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기차 경쟁 뒤에 숨은 충전기 표준화 전쟁 가열
  • 이석 기자 (ls@sisajournal.com)
  • 승인 2018.09.14 14:19
  • 호수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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급속충전기 시장 선점 위해 日·中·유럽 주도권 다툼 치열…“갈라파고스 신드롬을 넘어라”

 

‘갈라파고스 신드롬(Galapagos syndrome)’이란 말이 있다. 한때 세계를 호령했던 일본 전자업체들이 자국 시장만을 생각한 표준과 규격으로 제품을 개발했다가 국제적으로 고립됐던 현상을 일컫는 신조어다. 일본 휴대전화 인터넷망(i-mode) 개발자 나쓰노 다케시(夏野剛) 게이오대 교수가 2007년 ‘일본 무선 전화 시장 보고서’에서 처음 언급했다. 

 

4차 산업혁명 시대가 본격화되면서 전 세계는 소리 없는 전쟁을 치르고 있다. 탄소 배출이 없고 친환경적인 전기자동차는 시대적 환경과도 맞아떨어진다는 점에서 향후 시장이 급격히 성장할 것으로 예상된다. 국제에너지기구(IEA)에 따르면, 2016년 기준으로 전기차의 글로벌 누적 보급은 210만 대다. 중국이 65만 대로 가장 많았다. 전기이륜차(2억 대)와 저속 전기차(300만~400만 대), 전기버스(30만 대)를 포함할 경우 규모는 더욱 커진다. 뒤를 이어 미국(56만 대), 일본(15만 대), 노르웨이(13만 대), 네덜란드(11만 대) 순이었다. 

 

한 해 신규 등록되는 전기차도 75만 대로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점유율은 중국(45%), 미국(21%), 노르웨이(7%), 영국(5%), 프랑스(4%), 일본(3%) 순으로 높았다. IEA는 2020년이 되면 전기차 보급이 651만 대, 2025년에는 누적 보급대수가 2130만 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했다. 폴크스바겐과 테슬라, 닛산, GM, 포드 등 메이저 전기차 업체들이 2050년 누적 판매량을 100만 대로 잡았을 정도로 관심도 높아지고 있다.  

 

주요 선진국들이 전기차 급속충전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표준화 전쟁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2018 부산국제 모터쇼’에서 아시아 최초로 공개된 제네시스의 전기차 콘셉트카 모습. ⓒ 연합뉴스

 

‘적과의 동침’ 선포한 中·日

 

주요 선진국들이 전기차의 핵심 사업인 급속충전기 시장을 선점하기 위해 표준화 전쟁을 벌이는 것도 이 때문이다. 이상동 표준정책연구센터 센터장은 “국제 표준을 가진 국가나 기업이 시장의 주도권을 가지기 때문에 국제 표준을 ‘선도자 특허권’으로도 부른다”며 “시장의 규제 역시 국제 표준에 근거하는 만큼 국제 표준을 선점하면 미래 먹거리를 확보할 수 있다”고 말했다. 

 

이 때문에 일부는 ‘적과의 동침’도 불사하고 있다. 영토 문제로 갈등을 빚고 있는 일본과 중국이 전기차 표준화를 위해 손을 맞잡았을 정도다. 충전 방식을 기준으로 급속충전기 시장은 현재 일본의 ‘차데모’와 중국의 ‘GB/T’, 유럽의 ‘콤보’가 치열한 주도권 다툼을 벌이고 있다. 일본은 상대적으로 시장은 작지만, 기술이 안정적인 게 특징이다. 반면 중국과 유럽은 전기차 시장 자체가 크기 때문에 자국의 충전 규격을 고수하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중국과 일본이 ‘연합전선’을 구축했다는 점에서 최근 주목을 받았다. 일본의 급속충전기 출력은 현재 150kW 안팎이다. 중국은 50kW 안팎인데, 양측은 2020년까지 500kW 이상으로 출력을 높이고, 30분 정도인 충전시간도 10분 이내로 단축한 통일된 규격의 급속충전기를 공동 개발하기로 합의했다. 일본이 급속충전 기술과 안전관리 기술의 노하우를 제공하고, 중국은 부품 공급을 담당할 예정이다. 이 경우 중국과 일본이 표준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에 오를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서로 다른 분야의 기업 간 협업 비즈니스 모델도 가속화되고 있다. 전기차 생산을 위해 손을 맞잡은 테슬라와 파나소닉이 대표적이다. 테슬라는 올해 8월까지 북미 시장에서만 8만4127대의 누적 판매량을 기록했다. 특히 모델3의 올해 8월까지 누적 판매량은 5만5882대(29.4%)를 기록했다. 올해 북미에서 팔린 전기차 10대 중 3대가 테슬라 제품인 것이다. 파나소닉이라는 든든한 우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한국 배터리 업체들은 북미 시장에서 좀처럼 기를 펴지 못하고 있다. 독일의 벤츠와 BMW, 보쉬, 콘티넨탈도 최근 전기차 시장 선점을 위해 연합전선을 구축했고, 일본의 도요타와 도시바, 파나소닉 등도 생산 및 공급 체인에 걸쳐 융합 얼라이언스를 형성했다.  

 

한국도 2011년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 주도로 ‘전기자동차 표준화 추진협의회’를 발족시켰다. 협의회에는 현대·기아차와 GM대우, 쌍용자동차, SK에너지, CT&T, LG화학, PNE솔루션, 비나텍 등 대·중소기업과 한국자동차공학회 등 학계 전문가, 한국전력 등 유관기관이 참여하게 된다. 이들은 향후 전기자동차 기술 표준을 공동 개발하고, 해외 전기자동차 규제 및 표준화에도 공동 대응할 예정이다. 

 

 

아시아 최대 2018 IEC 부산총회 개최  

 

2017년 말 충전 방식을 ‘콤보1’으로 통합하면서 큰 산도 넘은 상태다. 한국의 충전기는 그동안 미국의 ‘콤보1’과 일본의 ‘차데모’, 프랑스의 ‘AC3상’ 등 세 가지 규격을 모두 사용하다 보니 비효율적인 데다 비용도 많이 든다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이를 하나로 통합함으로써 본격적인 표준 경쟁에 뛰어든 것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갈 길이 멀다는 게 전문가들의 한결같은 목소리다.  

 

오는 10월22일부터 26일까지 부산 벡스코 등에서 열리는 2018 IEC(국제전기기술위원회) 부산총회가 주목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산업통상자원부 국가기술표준원이 주최하고 한국표준협회가 주관하는 이번 행사는 역대 3번째이자, 아시아 최대 규모가 될 것으로 전망된다. 전 세계 85개국에서 3000여 명의 국제 표준 전문가가 올해 행사에 참여할 예정이다. 지역 경제효과만 200억원대에 이를 것으로 전망된다. 

 

무엇보다 한국은 이번 행사를 통해 국내 핵심 기술의 홍보와 함께 표준 강국으로 도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국가기술표준원 관계자는 “올해 행사는 2004년 IEC 서울총회 개최 이후 14년 만이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며 “부산총회를 계기로 향후 전기·전자 표준 분야 선도그룹으로 진입하고, IEC 상임이사국 진출을 위한 전환점이 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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