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자의 결자해지, 재벌 해체 불당기나
  • 장영희기자 (mtview@sisapress.com)
  • 승인 2000.06.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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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오너 3부자 퇴진, 재계에 충격파
정부 압박설 등 배경 분석 구구

흥분의 불길은 즉각 현대 인터넷 사이트(www.hyundai.co.kr)로도 옮겨붙었다. ‘현사모’‘지나가는 시민’‘왕회장 사랑’‘치과 의사’‘현대짱’‘현대만세’같은 아이디를 가진 네티즌들로부터 정명예회장은 큰 결단, 정말로 위대한 거인, 멋있고 섹시한 왕회장, 이 시대 최고의 경영자라는 칭송을 받았다. ‘민찬기’라는 네티즌은 ‘가야 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낙화>의 시구를 인용하며 왕회장의 용단이 경제뿐 아니라 이기주의와 무절제한 욕망이 넘치는 한국 사회에 새로운 화두를 던질 것이라는 최상급의 의미를 부여했다. 현대의 협력 업체로 보이는 대정진기공 임직원들이 1억원의 작은 뜻을 모았다며 협력사의 동참을 기대한 글과 ‘삼성은 현대에게 배워라’(선경맨)라는 글도 눈길을 끌었다. 이 날 게시판에 오른 대부분의 글은 분명 5월31일 오전까지의 네티즌 반응과는 크게 달랐다. ‘현대 힘내라’는 따위의 글도 간혹 있었지만, 그저 욕만 하고 싶다느니, 심지어 현대는 망한다, 저주한다는 험악한 글들이 게시판에 넘쳐났던 것이다.

정주영 명예회장. 그는 한국 재벌의 전근대적 오너 중심 경영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그런 그가 오너 체제를 해체하겠다는 결자해지 선언으로 재계를 폭풍 속으로 밀어넣었다. 정명예회장은 국제통화기금 사태 직후인 1997년 말 현정권이 재벌 개혁을 독려하자 측근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우리더러 미국식으로 하라는 거구먼.” 자신과 현대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는 생각을 일찍부터 하고 있었다는 추론이 가능한 대목이다. 현재 한 아들이 반발하고 있기는 하지만, 그의 퇴진 선언이 전문 경영인 체제를 앞당기리라는 기대감을 높여주는 것은 틀림없다.

현대 오너가 퇴진했다는 소식이 알려진 직후 삼성·LG·SK 등 다른 재벌들은 충격에 휩싸였다. 이들은 먼저 현정권이 현대 오너들을 압박했을 것이라는 의혹을 드러냈다. 그러지 않고서야 스스로 경영권을 내놓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물론 정부가 주채권 은행을 통해 현대에 5개 요구 조건 가운데 맨 앞머리에 후계 구도를 명확히 하고 지배 구조를 선진화하라고 압박을 가한 것은 확인되는 사실이다. 한 재계 정보 관계자에 따르면, 지난 3월 이른바 ‘왕자의 난’이 일어나자 현정권 핵심부에서는 현대를 반드시 ‘손보아야 한다’는 강경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하지만 5월29일까지도 현대에서 속된 말로 ‘배째라’는 식의 기류가 일자 정부와 정치권은 분리 전략으로 급선회했다. 현대를 지나치게 압박하면 정말로 경제 위기가 올 수 있다고 걱정한 것이다. 따라서 정부가 적어도 몽구·몽헌 회장의 퇴진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런데도 현대가 이런 초강수 선택을 한 것과 관련해 흥미로운 분석이 나온다. 6월 말이나 7월 초 공개될 연결재무제표에 부채 비율이 400%에 육박하는 등 재무 구조가 알려진 것과 달리 훨씬 나빠 완전 투항하지 않으면 불길을 잡을 수 없다고 판단했다는 것이다.

퇴진 배경 못지 않게 현대 오너들의 진의를 수상쩍어 하는 기류도 감지된다. 우선 전문 경영인을 내세우더라도 현대 오너들이 대주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해 사실상 그룹을 지배할 것이라는 의구심을 내비치는 이가 적지 않다. 한진그룹 오너들이 잇단 사고로 퇴진하기는 했지만 배후에서 조종하는 사례를 많이 보아온 탓이다. 이에 대해 이기호 경제수석은 “(현대의 경우) 시장 불신이 워낙 엄청나기 때문에 그렇게 하더라도 단기에 그칠 것이다”라고 내다보았다.

뭔가 노림수가 있다는 의혹도 제기된다. 현대가 일단 3부자 동반 퇴진이라는 초강수 정면 돌파 전략을 구사해 위기 상황을 타개한 후 후일을 도모하려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현대 오너들이 설사 이런 장기 포석을 깔고 있다 하더라도 이를 현실화하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이 지배적이다. 시장(市場)과 정면 대결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학계 일각에서 거함 현대를 거꾸러뜨린 것은 정부가 아니라 시장이었고, 동반 퇴진을 시장에 대한 무조건적인 항복 선언이라고 해석하는 것도 이런 연유에서다. 만약 현대가 거짓말을 한 것이 드러나면 현대는 즉각 주가 폭락, 여신 회수 같은 시장의 심판에 직면할 것이다. 따라서 현대 오너들이 이런 위험천만한 상황이 오리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는 점에서 이번 퇴진 결정을 순수하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의견도 적지 않다. 이제는 현대 오너들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길을 열어 주어 이들이 살아있는 전설로 존경받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유장희 이화여대 교수).
현대 오너들의 진의는 머지 않아 판명 날 것이다. 현대가 내놓을 여러 후속 조처가 관찰 포인트. 최근 현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지난해 10월 건설·자동차·전자·중공업·금융 및 서비스 등 5개 소그룹 체제로 갈 것이라고 천명한 바 있다. 앞으로 각 소그룹은 전문 경영인 좌장 체제로 운영할 계획이다”라고 밝혔다. 소그룹 좌장과 주요 계열사 사장 자리에 누가 앉을지 벌써부터 관심이 뜨거운 것은 오너 체제가 무너진 실질적 의미를 여기서 기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너에 대한 충성심만 가득한 이른바 ‘무늬만 전문 경영인’이 다시 득세한다면 오너가 퇴진한 의미가 크게 훼손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찍은’ 4인방이 전문 경영인 대열에서 배제될지도 관심거리다. 참여연대는 이익치 현대증권 회장·이창식 현대투신증권 사장·김윤규 현대건설 사장·김재수 구조조정위원장을 현대그룹 부실에 책임이 있는 전문 경영인들이라고 지목했다. 이들이 탈락한다면 MK(몽구 회장) 진영이야 쌍수를 들고 환영하겠지만, 이들 상당수가 명예회장으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받는 핵심 MH(몽헌 회장) 인사들이라는 점에서 재임용 쪽에 무게를 싣는 견해가 우세하다. 재정경제부의 한 국장은 “일단 가신 그룹을 배제하고 대내외에서 능력 있는 전문 경영인을 엄선해 핵심 계열사에 배치한다면 현대는 신뢰를 얻을 것이다”라며 말했다.후속 조처가 진의 판가름할 주요 요소

그러나 적절한 전문 경영인을 뽑았다고 해서 ‘전문 경영인만 있는 ’현대의 미래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다. 도리어 은밀해질 수 있는 오너의 개입을 막기 위해서는 그룹의 선단 구조를 더 효율적이고 독립적인 전문화 체제로 바꾸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그룹 내의 원만한 교통 정리와 지분 정리를 통해 전문 경영인들이 책임지고 경영할 환경을 마련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참여연대가 현대 오너들이 1∼2개 계열사로 지분을 정리하지 않고는 독립 경영이 이루어지기 어렵다면서, 지분 소유 구조가 더 단순해져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도 나름으로 설득력을 가진다. 현대에서 전문 경영인 체제가 실질적으로 자리잡으려면 갈길이 먼 것이다.

더더구나 ‘다른 재벌에게로 이런 기운이 퍼져 나갈 것을 바란다’는 정부의 기대는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을 것으로 보인다. 삼성·LG·SK 같은 재벌들이 자신들에게 어떤 불똥이 튈지에 촉각이 곤두서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일단 이들은 ‘현대와 우리는 다르다’는 차별화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이른바 족벌 경영이라는 측면에서 현대와 하등 다를 바 없어 보이지만, 3부자가 오너이기 때문이 아니라 재무구조 부실과 투명하지 못한 경영에 책임을 지고 물러났다고 이들은 주장한다.

그러나 현대처럼 위기에 빠질 가능성이 희박하면서도, 이들이 정부나 시민단체에 책잡힐 빌미를 주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특히 현정권 핵심부에서는 삼성의 경영권 승계를 좌시할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점차 고조되고 있다고 한 재계 관계자는 전했다. 그는 현정권이 삼성자동차 처리와 관련해 이건희 회장이 내놓은 삼성생명 주식 4백만 주를 주당 70만원으로 계산한 금액인 2조8천억원을 반드시 맞추라고 강력히 요구할 것으로 내다보았다(현재 몇몇 증권사가 추정한 삼성생명 적정 주가는 20만∼30만원선). 삼성생명 상장 과정과 주식 변동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이재용씨에게로 경영권이 되물림되는 상황을 차단하려 한다는 것이다. 삼성은 참여연대가 제기한 6월23일 삼성전자 전환사채 발행 무효 소송 2심 판결에 대해서도 내심 신경을 쓰는 눈치다. 물론 설사 삼성이 패소한다 해도 발행 자체가 무효화하고 세금 문제가 발생할 뿐이지만, 가뜩이나 여론이 심상치 않은 터라 설상가상 격이 될 수밖에 없다고 보는 것이다.

LG는 4월 초 LG화학이 LG유통과 LG칼텍스의 대주주 지분을 대거 사들여 4월 중순부터 주식 시장에서 ‘왕따’를 당했다. 그러나 그 전에도 이와 비슷한 거래를 계속해온 것이 최대 아킬레스건. 최근 구본무 LG전자 회장과 허창수 LG전선 회장 등 LG전자 대주주들이 2월부터 LG전자 주식을 2천억원어치나 대량 매집한 사실이 드러나 최근 증권거래소가 조사에 들어갔다. 이들은 LG정보통신과 합병을 추진하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는 위치에 있어 내부자 거래 의혹을 받고 있다. 물론 LG측은 복잡한 출자 구조를 주력사인 LG전자와 LG화학을 중심으로 단순화하는 과정에서 대주주들도 책임 경영 차원에서 지분율을 종전 5.5%에서 12.6%로 높이게 된 것이라고 해명했다. 그러나 시장은 LG를 요주의 재벌로 지목하고 있다. 재계의 한 관계자는 상장 예정인 LG텔레콤에 대해서도 이런 거래가 일어날 공산이 크다고 전했다. LG는 구씨와 허씨 간에 대강의 울타리는 쳐진 상태이지만 아직 지분 관계가 복잡하게 얽혀 있다. 이 과정에서 기업 이익이 아닌 대주주 이익을 앞세운 전횡이 일어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SK 역시 선대 회장들인 최종건·최종현 회장의 자식들 사이에 지분이나 계열사 정리가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다. ‘사실상의’ 지주회사가 올 7월 SK상사에서 (주)SK로 바뀔 것이냐가 앞으로 관전 포인트. SK는 자산이 상대적으로 적은 SK상사가 지주회사로 있으면 경영권 방어에 문제가 많다고 보고 지분 구조를 변화시키려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나 재계에서는 지주회사를 최종건 회장 아들 몫으로 알려진 SK상사에서 최태원 회장이 맡고 있는 (주)SK로 바꾸는 것은, 후계 구도와 관련이 깊은 것으로 보고 있다. 삼성이나 LG에 비해 SK는 한시적이겠지만, 전문경영인인 손길승 회장이 그룹을 대표하며 주력사인 SK텔레콤을 경영하고 있어 부담이 덜하다는 관측도 있다.“오너냐 비오너냐보다 투명성이 중요”

물론 재벌 관계자들은 오너냐 오너가 아니냐는 것이 중요한 문제는 아니라고 주장한다. 오너라고 해서 경영을 하지 말라는 법은 없다는 데에는 학계에서도 동의하는 이가 많다. 중요한 것은 기업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고 주주의 이익과 기업 가치를 극대화할 시스템을 어떻게 구축할 수 있느냐로 귀착된다(한국개발연구원 이영기 선임연구위원). 경제 전문가들은 이 과정에서 소유와 경영의 분리가 이루어질 수 있지만 반드시 그래야 하는 것은 아니라고 지적한다. 결국 이사회·주주총회·감사위원회 같은 기업 내부 의사 결정 기구와 감시 기구가 제대로 작동하면 된다는 것이다. 또 기업 바깥의 소액 주주들이 경영 내용을 적극 감시하는 이른바 ‘주주 행동주의’가 거세지고 적대적 합병·매수(38쪽 기사 참조) 허용 같은 제도적 장치들도 한국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조급증을 비판하는 견해도 있다. 오너 체제에서 갑자기 전문 경영인 체제로 선회하라는 것 역시 오너 전횡 못지 않은 심각한 폐해를 낳게 된다는 주장이 그것이다. 가령 자본 시장이 발달한 미국도 소유 분산과 전문 경영인 체제가 본격 구축되기에는 80년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 동안 미국 역시 오너 체제였다. 한국은 미국에 비해 기업 역사가 짧다. 근대적 의미의 주식회사가 생긴 것이 40년밖에 되지 않는다. 오너가 경영할 때 얻는 프리미엄이 다른 나라에 비해 훨씬 높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혁명적인 상황이 벌어지지 않는 한 오너들이 경영권을 내놓을 리 만무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재벌 오너들도 기존의 재벌 체제가 한계에 봉착했다는 현실 인식을 하고 있다는 흔적은 역력하다. 무분별하게 확장 경영을 일삼았던 오너 경영자들이 퇴출된 사례도 적지 않게 보았다. 한보·기아·동아·진로·한일·고합·해태·새한 등이 좋은 예다. 글로벌 경제와 디지털 경제로 급변하는 상황에서 더더구나 재벌 체제는 정명예회장이 말한 대로 편익보다 비용이 더 크다는 점에서 재벌들은 분명 변신을 도모하고 있다.

최태원 (주)SK 회장은 재벌 체제가 10∼15년 사이에 자취를 감출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이번 현대 오너들의 퇴진이 부지하세월일 것 같았던 재벌(가) 해체 속도를 가속화시킬 ‘중대 사건’인 것만은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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