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 정상회담’ 합의하고도 대립각 세우는 北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8.17 08:58
  • 호수 15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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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미 공조 통한 대북제재 유지에 불편한 심기

 

가을 남북 정상회담을 둘러싼 북한의 기류가 심상치 않다. 판문점 남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9월 안에 평양 개최’에 합의하고도 장외 신경전을 펼치더니, 관영매체까지 동원해 문재인 정부를 압박하는 공세를 누그러뜨리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남북관계에 훈풍이 불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준다. 하지만 물밑에선 자칫 남북관계의 기본 틀을 헝클어버릴지 모르는 불안요소가 꿈틀거리는 형국이다.

 

남북 당국 관계에 이상 징후가 감지된 건 8월13일 판문점 북측 통일각에서 열린 제4차 남북 고위급회담에서다. 6월초 회담 이후 다시 만난 조명균 통일부 장관과 리선권 북한 조국평화통일위원장은 공개 모두발언을 통해 ‘한배를 타면 한마음’이라거나 ‘막역지우’라는 말까지 언급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전체회의와 수석대표 접촉 각 한 차례, 대표 접촉 2회를 가지면서 남북한은 ‘9월 중 남북 정상회담 개최’ 등에 의견 접근을 봤다. 그 내용은 공동보도문을 통해 발표됐다. 3문장짜리 짧은 보도문이었지만 4·27 판문점 선언에서 합의한 ‘가을 정상회담’을 9월 중 개최 쪽으로 좁혔다는 점에서 무난한 합의로 받아들여졌다. 

 

그런데 회담 종결회의에 나온 북측 단장 리선권은 알 듯 말 듯한 얘기를 꺼내가며 신경전을 펼쳤다. 그는 “북남 회담과 개별 접촉에서 제기한 문제들이 만약 해결되지 않는다면 예상치 않았던 그런 문제들이 산생(産生)될 수 있고, 또 일정에 오른 모든 문제들이 난항을 겪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남북 당국대화에서 비공개로 진행한 개별접촉 등의 내용까지 일방적으로 들먹이며 ‘이행이 순조롭지 않을 것’이란 식의 언급을 하는 건 관례에 어긋난다. 

 

문재인 대통령이 8월15일 서울 용산구 국립중앙박물관 열린마당에서 열린 제73주년 광복절과 정부수립 70주년 경축식에서 경축사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北 요구로 8월13일 고위급회담 추진

 

그런데도 리선권 단장은 남북 간이 합의해 추진 중인 사안들이 모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식의 위협성 발언을 쏟아낸 것이다. 특히 회담 합의내용을 서로 확인하고 서명한 뒤 언론에 공개하는 종결회의에서 작심한 듯 이런 행태를 보인 건 북한 측 상부의 의중이 반영된 것이란 해석이 회담장 주변에서 나왔다. 리선권은 남북 정상회담 일정을 궁금해하는 남측 취재진에게 “기자 선생들 궁금하게 하느라 날짜를 말 안 했다”며 “날짜는 다 돼 있다”고 말했다. ‘9월 안’이라고 공동보도문에 담았지만 실제론 날짜가 잡혀 있다는 의미로 해석됐다. 우리 회담 관계자는 “날짜까지 다 정해져 있다는 식의 주장을 내세우면서, 문재인 정부의 태도 여하에 따라 일정이 파기될 수도 있다는 전형적인 회담장 선전술을 남측 언론을 대상으로 펼친 것”이라고 진단했다.

 

관심은 북한이 판문점 고위급회담에서 어떤 전제조건이나 요구사항을 우리 측에 제기했는가 하는 대목에 쏠리고 있다. 이번 고위급회담은 북한 측 요구로 열렸다. 정상회담 일정을 확정하는 데 초점이 맞춰진 회의라는 게 개최 하루 전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브리핑 내용이었다. 하지만 공동보도문엔 ‘9월 안에’라는 수준으로 담겼고 그 외 현안은 ‘판문점 선언의 이행 상황 점검’이란 표현에 뭉뚱그리는 정도에 그쳤다. 이 때문에 기본 의제의 논의보다는 북한이 뭔가 우리 측과 직접 대면해 북한의 입장을 전달해야 할 필요성 때문에 고위급회담 테이블이 마련됐을 것이란 관측에 힘이 실리고 있다. 

 

하지만 북한이 언급한 내용이 무엇을 염두에 둔 것인지는 베일에 싸여 있다. 청와대는 물론 통일부 등 대북부처가 입을 굳게 다물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이 제기했을 가능성 있는 사안으로 1순위에 꼽히는 건 대북제재와 관련한 한·미 공조다. 북한은 최근 들어 관영매체를 동원해 문재인 정부가 미국과 국제사회가 주도하는 대북제재에서 발을 빼지 않고 있다면서 불만을 제기하고 있다. 고위급회담을 하루 앞둔 8월12일엔 선전매체 ‘우리 민족끼리’를  통해 판문점 선언이 결실을 보지 못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원인은 미국의 대(對)조선 제재 책동과 그에 편승한 남측의 부당한 처사에 있다”고 비난했다. 앞서 8월2일자 노동신문은 “외세의 눈치를 보며 구태의연한 제재압박 놀음에 매달린다면 북남관계의 진정한 개선은 기대할 수 없다”며 문재인 정부를 몰아세웠다. 북한은 금강산 관광 재개와 개성공단 재가동을 요구하는 대남 비난성 보도를 잇달아 내보내기도 했다.

 

정부는 이런 북한의 태도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북한이 4·27 판문점 정상회담과 6월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통해 거듭 약속한 ‘완전한 비핵화’를 이행하면 미국 등 국제사회가 대북제재 해제 조치를 취할 수 있다는 틀을 깨뜨리려는 의도가 깔려 있다는 판단에서다. 더욱이 지난 2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위해 첫 대북제재 예외조치를 취했고, 최근에도 미국 등 국제사회의 눈총을 받아가며 유사한 신청을 제기하고 있는데 북한이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있다는 볼멘소리가 우리 당국자들 사이에서 나온다.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는 미국이 ‘대규모 현금(Bulk Cash)’ 유입 차단 차원에서 주시하고 있는 사안이라 당장 해법을 찾는 건 불가능하다는 얘기다. 

 

남북 고위급회담 우리 측 수석대표인 조명균 통일부 장관이 8월13일 서울 종로구 남북회담본부에서 출발 전 소감을 밝혔다. ⓒ연합뉴스

 

현재 금강산 관광·개성공단 재개 쉽지 않아

 

정부는 일단 정면돌파를 선택한 모습이다. 북한의 주장이나 비난에 휩쓸리기보다는 평양 정상회담 준비와 어젠다 제시를 통해 보다 큰 틀의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 관리에 나선다는 입장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8·15 경축사를 통해 평양 남북 정상회담을 기정사실화하고, 경협과 대북투자를 중심으로 한 북한과의 협력사업 청사진을 제시한 것도 이런 차원으로 볼 수 있다. 

 

문 대통령은 경축사에서 ‘평화가 경제’라는 화두를 제시하면서 “완전한 비핵화와 함께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돼야 본격적인 경제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다음 달 평양을 방문하게 된다”며 9월 남북 정상회담 개최를 기정사실화했다. 남북 철도·도로 연결의 경우 “올해 안에 착공식을 갖는 게 목표”라고 밝히는 등 남북 협력사업의 일정을 제시하기도 했다. 석연치 않은 북한의 최근 움직임에도 불구하고 김정은 국무위원장과의 만남 등 남북관계의 시간표를 예정대로 밀고 가겠다는 복안으로 보인다.

 

문재인 정부도 개성공단과 금강산 관광 같은 대규모 협력사업 재개에 내심 공을 들이고 있다. 문 대통령은 특히 2007년 노무현 대통령이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10·4 선언에서 합의한 철도·도로와 항만 등 인프라 건설 이행에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현재로선 대북제재의 틀을 깨고 나설 수는 없는 상황이다. 이런 현실을 무시한 채 북한은 우리 정부에 “속도를 내달라”고 채근하고 있다.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 북한의 벼랑 끝 버티기 전술에 정부의 가을맞이 고민이 깊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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