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생토크] ‘일본 킬러’ 한화의 레전드 구대성 감독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1.02 10:57
  • 호수 15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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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대성 질롱 코리아 감독 “오랜만에 찾은 대전구장 반갑고 따뜻했다”

한화 이글스 팬들이라면 잊지 못할 ‘전설’이 한 명 있다. ‘대성불패’로 이글스의 마운드를 지배했던 구대성(49)이다. 1993년부터 2010년까지 한화 소속으로 활약하며(2001~05년 제외) 9시즌 연속 두 자릿수 세이브와 7시즌 연속 20세이브(1996〜2007년)를 기록했다. 데뷔 해인 1993년을 제외하고 일본에 진출하기 전까지(2001년) 매년 100이닝 이상, 3점대 이하 평균자책점을 찍었다. 1996년에는 구원투수였음에도 18승을 올리며 다승, 평균자책점, 승률, 세이브 부문 4관왕을 달성하며 정규리그 MVP와 1999년 한국시리즈 MVP를 수상했다. 일본 오릭스 블루웨이브, 메이저리그 뉴욕 메츠, 그리고 호주의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선수생활을 하는 등 한국·미국·일본·호주 리그를 모두 경험한 유일한 선수이기도 하다.

구대성은 현재 호주프로야구(Australian Baseball League·ABL)의 창단팀 ‘질롱 코리아’를 이끌고 있다. 구 감독은 오는 11월15일 개막하는 ABL을 앞두고 지난 9월 한국에서 창단 선수 선발 트라이아웃을 열었다. KBO리그에서 방출됐거나 신인 드래프트에서 지목받지 못했던 선수들, 독립야구단에서 활약했던 선수들이 모여 테스트를 가진 끝에 구 감독은 25명의 창단팀 선수들을 최종 선발했다. 50세까지 현역으로 공을 던지고 싶었던 꿈을 접고 지도자의 길을 걷고 있는 구대성 감독과의 인터뷰를 정리한다.

ABL은 해마다 11월에 시즌이 개막돼 1월에 마무리된다. 시드니·멜버른·브리즈번·캔버라·퍼스·아들레이드 등 6개 도시를 중심으로 리그가 펼쳐지는데, 7구단인 질롱 코리아는 질롱시티를 연고지로 한다. 선수들은 대부분 메이저리그 싱글A 혹은 더블A 유망주들로 구성된다. 메이저리그 구단의 허락을 받은 선수들이 겨울 동안 호주 리그에서 실전 경험을 쌓고 다시 마이너리그로 돌아가는 형태인데, 나머지 자리는 호주·한국·일본·대만 선수들이 채운다. 구대성 감독은 한화에서 은퇴 후 2010년부터 2015년까지 호주 시드니 블루삭스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그 경험 때문에 호주로 신생팀을 이끌고 가는 마음가짐이 남다를 수밖에 없을 것이다.  

 

ⓒ 연합뉴스



최근까지 강원도 춘천에서 질롱 코리아 선수들의 훈련이 있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호주로는 언제 출국하나요.

“오늘 오후입니다(인터뷰는 10월28일 진행됐다). 이 인터뷰를 마치면 곧장 공항으로 출발할 겁니다. 제가 먼저 출국하고 선수들은 31일 호주로 떠납니다. 시즌 개막이 11월15일부터거든요.”

KIA에서 방출된 김진우, 시카고 컵스의 권광민 선수 등이 팀에 합류하더라고요.

“네. 프로 출신 선수들 15명, 아마추어 선수들 10명 정도로 선수 구성을 하려 했는데 예상만큼 프로 출신들이 많이 합류하지 못했어요. 올 시즌 잘 치르고 나면 내년에 더 많은 선수들이 우리 팀에 관심을 가져줄 것으로 기대합니다.”

ABL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요.

“한국의 1.5군 정도 됩니다. 적어도 KBO리그 2군에서 뛰던 선수들이 와야 다른 팀과 엇비슷한 수준의 경기를 해낼 수 있어요. 미국 마이너리그에서 뛰던 선수들도 호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때문에 결코 낮은 수준이 아니에요.”

질롱 코리아 선수단 분위기는 어떤가요. 야구의 ‘미생’들이 모인 터라 누구보다 간절하고 애절한 모습을 보일 것 같은데요.

“글쎄요. 짧은 훈련을 통해선 그 간절함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어요. 제가 선수들한테 가장 많이 했던 얘기가 무조건 열심히 하지 말고 야구에 대한 욕심을 가지라는 내용이었습니다. 욕심이 생기면 열심히 할 수밖에 없거든요. 욕심이 없으니까 체력이 뒷받침되지 않더라고요. 훈련 강도가 세지 않은데도 체력 저하를 호소하며 훈련 프로그램을 따라오지 못하는 걸 보고 걱정이 됐습니다.”

‘감독님’이란 호칭에 익숙해졌나요. 전 여전히 감독 구대성이 낯설게 느껴집니다.

“저도 그래요(웃음). 선수로 불릴 때가 훨씬 더 편했던 것 같아요. 감독은 책임을 져야 하는 자리니까요. 사실 전 계속 선수로 뛰고 싶었어요. 시드니 블루삭스와 계약이 안 되면서 팀을 나와 로컬팀인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를 했었거든요. 그러다 호주의 14세, 16세, 20세 대표팀 선수들을 이끌게 됐죠.”

창단팀 감독을 맡는다는 건 ‘선수 구대성’과는 영원히 작별한다는 의미겠죠.

“시원섭섭한 것 같아요. 지금도 1, 2년 정도는 더 할 수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래서 처음 감독 제안이 왔을 때 고민했어요. 선수생활을 완전히 포기해야 했으니까요. 더 이상 미련은 갖지 않으려고 해요. 이젠 팀을 이끄는 지도자로 선수들과 동고동락하면서 선수들이 다시 프로로 돌아갈 수 있게끔 돕고 싶어요.”

ABL은 선수들 연봉이 많은 편이 아니다. 시즌 기간이 짧고 구단 재정도 열악한 편이라 월 1000달러도 못 받는 게 대부분이다. 구 감독도 시드니 블루삭스에 있을 때 4개월에 약 2500달러(한화 약 250만원) 정도를 받았다고 한다. 신생팀 질롱 코리아에서 뛰는 선수들한테는 월급이 지급되지 않는다. 대신 한국과 호주를 오가는 항공비와 숙식이 무료로 제공된다. 구 감독도 이 부분을 매우 안타까워했다. 대신 운동하는 선수들이 잘 먹을 수 있도록 운영비용의 대부분이 식비로 지출될 예정이라고. 선수들에게 매달 회비를 받고 운영되는 한국의 독립리그를 떠올리면 질롱 코리아의 운영 방침이 이해될 수밖에 없다.  

 


2010년 8월 은퇴를 발표했을 때 무릎 수술로 통증이 심해져 더 이상 선수생활을 이어가기 어렵다고 했었어요. 그런데 그해 11월부터 호주 시드니 블루삭스 마운드에서 계속 공을 던졌거든요. 무릎 통증이 나아졌던 건가요.

 

“그렇지는 않았어요. 여전히 통증은 남아 있었습니다. 제가 은퇴할 무렵 호주에 리그가 창설된 거예요. 마침 그곳에 처형이 살고 계셔서 가족들과 함께 호주로 이주를 결정했고 시드니 블루삭스에 입단할 수 있었죠. 그때는 구속이 135~137km 정도 나왔어요. 한국의 2군 정도 수준도 안 됐었죠. 승부에 대한 부담이 없었기 때문에 야구를 계속할 수 있었던 겁니다. 심정적으로는 한화 이글스에 남아 선수생활을 이어가고 싶었어요. 그러나 구속이 떨어지는 상황에서 팀에 남아 있는 건 민폐나 다름없었죠. 그때 마침 호주에 리그가 생겼고 가족들도 호주행에 모두 찬성해 주는 등 상황들이 잘 맞아떨어지는 바람에 한국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호주에서 선수생활을 하면서도 다시 KBO리그로 돌아가고 싶다고 생각하진 않았나요.

“전혀요. 돈은 못 벌어도 가족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충분히 만족했습니다. 또 시즌이 끝나면 마음 맞는 선수들끼리 모여 로컬팀에 들어가 야구를 했거든요. 한국의 사회인 야구팀보다 약간 수준이 높은 팀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로컬팀에도 150km의 공을 던지는 선수가 있었으니까요.”

대부분의 선수들이 다른 직업을 갖고 선수생활을 병행한다고 들었어요.

“저도 운동 삼아 하루에 3시간 정도 전단지를 돌렸어요.”

전단지요?

“네. 일주일에 두 번 하루 3시간씩 전단지 돌리는 일을 했어요. 일부러 운동하러 뛰거나 걷기도 하는데 전단지 돌리면서 운동도 하고 돈을 버는 거라 괜찮은 부업이었습니다. 생활비 정도는 벌었으니까요.”

구 감독이 전단지 돌리는 모습이 쉽게 상상이 안 가네요.

“외국에서는 그런 일 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에요. 절 알아보는 사람도 없었고요.”

구 감독이 ABL로 향한 후 임경완·이혜천·고창성 등 후배들도 호주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갔어요.

“후배들이 와서 잘해 주니까 ABL에서 계속 한국 선수들에게 문을 열어주는 것 같아요. KBO리그에서 뛴 선수들의 수준이 높다는 걸 인정받은 셈이고요. ABL도 지금은 상당한 수준에 올라섰어요. KBO리그 1군보다 더 뛰어난 실력을 자랑하는 선수들도 있거든요. 특히 투수들 실력은 상당히 높은 편입니다. 앞으로 일본·대만에서도 팀을 창단해 들어온다고 하더라고요. 저와 함께하는 선수들이 여러 스카우트들의 눈에 띄어 야구로 돈 벌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질롱 코리아에서 뛰다 많은 연봉을 받고 프로팀에서 뛴다면 더할 나위 없을 것 같아요.”

최근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메이저리그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소유한 김병현(39)이 올 시즌부터 호주 멜버른 에이시스에서 활약하게 된다고 멜버른 구단이 공식 발표했다. 김병현이 속한 멜버른 에이시스는 질롱 코리아와 11월9일 평가전이 예정돼 있다. 

 

2007년 6월19일 광주 무등경기장에서 벌어진 프로야구 한화-KIA의 경기에서 한화 구대성이 9회말에 등판해 역투하고 있다. ⓒ 연합뉴스


지난 10월20일 대전 홈구장에서 열린 한화와 넥센의 준플레이오프 2차전에서 시구를 맡아 오랜만에 대전구장 마운드에 올랐습니다. 소감이 어떠했나요.

“(한화가) 잘해서 올라가길 바랐는데(한화는 넥센한테 패하는 바람에 11년 만의 포스트시즌 진출을 준플레이오프에서 끝마쳐야 했다). 그날 여유를 갖고 출발했는데 차가 많이 막히는 바람에 경기 시작 15분 전에야 야구장에 도착했어요. 유니폼을 제대로 갖춰 입지 못하고 상의만 바꿔 입은 채 정신없이 마운드로 향했던 터라 한용덕 감독 등 한화 선수단과 인사도 나누지 못하고 시구만 하고 내려왔습니다. 그래도 오랜만에 찾은 대전구장은 반가웠어요. 따뜻했고요.”

1999년 한화 이글스의 한국시리즈 우승을 함께했던 동료들이 지금은 감독, 코치(장종훈·송진우)로 팀을 이끌고 있네요.

“그만큼 세월이 흐른 거죠. 그런 자리에 있을 나이가 된 것이고.”

혹시 감독님한테는 코치직 제안이 없었나요.

“있었습니다. 제 상황이 여의치 않아 어렵게 거절했었고요.”

언제쯤인가요.

“한용덕 감독이 한화 감독으로 선임됐을 때요. 당시 제게 한국으로 들어올 수 있느냐고 물어보셨는데 제가 호주의 14세 대표팀을 이끌고 있어 움직일 수 없었어요. 6월에 국제대회 출전을 앞둔 상태라 제가 도중에 그만둘 수 없었거든요. 영입 제안을 받았을 때는 일주일만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했는데, 이틀 고민하고 바로 연락해서 갈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너무 아쉬웠을 것 같은데요.

“아쉽죠. 그래도 어린 선수들을 놓고 갈 수는 없잖아요. 14세, 16세, 20세 대표팀에서 선수들을 지도하는 건 재능 기부나 마찬가지예요. 교통비도 받지 못하고 무보수로 가르치는 건데 그렇다고 해서 책임이 없는 건 아니거든요. 제가 거길 떠나면 누가 그 선수들을 가르치겠어요? 물론 그래도 떠났어야 한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지만 성장하는 아이들한테 그릇된 지도자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지 않았습니다.”

그 선택을 후회하진 않았나요.

“네. 이미 지난 일인걸요. 아마 그때 대표팀을 놓고 그냥 호주를 떠났다면 그게 더 후회됐을 것 같아요.”

KBO리그 팀으로부터 지도자 제안을 받은 게 그때 처음이었던 거죠.

“그렇죠. 이전에는 가고 싶어도 불러주지를 않아서….”

그럼에도 책임감 때문에 그 제안을 고사했다는 게 놀랍네요.

“제가 한화 출신이고 한화 마운드에서 시구했다고 해서 다른 팀으로 못 가는 건 아니잖아요. 서로 상황이 잘 맞는다면 갈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한국에서의 지도자 생활이 꼭 한화만 가능한 건 아니니까요. 언젠가 또 다른 기회가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선수 시절 독특한 투구폼이 인상적이었던 구대성 감독. 세트포지션에서 몸 방향이 1루가 아닌 거의 2루수 위치를 바라보는 시점에서 다리를 들고 몸을 틀어 공을 던지는 일명 ‘토네이도 투구법’은 구 감독의 트레이드마크였다. 투구폼 얘기를 꺼냈더니 구 감독은 “선수들한테 권하고 싶지는 않다. 무릎·허리·발목에 무리가 갈 수 있어 부상 위험이 크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그는 이 투구폼으로 일본·미국에서 뛴 5년을 제외하고 214세이브(3위), 평균자책점 2.85(5위), 그리고 1128.2이닝 동안 1221개의 탈삼진을 기록하며 9이닝당 삼진 개수에서 역대 1위에 올랐다(2위는 선동열).

구 감독은 2006년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대회 일본과의 예선전에서 ‘30년간 일본을 이길 수 없도록 하겠다’는 이치로의 발언을 듣고 배영수에게 마운드에 오르면 이치로를 맞힐 것을 주문했다. 뒷일은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말과 허벅지 쪽으로 제대로 맞히면 1만 엔을 주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이 일은 나중에 배영수가 털어놓으면서 세상에 알려졌는데 구 감독은 “이치로처럼 대단한 선수가 해선 안 될 말을 했기 때문에 정신 차리라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배영수는 이치로의 엉덩이를 맞혔고 이후 선수 구대성이 마운드를 이어받은 후 실점하지 않고 이닝을 마무리했는데, 9회 이승엽이 역전 홈런을 터트리는 바람에 그 경기를 3대2로 이겼고 구 감독은 승리투수가 됐다.

구 감독과 인터뷰하는 내내 오랜 호주 생활에서 오는 여유로움이 느껴졌다. 컴퓨터와 휴대폰을 멀리하고 아내와 항상 손을 잡고 다니거나(기자와 만날 때도 아내와 손을 잡고 나타났다) 현실적인 이익과 개인주의 대신 사회적인 책임과 재능 기부로 또 다른 야구의 즐거움을 영위하는, 그야말로 진정한 레전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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