해결한다는 것이다. ‘안면 행정’의 해결사인 셈이다.

또 고시 출신인 한 30대 구청 과장(5급)은 6급이 민원인을 상대하기에 적합한 연륜이라는 점을 꼽았다. 한번은 관내 공장이 내뿜는 악취에 견디다 못한 인근 1천6백 세대 아파트 주민들이 구청에 몰려와 항의 소동을 벌였는데 설득에 나선 자신을 거들떠보지도 않던 구민들이 머리가 희끗희끗한 계장이 나서자 곧 잠잠해졌다는 것이다.

이처럼 6급 공무원은 지방 행정에서 없어서는 안될 등뼈 구실을 하고 있다. 역사적으로도 70년대에 동사무소 서기보(9급)로 출발해 새벽부터 밤까지 뼈빠지게 일하며 새마을 운동을 주도했던 공직자들이 6급 공무원이다. 하지만 최근의 6급 공무원 현주소는 ‘흔들리는 6급’이라는 표현이 실감날 정도다. 단적으로 이제 이들은 더 이상 ‘계장님’이 아니다. 지난 9월 지방자치단체 대부분이 ‘계(係)제 폐지, 팀제 전환’을 골자로 하는 직제 개편을 단행했기 때문이다. 송파구청 광고물 관리 담당 공길수 주사(48)는 계장의 명패가 사라졌을 뿐 아니라 구조 조정 과정에서 6급 공무원이 가장 많은 ‘희생자’가 된 점도 6급의 기반이 무너지고 있는 징표로 꼽았다.

6급 공무원 가운데는 자기네가 비리 공무원의 수괴로 지목되는 점에 분개하는 사람이 많다. 송파구청의 한 주사는 “일부 부패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도 나라를 망치고 부패로 얼룩지게 한 주범은 정치인과 재벌이다”라며 자신들을 때려잡기 전에 이들을 단죄하라고 항변했다. 그러나 이 6급 공무원의 ‘이유 있는 항변’ 한켠에서 일부 하급 공무원들의 부패가 극에 달해 있는 것도 틀림없는 사실이다. 이재오씨 사건에 견주면 새발의 피지만, 지난 5월 서울지검에 걸려든 강남경찰서 방범과 박종백 경사(50) 사건이 대표적이다. 박경사는 관내 유흥업소 세 곳의 접대부 고용·시간외 영업 같은 불법 행위를 눈감아주고 96년 3월부터 올 1월까지 1억3백만원을 받아 챙겼다. 그는 매월 5백만~천만 원을 정기적으로 ‘수금’했다. 이 돈으로 개포동의 59평형 아파트 등 아파트 2채를 사들이고 고급 승용차 2대를 굴리며 심지어 첩까지 두고 방탕하게 살아온 것으로 드러났다. 이쯤되면 생계형 차원을 넘은 축재형 부패다.

하급 공무원 비리는 주로 이들이 민원인과 직접 상대하는 일선 공무원이기 때문에 일어난다. 우선 건축·위생 같은 인허가 관련 부서의 경우 민원인에게 허가를 빨리 내주거나 특혜를 주면서 금품 수수가 이루어진다. 위생·소방·교육 등 관련 법규 위반이 자주 일어나는 분야에서 관행처럼 오가는 뇌물 수수도 심각하다. 박경사 사건이 대표적이지만, 얼마 전에도 강남 지역 유흥업소와 구청 위생과 공무원·경찰관 사이의 ‘검은 공생’ 관계가 드러나 파문이 일기도 했다. 세무도 대표적인 비리 분야. 세금과 과징금을 줄여 주는 방식으로 대가를 요구하는 세무 공무원이 적지 않다.

6급 공무원 90%, 월급 1백30만~2백만원

하급 공무원들은 왜 비리 유혹에 취약한가. 첫째 요인은 박봉이다. 공직 생활 10∼20년을 보내고 난 후 처음 6급이 되었을 때(1호봉) 받는 월평균 보수는 1백16만6천원이다. 기본급 53만4천원에 수당과 체력단련비·상여금 등 받는 돈을 모두 합친 액수이다. 15호봉 6급 공무원은 1백97만7천원(기본급 93만8천원)을 받는다. 7만3천여 6급 공무원을 호봉 별로 가지런히 세웠을 때 한가운데 위치한 호봉인 21호봉을 받는 6급 공무원의 월평균 보수는 2백21만원(기본급 1백5만6천원)이다. 가장 많이 받는 6급 32호봉 공무원도 2백46만원(1백19만6천원)을 받는다.

봉급표에는 최고 2백50만원 가까이 받게 되어 있지만, 6급 공무원의 90%는 1백30만∼2백만 원대에 몰려 있다. 한 고시 출신 과장은 “대학을 갓 졸업한 내 월급과 9급부터 출발해 30년 가까이 근무한 50대 계장 월급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고 뭔가 크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했다”라고 말했다. 인사 적체도 심하다. 지자제 시행 이후 사실상 5급 승진 시험이 없어진 후부터는 더욱 심해졌다. 9급이나 7급으로 들어온 공무원들은 대부분 6급, 잘해야 4∼5급으로 정년을 맞는다. 박봉에다 미래에 대한 희망이 없다시피 한 하급 공무원들은 그래서 검은손의 유혹에 쉽게 빠진다. 하급 공무원 사회에서는 월급으로 궁핍하게 사는 공무원은 ‘게으르거나 고지식하다’는 말을 들을 정도다. 하급 공무원들은 민원인이 조금씩 집어주는 돈에 맛들이다가 노골적으로 뇌물을 요구하는 수준으로 치닫게 된다. 더 큰 문제는 상납 구조이다. 설사 자신은 청렴하게 살고 싶어도 부패로 커온 상급자들이 아랫 사람에게 돈봉투를 요구한다. 이런 요인들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하급 공직자 사회를 구조적 부패로 몰아가는 것이다.

특히 6급 공무원들이 비리의 온상으로 지목되는 것은, 이들이 업무에서 등뼈 구실을 하는 것과 맞물려 만성적인 부패 구조를 유지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 관내 터주 대감들이 문제다. 이재오 사건에서 잘 드러나듯이 업무에 빠꼼이인 이들은 어떻게 하면 돈을 벌 수 있는지 고도의 노하우를 터득하고 있다. 이들은 벌어들인 돈으로 사치스러운 생활을 하며 일부를 위에 상납한다. 물 좋은 자리에 계속 근무해야 뇌물이 생길‘밑천’을 유지할 수 있을 뿐더러, 혹여 감사 기관 등에서 비리 혐의를 받아도 보호막을 기대할 수 있다. 이렇게 구조적인 먹이 사슬을 구축하는 일부 6급 공무원들은 부하 직원들을 부패로 인도하기도 한다. 이처럼 6급 공무원은 위와 아래 모두를 부패에 물들게 하는 구조의 한복판에 자리한다는 것이다.

관내 부조리를 없애려고 칼을 들었다가 ‘또라이’로 찍혀 결국 퇴출된 전 인천 북구청장 이용기씨는 “공직 사회가 구조적 부패의 늪에 빠져 있다. 특히 터주 대감으로 행세하며 물을 흐려놓는 6∼7급 공무원들을 과감히 솎아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터주 대감들은 뇌물과 온갖 행정 편의로 상관들과 관내 힘깨나 쓰는 유력 인사를 포섭해 이 비호 세력들이 외풍을 막아 주도록 방어벽을 구축한다. 개혁 의지를 가진 기관장이 취임해 자신의 비리를 문제 삼을라 치면 비호 세력을 조직적으로 동원해 도리어 기관장을 무력화하거나 퇴출시킨다. 일단 터주 대감의 힘이 확인되면 이 공무원 앞에 충성을 맹세하는 공무원이 줄을 서게 된다. 그러지 않으면 당장 인사에서 불이익을 받기 때문이다. 이렇게 터주 대감의 부패는 그에게서 그치지 않고 기회주의적이고 부패한 공무원만 살아 남게 만들어 전체 공직 사회의 복무 기강을 여지없이 무너뜨린다.

송파구청 김성순 구청장도 터주 대감들이 요시찰 대상이라고 말했다. 김구청장은 “공무원들의 부패는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지방자치제 시행 이후 권한이 강화된 하급 공무원들의 부패가 부쩍 심해졌다”라며, 외국에서도 지자제 초기에 이런 현상이 나타났다고 지적했다.

공무원 부패는 비리 공무원들을 잡아내는 사정만으로는 척결되지 않는다. 최근 민·관 합동 부패 근절 기구인 부패방지대책협의회의 박기종 국장(국무조정실 조사심의관)은 “무엇보다 부패가 싹트지 않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 비현실적인 규제를 철폐하는 등 사후 통제(적발)보다 사전 예방에 주력한 종합적인 부패 방지책을 만들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부패 연구가인 박재완 교수(성균관대·행정학)는 ‘국가 정책을 결정하고 수행하는 공무원의 부패는 민간 기업의 부패보다 더 심각한 문제를 낳는다’고 지적했다. 우선 자원 배분을 왜곡해 경제에 악역향을 미친다. 시장 기능도 무력화한다. 무엇보다 사회의 정상적인 기능과 윤리 의식을 실종시킨다는 것이다. 박교수는 또 ‘한국형’ 부패에 주목한다. 의리와 정을 중시해 공과 사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문화가 부패 불감증을 부른다.

공무원 부패는 뇌물을 받는 공무원의 문제인 동시에 뇌물을 주는 국민의 문제이기도 하다. 국민들에게도 부패한 6급 공무원을 만들어내는 데 절반의 책임이 있는 것이다.

실무 행정의 등뼈인 6급 공무원. 이들의 부패를 척결하지 않는 한 공직 사회는 건강해질 수 없다. 공직 사회에 건강한 척추가 필요하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