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도 몰랐지만 누구나 알게 될 뉴스 하나
  • 이철재 미국변호사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7.0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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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 변호사가 보는 재밌는 미국] 대법관 안소니 케네디의 사임과 그 의미

 

대한민국 축구 대표팀이 1%의 기적 같은 독일전 승리를 거두고 온 나라가 흥분해 있던 지난 주, 어느 신문에는 아주 작게 올랐다 사라지고, 어느 신문에는 아예 나오지도 않은 외신이 하나 있었다. 미국 연방 대법원의 안소니 케네디(Anthony Kennedy) 대법관이 은퇴를 선언했다는 것이다. 

 

미국의 대법원은 9명의 대법관으로 이뤄져 있다. 이들은 대통령이 지명하고 상원의 인준을 거쳐 선서를 하면 정년이 따로 없다. 그래서 어느 대법관 하나가 사임을 하겠다고 하면 온 미국이 들썩거리며 다음 대법관이 누가 될까, 다음 대법관이 새로 들어와 어떤 새로운 결정들이 나올까하는 수군거림으로 온라인, 케이블, 지상파 뉴스들이 모두 신경을 곤두세운다.  

 

미국 연방대법원에서 '균형추' 역할을 해 온 앤서니 케네디 대법관(81)은 6월27일(현지시간) 성명에서 다음 달 31일부로 대법관에서 퇴임한다고 밝혔다. 케네디 연방대법관은 중도 보수성향이지만 이념적으로 갈리는 논쟁적 사안에서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해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은 강경 보수성향 인사를 후임으로 지명할 것으로 예상돼, 연방대법원의 보수색채가 더욱 짙어질 것으로 보인다. 사진은 지난해 4월 백악관에서 열린 닐 고서치 연방대법관 취임식에 참석한 케네디 연방대법관(오른쪽)과 트럼프 대통령. ⓒ 연합뉴스



미국 전역을 긴장시키는 ‘차기 대법관 후보’

 

1987년 대법관 루이스 파웰(Lewis F. Powell Jr.)이 사임하면서 보수 정당인 공화당 출신 레이건 대통령이 임명한 케네디는 분명 보수 성향이다. 단 보수와 진보가 4대4로 팽팽히 맞선 현 대법원 법관 중에서 그는 이데올로기적으로 중심에 있다. 즉 케네디가 어느 쪽에 찬성표를 던지느냐에 따라 대법원의 결정이 방향을 잡게 된다. 스윙보트란 뜻이다. 그래서 그의 사임은 더욱 큰 관심을 끈다. 

 

미국의 일이라 우리와는 별 상관이 없을 것 같다. 하지만 미국 사법부의 영향력이 워낙 커 미국 국민은 물론 크게, 작게, 직·간접으로 미국에 사는 현지 교민들, 현지에 진출한 한국 기업들, 나아가 대한민국과 전 세계에 영향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서구의 법체계는 크게 영미법인 관습법(Common Law)과 유럽 대륙의 성문법(Civil Law)으로 나눈다. 관습법의 영어 이름 ‘Common Law’는 공통된 법이란 뜻이다. 이 이름이 생기게 된 경위는 멀리 정복자 윌리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관습법 국가지만 성문화되고 있는 미국

 

1066년 윌리엄이 영국을 정복했을 때 영국에는 각 부락마다 각자의 규칙과 관습이 있었다. 윌리엄은 법을 통일해야겠다고 생각해 왕의 법정(King’s Court)에서 진행된 모든 재판의 기록을 한 곳에 모았다. 그리하여 12세기경에는 이렇게 모인 지난날의 판례들이 자연스레 전 영국에 ‘공통적으로’ 적용되는 법이 되었고 지난 재판의 판례에 따라 판결을 내린다는 선례구속성(Stare Decisis)의 원칙이 확립되었다. 

 

이에 반해 프랑스의 나폴레옹 법전(Napoleonic Code) 등 성문법은 일어날 수 있는 모든 경우의 법적 분쟁을 명확히 성문화 한다. 또 많은 경우 이에 해당하는 벌, 벌금, 보상, 배상까지도 정해놓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성문법의 취지가 ‘법은 모든 이가 확실히 이해할 수 있도록 명확해야 한다’는 것이라면, 판례들을 모아 생겨난 관습법은 ‘법이란 진공관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각 사례들의 독특한 진상(Fact)과 그 시대의 사회관습, 문화 등을 모두 고려해 판결을 내려야 한다’는 정신을 담고 있다. 이렇듯 해석의 여지가 많은 관계로 관습법 판사들은 상당한 권한 혹은 재량권(Discretion)을 갖고 있다. 

 

미국의 경우 대표적인 관습법 국가이지만 연방법의 경우 그들의 헌법을 비롯해 많은 법이 성문화되어 법전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 법전 속의 많은 조문들이 실은 판사들, 특히 미국 연방 대법원 대법관들의 결정에 의해 생겨난 판례를 조문화한 것들이다. 

 

각 주의 법으로 넘어가면 각 주가 고유 영역 안에서 각자의 법을 갖고 있고 그들의 법들도 대부분 성문화 되었다. 50개 주 가운데 49개 주가 관습법 제도를 채택하긴 했지만, 연방법의 경우처럼 관습법을 조문화 하면서 성문화하기 시작했다. 프랑스령이었던 루이지애나 주만이 민법에 있어 프랑스, 스페인, 고대 로마의 영향을 받은 성문법 제도를 택한다.

 

미국엔 우리나라에 있는 헌법재판소가 없다. 왜냐하면 연방 지방법원의 판사가 국회를 통과한 법령에 대해 위헌 판결을 내리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결정은 고등순회법원(Circuit Court)으로 올라가 판사 3명, 경우에 따라 6명에 의해 재심을 받는다. 이후 다시 대법원으로 올라간 판례 중 매년 100여건 정도가 실제로 대법관들의 판결을 받는다.  

 


연방법원의 힘…사회 전체를 바꿔놓기도

 

미국의 판사들이 하는 일은 법률의 위헌 여부를 따지는 것뿐만 아니라, 위헌 여부가 관건이 아닌 법률을 해석하여 판결을 내리기도 한다. 이 해석이 또 하나의 판례가 되어 법령으로 만들어지기도 한다. 하급 법원은 상급 법원의 판례를 거스를 수 없다. 하지만 상급 법원은 하급 법원의 판례를 뒤집을 수 있고, 때로 자신들의 판례를 뒤집기도 한다. 

 

미국 연방 법원이 스스로 세운 판례를 깨고 새로운 결정을 내릴 때는 미국 전체의 톱뉴스로 보도된다. 그 결정에 따라 사회의 법질서가 완전히 바뀌고, 새로운 법이 그 결정을 뒷받침하기 위해 혹은 그 결정에 맞서기위해 국회를 통과해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 예로는 1954년 공립학교의 인종 분리 정책을 위헌으로 결정한 브라운 판례(Brown v. Board of Education), 여성 낙태의 권리를 인정한 로우 판례(Roe v. Wade), 흑인과 백인의 결혼을 금지하는 것을 위헌으로 판정한 1967년의 러빙 판례(Loving v. Virginia) 등 이루 헤아릴 수 없이 많다.

 

지금은 은퇴한 미국 최초의 여성 대법관 샌드라 데이 오코너(Sandra Day O’Connor)는 ‘법관들이 국회의 영역인 법률 제정(Legislating)의 영역까지 침범하는 것은 아니냐’는 질문에, “우리는 관습법 판사들이에요. 당연히 법을 만들죠(We are common-law judges. Of course, we are legislating.)”라고 대답했다. 그 정도로 미국에서 판사, 특히 대법관이 법률에 대해 갖는 권한은 막강하다.

 

오코너가 은퇴한 뒤 스윙보트의 자리를 물려받은 케네디는 오코노보다 더 보수 성향에 가깝다. 하지만 동성애자 권리, 여성들의 낙태 권리, 대학 입학 사정에서 소수민족에게 가산점을 주는 차별 철폐 조처(Affirmative Action)등에선 번번이 진보 성향의 법관 4명과 입장을 같이 해왔다. 

 

동성 간의 성행위를 불법으로 규정한 애틀랜타 주법이 합헌이라고 결론 내린 1986년의 바워즈 판례(Bowers v. Hardwick)를 뒤집은 2003년의 로렌스 판례(Lawrence v. Texas)를 시작으로, 2013년 일명 도마(DOMA)라 불리던 결혼 수호 법(Defense of Marriage Act)을 위헌으로 규정한 판례(United States v. Windsor), 2015년 동성결혼을 인정하고 동성 커플이 결혼할 수 있는 권리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정의한 오버제펠 판례(Overgefell v. Hodges)에 이르기까지, 케네디가 진보성향의 법관들과 의견을 같이함으로써 5:4로 동성결혼이 인정됐다. 1973년 대법원 결정 이후 수없는 도전을 받아온 여성 낙태 권리를 보장한 미 연방 대법원 판례 로우 대 웨이드(Roe v. Wade)도 오코너 은퇴 후 케네디가 그 바통을 이어받아 계속 진보 법관들과 함께해 오늘날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케네디 사임으로 도전받게 될 ‘낙태권리’ 

 

많은 법학자들은 케네디의 사임으로 당장 큰 위협을 받는 건 아마도 여성들의 낙태권리가 될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오히려 동성결혼 문제는 미국 사회가 지난 10년간 순식간에 인식이 바뀌어 이제 더 이상 아무도 별로 상관하지 않고,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 만나 잘 살라는 식으로 사회 분위기가 바뀌어 짧은 시간 안에도 안정적인 법으로 정착했다. 하지만 결정된 지 40년이 넘은 로우 대 웨이드 낙태권리 판례는 아직도 끊임없이 도전을 받고 있다. 

 

대법원이 내린 결정은 오직 대법원만이 뒤집을 수 있고, 케네디가 여태 로우 케이스를 사수한 덕에 살아남았다. 하지만 그가 사임한 뒤 트럼프가 훨씬 더 보수적인 성향의 법관을 임명하고, 공화당이 지배하는 상원이 이를 인준할 경우, 그 앞날을 보장할 수 없게 되었다.

 

여기까지는 미국 내의 일이라고 치부할 수 있다. 그러나 트럼프 대통령과 관련된 사안으로 넘어가면 현재 국제 사회에서 미국의 영향력에 비추어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자신할 수 있는 나라는 별로 없을 것이다. 

 

혹시 앞으로 트럼프가 뮬러 특별검사의 소환명령(subpoena)을 거부할 경우, ‘대통령이 특검의 명령을 거부할 특권이 있느냐’의 문제로 분명 대법원 판결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경우 트럼프가 임명한 대법관들이 어느 쪽에 설 것인가 하는 문제는 큰 관심이다. 

 

1974년 워터게이트 사건 때 미국 대법원은 만장일치의 결정(United States v. Nixon)으로 닉슨 당시 대통령이 갖고 있던 비밀 도청 녹음을 검찰에 제출하라고 명령했다. 또 1997년에는 클린턴 대통령에게 “아무리 재임 중인 대통령이라도 민사 소송에서는 면책권을 가질 수 없다”며 소송을 지연시키지 말라는 취지로 역시 만장일치로(Clinton v. Jones) 결정했다. 



트럼프가 대법관 앞에 서게 된다면?

 

이 두 판례의 공통점은 각각의 판례가 닉슨과 클린턴 모두를 탄핵의 벼랑 끝으로 몰았다는 것이다. 또 다른 공통점은 닉슨과 클린턴이 임명한 대법관이 다른 법관들과 합심하여 자신을 임명한 대통령에게 절대적으로 불리한 결정을 내렸다는 것이다. 

 

결국 닉슨은 하원에서 탄핵되기 직전 사임했다. 클린턴은 탄핵됐으나 상원에서 해임안이 부결돼 대통령직에 복귀하는 등 큰 곤혹을 치렀다. 이 둘은 모두 대법원의 판결로 탄핵 절차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케이스다. 

 

이를 고려하면 앞으로 트럼프가 임명한 법관이 두 명이나 포진한 대법원이 비슷한 상황에 처했을 경우, 진정 국가를 위한 결정을 내릴 수 있을 것인지는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것이 대법원이라면, 아마도 케네디 대법관의 사임이 아무 상관없는 남의 나라의 일이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나 국가는 이 세상에 별로 없을 것이다. 

 

그밖에도 미국에 진출한 우리 기업이 현지에서 다른 기업과 합병을 할 경우, 그 합병이 미국 연방법인 독과점 금지법(Anti-trust)에 저촉돼 대법원에서 판결을 받아야 할 때가 생길 수도 있다. 또 특허 분쟁이나 저작권 분쟁 등 많은 법들이 모두 대법원의 판결을 받을 수 있는 법들이다. 

 

지금은 시장에서 사라진 소니의 베타맥스(Betamax) 비디오 카세트 테이프를 떠올려보자. 1984년 대법원이 소니 판례(Sony v. Universal City Studios Inc.)에서 ‘비디오 테이프로 텔레비전 프로그램을 녹화했다 나중에 시청하는 것은 저작권 침해가 아니다’란 판결을 내리지 않았더라면, 소니의 베타맥스뿐 아니라 VHS, DVR 등 그 누구도 가정용 방송 녹화 장비나 프로그램 등을 미국 내에서 판매할 수 없었을 것이다. 

 


대법관 구성, 미국 내 한국 기업에도 영향

 

이렇듯 대법원 법관의 구성과 정치·철학·​경제 등 수많은 분야에 대한 그들의 법철학과 이데올로기는 미국 국민 뿐 아니라 다른 국가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자신의 TV 리얼리티 쇼인 《어프렌티스》를 진행하듯 7월9일 월요일에 “누구를 새 대법관으로 임명할 것인지 말하겠다”고 1차 예고편을 내보냈다. 이후 매일 조금씩 트위터에 예고편을 새로 올리며 긴장을 고조시키고 있다. 누구를 지명하는지, 그리고 그 지명자가 인준되는지 여부를 우리도 한번 지켜볼 일이다.

 

케네디 법관은 31년간 재직하며 큰 족적을 남겼다. 그의 결정에 동의할 수 없었던 적도 있고, 어떤 때는 큰 감명을 받은 적도 있다. 후자의 경우 중 하나가 ‘오바마 케어’라고 불리는 건강보험법(Affordable Care Act)의 대법원 판례다. 

 

오바마 케어는 처음부터 공화당의 반발이 심한 상태에서 오바마 대통령이 밀어붙이고 당시 상원과 하원을 모두 장악하고 있던 민주당이 협력해 통과한 법이다. 그런 이유로 대법원의 판결을 한번 거쳐야 할 것이라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었고 2012년 드디어 그것이 현실이 됐다. 



법은 진공관이 아닌 ‘사람의 틀’에서 적용돼

 

이 판례(National Federation of Small Business v. Sebellius)에서 케네디 법관은 “오바마 케어는 헌법에 위배된다”고 했다. 하지만 같은 보수 성향의 대법원장 존 로버츠가 진보 성향 법관들과 함께 5:4로 합헌 판결을 내렸다. 

 

3년 뒤 “오바마 케어의 한 부분은 위헌”이라며 다시 대법원에 올라왔을 때는 로버츠 대법원장뿐 아니라 케네디도 함께 합헌에 표를 던졌다. 케네디가 입장을 바꾼 취지는 “3년 전 이미 합헌으로 판결한 법이고, 그 후 3년간 수십만 명이 그 법으로 보험혜택을 받고 생활하고 있는데, 3년 후에 법의 한 부분이 잘못되었다고 그 법을 다 없앨 수는 없으니, 잘못된 부분은 수정해가며 법을 지키는 것이 옳다”는 것이었다. 바로 이것이 오코너가 말한 ‘common-law judge’의 정신이 아닐까 한다. 

 

법은 진공관에서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현실과 사회와 문화와 정치와 경제와 사람의 틀 안에서 적용되는 것이다. 그가 떠난 후 늘 대법원의 중심을 잡던 그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이 많을 것이다.

 

 

이철재 국제변호사 sisa@sisapress.com

 

- 미국 샘휴스턴 주립대학교 사회학 학사

- 미국 포드햄 대학교 사회학 석사

- 미국 시러큐스대학교 법학 박사

- 現 미국 뉴욕주 변호사

- 《나도 바흐를 즐길 수 있을까》 《보통 사람들을 위한 특별한 영어책》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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