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비핵화의 정치학
  • 정대진 아주대 통일연구소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27 11:32
  • 호수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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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위해 인내하는 외교 필요한 시점

 

25년 만의 ‘판갈이’다. 북·미 정상회담 이야기다. 미국과 국제사회는 지난 25년간 차관보급 불판 위에서 ‘북한 비핵화’를 조리해 왔다. 자주 불도 꺼지고 판은 금 가고, 깨지고, 화석처럼 변해 버렸다. 이제 아예 북·미 양 정상이 새로 큰 판을 들고나왔다. 둘은 싱가포르에서부터 새로 요리를 시작했다. 

 

처음에 미국은 센 불로 비핵화 스테이크를 바짝 굽자고 했고, 북한은 이에 대해 중간 불로 북·미 관계 정상화와 평화체제라는 다른 고기와 함께 야채도 하나하나 천천히 구워 먹자고 했다. 새 판은 등장했지만 불 조절부터 힘들어 보였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오른쪽)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지난 6월12일(현지 시각) 싱가포르 센토사섬의 카펠라호텔에서 만나 악수를 나누고 있다. ⓒAP연합


 

北·美 신경전 속 마음 급한 韓

 

시간이 조금 지나 이제는 미국도 조금 천천히 하자고 말한다. 처음보다는 누그러진 자세다. 판을 깨거나 밥상을 엎지는 않으려고 조심하는 모양새다. 북한도 미국이 일방적으로 너무 센 불로 판을 달구려고 하는 것 아니냐며 항의는 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선의는 신뢰한다고 밝혔다. 역시 판을 깨거나 밥상을 엎으려고 하지는 않는 눈치다. 

 

어쨌든 불은 지펴졌고 판이 새롭다 보니 새로 데우는 데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다는 쪽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그렇지만 한국은 바빠지고 있다. 북·미 간의 새로운 판이 강 건너 불 구경이 아니니까 이것 저것 할 일이 많다. 지금은 어느 누구도 판을 깨려 하지 않지만 까딱 잘못했다간 판은 물론이고 밥상까지 다 날아가 버리는 게임이 될 수도 있으니 최선을 다할 수밖에 없다. 더군다나 한반도라는 밥상 위에 피워놓은 불판이라 한국은 피하려야 피할 수가 없다.  

 

한반도 평화와 번영이라는 근사한 요리를 해내기 위해 한국은 우선 남북한 경제협력과 사회문화 교류라는 메뉴로 잔칫상 분위기를 내고 있다. 분단 역사상 처음으로 공군 수송기가 북한 땅에 들어가 한국의 통일부 장관과 농구선수단을 내려주었고, 북한 선수들이 남한 땅 대전에 내려와 탁구 단일팀을 만들어 국제대회 우승도 했다. 단기간에 꽤 괜찮은 성과를 냈다. 이것만으로도 대단하다. 그렇지만 아직은 전채요리 수준이다. 

 

그래서 남북관계 발전과 경제협력에 속도를 더욱 내자고 한다. 기업들도 앞다퉈 북한경제팀을 새로 꾸리기 시작했고, 로펌과 금융권도 전에 없는 움직임으로 전문 인력을 신규 채용하고 북한팀을 따로 꾸리며 준비에 들어갔다. 예전에 하던 일들과 자료는 이미 있으니 금방 틀을 갖추어가고 있다. 첫술은 떴으니 다음 술을 계속 떠야 하고 먹을 요리도 계속 만들어내야 한다. 하지만 구조적인 문제는 아직 남아 있다. 

 

여전히 북·미는 힘겹게 불판을 앞에 놓고 불 조절 중이고, 국제사회의 대북제재는 아직도 엄연한 현실이다. 제재 대상인 북한산 석탄을 실은 선박이 한국 영해를 운항했다고 시끌벅적하고, 서해평화수역 이야기를 하지만 북한 수산물이나 조업권을 거래할 수 없는 대북제재의 현실 속에서 남북공동어로는 아직 요원한 일이다. 

 

그렇다고 이 답답한 현실을 벗어나자며 선의를 바탕으로 제재를 우선 완화 혹은 중지하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성급한 제재 완화는 북한에 잘못된 신호를 보내거나 백지수표를 주는 일과 다르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유엔안보리 제재결의안에 따르면, 북한의 결의 준수 정도에 비추어 제재 완화나 중지를 논할 수는 있다. 하지만 이것도 어디까지나 북한이 제재결의안 내용을 성실히 준수한다는 걸 전제로 한다.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이 7월말 기준으로 235일 이상 북한의 도발이 없다며 이를 ‘봄에 핀 튤립’ 같은 상황으로 빗대는 등 북한의 움직임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기는 하다. 하지만 이것은 그동안 도발이 없었다는 것이지 국제사회가 납득할 만한 비핵화 조치가 이뤄졌다는 평가는 아니다. 아직도 전 세계는 의문과 우려의 눈으로 북·미 정상회담의 후속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이런 와중에 7월20일 북한 노동신문은 한국 정부의 한반도 운전자론에 대해 “훈시질이다” “재판관이나 된 듯이 입을 놀려댄다”며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로 비난했다. 아직도 불판은 데워지고 있는 중이고 갈 길이 멀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이다. 그래도 중요한 것은 데울 불판이 아직 그대로 있다는 점이다. 

 

다시 시계를 돌려보자. 북·미 정상이 새로운 불판 앞에 마주 앉는데 한국 정상은 큰 몫을 했다. 만나지 말자던 두 사람을 한 테이블에 앉도록 ‘중개’했다. 중개는 ‘제3자로서 당사자 사이에 서서 주선’하는 것을 의미하는데, 한국은 북·미 간에 중개자 역할을 톡톡히 했다. 언론에서는 당시 ‘중재외교’라는 표현을 많이 썼지만 중재는 엄밀히 말해 법원처럼 권위 있는 제3자가 당사자 사이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을 의미한다. 아직까지 한국의 역할은 엄밀한 의미에서 중재자라기보다는 중개자에 가깝다. 

 

중개자가 활동 폭을 넓히면 자연스럽게 중재자 역할도 할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분명한 점은 한국은 앞으로 중개자나 중재자를 넘어서야 하는 운명을 감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사자로서 한반도의 새로운 불판 위에서 요리를 하고 잔칫상을 차려 먹어야 한다. 이를 위해 잰걸음을 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한때 기대감으로 남북경협 관련 학술회의장이 아파트 청약 현장처럼 붐빈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다. 

 

 

철저한 준비와 지속성이 관건

 

기억해야 할 점은 철저한 준비와 지속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 개인이 아파트를 분양받을 때도 장기간의 대출 상환 계획을 마련해야 하고, 경제적 능력과 주택 마련 의지가 충분해야 한다. 하물며 새로운 한반도의 불판 위에서, 새로운 평화와 번영의 집을 짓고, 새로운 잔칫상을 차려 전 세계를 대상으로 집들이를 하겠다는 일이다. 하루아침에 될 일이 아니라는 뜻이다. 다시 신발끈 동여매고 심호흡해야 할 때다. 오늘은 잰걸음 같지만 길게 보고 큰 걸음으로 멈추지 말고 가야 한다. ‘훈시질’이니 ‘재판관’ 소리를 들어도 그건 상대가 진짜 신경 쓰이니까 하는 얘기다. 불판 데울 때부터 불 지피고 할 일을 하다 보면 잔칫상의 주인으로 충분히 앉아 먹고 마실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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