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퍼스트맨》, 《위플래쉬》 《라라랜드》 이은 홈런 가능할까
  • 정시우 영화 저널리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10.19 13:46
  • 호수 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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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이미언 셔젤 세계의 확장이지만 최고는 아닌 《퍼스트맨》

데이미언 셔젤은 오프닝 시퀀스를 죽여주게 찍는 감독이다. 《위플래쉬》와 《라라랜드》가 증명한 사실이다. 그에게 오프닝은 영화 전체를 압축하는 하나의 제시문과도 같다. 까만 화면 위, 드럼 소리로 문을 여는 《위플래쉬》는 주인공 앤드루(마일즈 텔러)의 연주를 우연히 엿듣게 된 플레처 교수(JK 시먼스)에게로 카메라를 돌린다. 훌륭한 연주자를 찾고 있다는 말로 앤드루를 자극하는 플레처 교수. 앤드루는 그런 교수의 환심을 사기 위해 혼신을 다해 드럼을 두드리지만 쉽지 않다. 당근과 채찍을 번갈아 주는 플래처와 그의 말에 알게 모르게 사육당하는 앤드루의 팽팽한 긴장감은 《위플래쉬》가 앞으로 이 두 사람의 처절한 ‘밀당’으로 채워질 것을 암시하는 멋들어진 복선이었다.

원 신 원 컷으로 촬영된 《라라랜드》의 오프닝은 어떤가. 꽉 막힌 LA 고속도로 위, 운전자들이 갑작스럽게 역동적인 군무를 펼치며 관객을 초반부터 무장해제시켜 버린다. CG 기술이 발달하지 않아 실제 장소에서 대부분의 촬영을 진행했던 옛 할리우드 방식을 따르고자 실제 고속도로 위에서 촬영한 이 오프닝 시퀀스는, 《라라랜드》가 고전 뮤지컬 영화의 정취를 가득 머금은 작품임을 드러내는 바로미터였다.

그렇다면 이제 관심은 당연히 《퍼스트맨》의 오프닝에 쏠릴 수밖에 없다. 셔젤은 이번에도 오프닝에 전체를 엿볼 수 있는 밑그림을 그려 넣었을까. ‘역시나’다. 시작과 동시에 관객을 맞이하는 건, 쉴 새 없이 요동치는 우주선 안에서 불안과 싸우는 닐 암스트롱(라이언 고슬링)의 모습이다. 암스트롱은 언제 불시착할지 모르는 나사(NASA)의 실험용 비행기 안에서 위험천만한 조종을 하는 중이다. 카메라는 폐쇄된 우주선 조종석에 앉은 그의 시점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관객이 자연스럽게 암스트롱의 공포에 동참하게 되는 이 오프닝은 《퍼스트맨》의 방향을 명료하게 제시한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닐 암스트롱의 입장에서 그의 심적 부담과 고통을 들여다보겠다는 영화다.

 

《퍼스트맨》의 한 장면 ⓒ UPI 코리아


스펙터클 대신 개인의 내면 탐구

아폴로 11호 선장, 인류 최초로 달을 밟은 남자, 세계 역사상 가장 유명한 사람 중 하나. 닐 암스트롱은 역사적 인물이기에 아이러니하게도 미지로 남겨진 사람이다. 인기란 신기루와 같아서 높이 올라갈수록 이를 신격화시키는 습성이 있다. 그래서 우린 닐 암스트롱을 알지만, 사실 그를 모른다. 암스트롱의 업적이 그를 신비한 이미지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오프닝이 알리듯, 셔젤은 역사적인 인물을 영웅으로 그리는 데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주목한 건 반대 지점이다. 범접하기 힘든 우주적 이미지로 존재하는 암스트롱을 인간이 사는 땅으로 호출해 내는 작업. 이 과정에서 《퍼스트맨》은 기존에 흔히 보던 우주 영화들에서 이탈한다.

무수히 많은 스페이스 오페라나 SF영화들이 광활한 모험과 경이로움, 오락의 무대로 우주를 활보했다면, 《퍼스트맨》에서 우주는 귀향이 보장되지 않은 생존의 공간이다. 산업재해의 위험이 큰 직장이기도 하다. 나사 하나만 삐걱대도 폭발할 수 있는 구식 사양의 우주선. 《스타워즈》 《마션》 《인터스텔라》 등을 이미 경험한 이들에게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내디딘 첫걸음은 흡사 네안데르탈인의 직립보행에 비견될 만하다. 영화 속 우주비행사들은 우주탐험에 나선 용감한 사람이라기보다, 밀실에 감금된 죄수에 가까워 보인다. 기존 우주 영화의 문법을 기대했던 관객이라면, 다큐멘터리적인 접근법에 적응하는 데 시간이 조금 필요할 수 있다.

스펙터클 대신 개인의 내면을 탐구하고자 하는 감독의 집요한 태도는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달 착륙 신에서도 드러난다. 우주 재난이나 개척을 다룬 영화에는 대개 주인공이 중요한 임무를 수행해야 하는 상황에 처할 때, 이를 지켜보는 지구인들의 응원과 환호, 탄식이 병치되는 식의 시퀀스가 끼어 있기 마련인데, 《퍼스트맨》에는 그런 클리셰가 없다. 감독은 성조기를 달에 꽂는 상징적 장면조차 과감히 배제했다. 임무를 완성한 암스트롱이 지구에 도착했을 때의 환호 또한 만날 수 없다. 암스트롱을 맞이하는 건 (대통령의 축하가 기다리는) 백악관이 아니라, (우주에서 혹여 감염됐을지 모를 위험을 방지하기 위한) 검역실이다. 셔젤은 마지막 순간까지 결코 들뜨지 않고, 한 남자의 내면을 바라본다. 달에 착지한 순간 암스트롱의 눈에 비친 건 환희라기보다 우주 공간의 압도적 공허, 절대고독에 가깝다.

《위플래쉬》 《라라랜드》의 인물들이 목표를 위해 자신을 채찍질했듯, 《퍼스트맨》의 주인공 역시 끊임없이 자신을 다그치며 두려움과 맞선다. 셔젤의 인물들을 규정하게 하는 방식 중 하나는 목표와 사랑 사이에서의 선택이다. 《위플래쉬》의 앤드루는 목표를 위해 여자친구에게 이별을 가차 없이 통보했다. 《라라랜드》의 인물들은 사랑을 꿈에게 양보했다. 《퍼스트맨》은 암스트롱의 죽은 딸을 통해 꿈과 사랑의 일치를 시도한다.

《위플래쉬》 《라라랜드》로 뛰어난 음악 감식안을 선보인 셔젤에게 우주는 그 장기를 발휘하기에 제약이 따르는 공간이다. 그러나 앞선 작품들을 함께한 ‘영혼의 파트너’인 음악감독 저스틴 허위츠는 이 제약을 그만의 방법으로 뛰어넘는다. 삐걱거리는 나사음, 들썩이는 우주선의 굉음, 적재적소를 수놓는 웅장한 ‘우주 왈츠’ 넘버들이 암스트롱의 감정에 깊이를 더한다. 앞선 두 작품에서 선보였던 황홀한 미장센은 카메라 기법의 변화로 재현한다. 16㎜, 35㎜ 카메라 등으로 진행되던 화면은 달 착륙 때 64㎜ 초고화질 아이맥스 카메라로 바뀌는데, 그 순간 화면이 전하는 압도감은 실로 대단하다.  

 

데이미언 셔젤 감독이 찍은 《위플래쉬》와 《라라랜드》의 한 장면(왼쪽부터) ⓒ ㈜쇼박스·판씨네마㈜


《위플래쉬》 《라라랜드》 뛰어넘지 못한 이유

그러나 남는 의심. 《퍼스트맨》은 무언가를 새롭게 ‘성취’해서 대단한 영화라기보다, 할 수 있는 걸 과감하게 ‘포기’해서 대범한 영화에 가깝다. 그리고 이 ‘포기’는 《위플래쉬》 《라라랜드》의 성공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고, 가치를 얻는다고 여겨지는 지점이 있다. 《퍼스트맨》은 (주인공의 내면을 따르는 영화라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화적인 감흥이 필요 이상으로 탈색돼 있는데, 셔젤은 감흥을 끌어올리는 작업을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만약 감독의 전작이 없었다면 어땠을까. 그랬다면 셔젤은 감흥은 ‘안’ 살린 게 아니라 ‘못’ 살린 쪽으로 평가받지 않았을까. 그로 인해 영화가 지루하다는 평가를 받지 않았을까.

《위플래쉬》와 《라라랜드》를 통해 감독의 천재성을 경험한 관객들에게 셔젤은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세계적인 빅 이벤트를 가장 개인적인 영화로 만들 수 있음을 증명했다는 데 어쩌면 이 영화의 성취가 있다. 그러나 개인의 내면 묘사를 그만의 독창적인 화법으로 했는지는 의문이다. 그래서 이 영화는 전작의 연장에서 보면 분명 셔젤의 확장이 맞지만, 따로 떼어놓고 보면 최고는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위플래쉬》 《라라랜드》 《퍼스트맨》으로 이어지는 필모를 보고, 그의 다음 작품을 궁금해하지 않기란 불가능하지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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