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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의 방아쇠를 당기다(3)

[노혜경의 시시한 페미니즘] 피해자의 신비를 넘어 어떻게 살아남을까

노혜경 시인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9.04(Tue) 14:00:00 | 1507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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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해자의 신비의 또 하나의 특성은, 피해자는 피해자다워야 한다는 것뿐 아니라, 피해자이기에 비난받아야 한다는 뜻 또한 포함하고 있다. 피해를 당한 것 자체가 피해자의 과오라는 것이다. 피해자를 바라보는 같은 여성의 시각에도 상당한 정도로 가해자의 시선이 드리워 있다. 가부장제 사회, 라고 너무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 의미는 아버지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보는 것이 아니던가. 엄마도 아버지의 시선으로 나를 보고, 나도 그렇다. 그럴 때 나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완벽하게 순결한 피해자라야 한다는 ‘피해자의 신비’는, 여성 피해자를 도리어 가해자로 만드는 데 일조하기도 한다. 여성답지 못하고 피해자답지 못한 모든 행동은 여성에게 오히려 책임을 묻는 핑계가 되고, 여성은 함부로 성폭력을 행사해도 되는 존재가 된다. 많은 남성들의 두뇌에 똬리를 튼 ‘꽃뱀’이라는 언어는, 남성 자신을 오히려 피해자의 자리에 놓고 성욕이라는 본능에 굴복하는 불쌍한 존재라는 서사를 만든다. 

 

심지어 열 살짜리 어린아이가 유혹자로 보이는 이 본능이라는 알리바이가 얼마나 심한 거짓말인지를 알면서도 입에 담을 수 있다는 사실, 끔찍하면서도 실소를 머금게 한다. 남성은 유혹당해 성폭력을 저지른 피해자라서 불쌍하고, 여성은 성폭력을 피해 가지 못한 피해자라서 잘못했다는 이상한 논리. 인터넷에 가득한 남성들의 아우성을 요약하면 이렇게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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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메커니즘에 따라 행동한 자를 제대로 가해자로 불러내기 위해서 피해자가 무엇을 하면 될까? 장자연 사건에서 보듯이, 죽음으로 항거해도, 그래서 명백히 피해자성을 인정할 수 있는 피해자가 되었어도 가해자를 처벌하기란 아직도 어렵다. 통념과 고정관념의 숲에서 가해자는 아주 쉽게 숨거나 사라진다.

 

그렇더라도, 피해자다움이라는 통념, ‘피해자의 신비’를 이겨내야 한다는 게 아직은 내가 내놓을 수 있는 작은 대안이다. 피해자는 “나는 피해를 입었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라, “나는 가해를 고발한다”라고 말하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 여성을 주어로 놓고 수동태로 말하지 말자. 그래서 가장 강력한 대안은 끝없이 항의하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사회적 약자의 이기는 방식은, 강자가 정말 어쩔 수 없다 생각하고 양보할 때까지, 즉 강자가 해결책을 찾아낼 때까지 계속 싸우는 것뿐일 때가 많다. 대화하는 순간 발언권은 넘어가고, 합의하는 순간 손해를 본다. 

 

약자임을 극복한다는 것은 매 순간 자신을 지배하는 강자의 논리를 인식해 내기 위한 싸움의 과정이기도 하다. 최소한, 피해자의 신비에 빠져 자신의 피해자성을 강조하는 것에 머물지는 말아야 한다. 어떤 곤경이 오더라도, 연대하는 수많은 사람들을 믿으며 싸워보자. 전혀 피해자답지 않은 피해자, 생존자가 되어 보자.

 

나는 이번 판결로 한국 사회에 페미니즘의 방아쇠가 다시 당겨졌다고 말하고 싶다. 베티 프리단의 《여성의 신비》가 미국의 당대를 지탱하던 중산층 여성들의 각성을 이끌어내었듯, 이번 판결 또한 머뭇대던 여성들의 마음에 “이름 붙일 수 없는 분노”를 야기했다. 대부분의 통념소유자들이 바라보는 지점과 전혀 다른 곳을 저절로 바라보게 된 여성들에게, 방아쇠가 당겨졌다. 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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