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월드컵은 그저 월드컵일 뿐”
  • 이석원 스웨덴 통신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25 14:02
  • 호수 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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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12년 만에 월드컵 본선 진출 “월드컵 특수는 없다”

 

2018 러시아월드컵 F조 두 번째 조별 예선인 대한민국과 스웨덴 경기가 열리던 6월18일. 스톡홀름 시민들이 함께 모여 단체응원전을 펼치던 스톡홀름 최대 축구경기장인 텔레2 아레나(Tele2 Arena). 경기장 안은 온통 노란색 물결이었다.

 

경기가 시작되기 전 가슴에 스웨덴 국기가 새겨진 노란색 응원 티셔츠를 입은 안데르손(35)에겐 축구 응원을 하러온 사람의 들뜸이 없었다. 운동장의 대형 TV 모니터에 스웨덴 국가대표 선수들의 모습이 비칠 때마다 환호하고 박수를 치기도 했지만 그때뿐이었다. 그는 경기 중 간간이 “스베리예(Sverige·스웨덴이라는 뜻의 스웨덴어)”를 외쳤지만 비교적 앉은 자리에서 차분하게 경기를 관람했다.

 

얼굴에 스웨덴 국기 페이스페인팅을 하고 노란색 응원 티셔츠의 아랫단을 짧게 묶어서 시원한 배꼽 티셔츠를 만들어 입은 안나(22)는 함께 온 학교 친구들과 운동장과 객석을 배경으로 셀카 놀이에 푹 빠졌다. 하지만 분위기를 즐기기는 해도 흥분하는 기색은 전혀 없다. 경기 후반전 스웨덴 선수가 한국 선수의 다리를 밟는 파울을 범했을 때 안나는 “저런 나쁜…”하며 한국 선수를 염려하고 자국 선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스톡홀름 북쪽 태비 센트룸(Taby centrum) 앞 광장의 거리 응원전에도 1000여 명의 스웨덴 축구팬들이 모였다. 아이부터 노인들까지 센트룸 측이 제공하는 공짜 음료수며 팝콘, 초콜릿과 사탕을 먹으면서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의 얼굴엔 즐거움이 한껏 넘쳐 보였지만 그렇다고 열띤 흥분의 표정들은 좀처럼 찾아볼 수 없었다. 

 

8살과 10살짜리 아들을 데리고 광장에 나온 헨릭 구스타브손(34)은 “12년 만에 스웨덴이 월드컵 본선에 오른 것이라 잔뜩 기대하고 나왔다”면서 “우리 아이들은 스웨덴이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것을 처음 본다”고 흐뭇해했다. 경기 후반 스웨덴이 페널티킥을 성공시키자 환호하면서도 광장의 유일한 한국인을 보고는 악수를 청하며 “미안하다”고 했다. 

 

6월18일 스톡홀름 북쪽 태비에서 열린 러시아월드컵 한국과 스웨덴전의 거리 응원. 1000여 명의 스웨덴 시민이 광장으로 몰렸다. ⓒ이석원 제공


  

“월드컵 4강 진출해도 광란 없을 것”

 

사실 이번 러시아월드컵 본선에 임하는 스웨덴의 감정은 특별하다. 스웨덴은 축구계의 강호라고 얘기할 수는 없지만 1904년 국제축구연맹(FIFA) 설립 멤버다. 1924년부터 시작한 국내 리그가 9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축구 애호국이다. 1940년대 후반부터 10여 년간은 국제 축구 무대에서 올림픽과 월드컵 상위의 성적을 거두며 전성기를 구가했다. 1948년 런던올림픽 축구 금메달을 비롯해 1950년 브라질월드컵 3위, 1952년 헬싱키올림픽 축구 동메달, 그리고 1958년 스웨덴월드컵 준우승까지.

 

특히 스웨덴이 금메달을 땄던 1948년 런던올림픽은 한국과 특별한 인연이 있다. 당시 사상 첫 올림픽에 출전했던 한국 축구는 1차전에서 세계적인 강호 멕시코를 3대2로 이기는 기적을 만들어냈다. 하지만 그 기적도 잠시, 2차전에서 한국은 0대12라는 굴욕을 겪었다. 한국 축구 역사상 가장 큰 점수 차 패배였고 한국에 그 치욕을 안겨준 나라가 스웨덴이었다. 

 

그것을 발판으로 10년간 스웨덴은 브라질이나 아르헨티나, 독일(당시 서독)이나 프랑스를 능가하는 세계 축구 강국이었다. 그리고 그 성적 덕에 스웨덴은 아직도 FIFA 월드컵 랭킹에서 상위 그룹에 속하기도 한다.

 

물론 그 이후 스웨덴은 유럽의 축구 강호 자리에서 밀려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모두 12회에 걸쳐 월드컵 본선에 진출한 저력이 있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부터 모습을 드러낸 슈퍼스타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의 등장으로 축구 명가 재건을 꾀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즐라탄이 세계 최고의 공격수라는 위상에도 불구하고 월드컵에서는 큰 활약을 보이지 못한 탓에 2006년 독일월드컵을 끝으로 12년간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했다.

 

그랬기 때문에 스웨덴의 이번 러시아월드컵 본선 진출은 축구에 대한 특별한 애정을 과시하는 스웨덴 시민들에겐 큰 기쁨이면서 신나는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스웨덴 내에선 어지간히 월드컵 분위기가 뜨지 않는다. 



월드컵도 ‘라곰’스럽게 즐기는 스웨덴

 

가장 큰 축구경기장인 텔레2 아레나의 월드컵 단체관람은 190크로나(약 2만4000원)의 입장료를 받았다. 그래서인지 아레나 관중석 곳곳은 빈자리가 많았고 오히려 스웨덴 사람들보다 스웨덴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의 입장이 많았다고 한다. 12년 만의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쾌거와 동떨어진 발상이다. 

 

“스웨덴 축구 서포터스 최소 2만 명이 니즈니 노브고로드 스타디움에 집결했다”는 한국 언론의 보도와는 달리, 스웨덴 공영방송 SVT는 “1000여 명의 스웨덴 서포터스만이 러시아행 비행기 표를 끊었다”고 보도했다. 당시 경기장에 있던 스웨덴 응원단 대부분은 러시아에 있는 스웨덴 사람들이었다는 것이다.

 

6월18일 스웨덴 시간 낮 2시에 열린 한국-스웨덴전을 위해 스웨덴에서 회사를 다니는 한국 축구팬 수백 명이 휴가를 쓴 반면, 스웨덴 사람들이 축구 때문에 특별한 휴가를 사용한 일은 거의 없었다는 스웨덴 일간지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Svenska Dagbladet)’의 기사도 있었다. 

 

스웨덴 경기가 열린 당일, 스타디움(Stadium)이나 인터 스포트(Inter Sport) 등 스웨덴의 대표적 스포츠용품 브랜드들이 특별한 이벤트를 마련하기는 했지만, 이른바 월드컵 특수라는 것은 찾아볼 수도 없다. 스웨덴의 민간 경제연구소인 ‘스칸디나비아 이코노믹 유닛’의 페르 브롬크비스트 박사는 “러시아월드컵과 스웨덴 경제는 아무런 연관관계가 없다. 러시아에서 하는 월드컵으로 돈을 번 스웨덴 사람은 누구도 없다”고 얘기할 정도였다.

 

‘쉽게 흥분하지 않고, 어지간한 자극에 둔감하며, 집단의 맹목적인 이해관계에 빠지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 스웨덴 사람들의 품성 때문이라는 게 일반적인 분석이다. 냉소적으로 상황을 보는 스웨덴 사람들은 “스웨덴이 이번 월드컵 4강에 진출한다고 해도, 스웨덴 사람들에게 월드컵은 그저 월드컵일 뿐, 어떤 광란도 없을 것”이라고 말하는 정도라면 이것도 스웨덴 고유의 ‘라곰(lagom·‘많지도 적지도 않은, 딱 적절한’이라는 뜻의 스웨덴어)’이 아닐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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