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화 호잉 “기회 된다면 한국서 계속 뛰고 싶다”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22 15:38
  • 호수 14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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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생생토크] 한화 이글스 ‘복덩이’ 제러드 호잉 “열정적인 관중 앞에서 매일 경기 설레”

 

메이저리그의 백업 선수가, 소속팀과 FA(자유계약선수) 계약을 맺지 못하고 다른 팀과 마이너리그 계약에 사인했던 선수가 지금은 KBO리그에서 펄펄 날고 있다. 팀 성적의 상승과 함께 외국인 선수의 맹활약은 선수단은 물론 팬들까지 들썩이게 만든다. 팬들이 붙인 별명도 ‘복덩이’. 한화 이글스 제러드 호잉 이야기다. 2010년 텍사스 레인저스의 지명을 받은 호잉은 마이너리그 생활을 전전하다 2016~17년 메이저리그 74경기에 출전했다. 당시 성적은 타율 0.220, 1홈런, 12타점. 성적은 뛰어나지 않았지만 빠른 발과 강한 어깨가 돋보였고 이 부분은 한화 이글스와 계약을 맺는 배경으로 작용했다. 계약금과 연봉을 합쳐 70만 달러(7억4000만원)에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호잉. 지금은 ‘한화 이글스’가 아닌 ‘호잉 이글스’로 불릴 만큼 엄청난 인기를 끌어모으는 중이다. 

 

© 이영미 제공


 

 

메이저리그 문턱 넘는 데 6년 걸려

 

기자가 제러드 호잉을 처음 만난 곳은 한국이 아니었다. 2016년 7월, 메이저리그 텍사스 레인저스와 미네소타 트윈스 경기 중 9회초 텍사스 마운드에 오른 호잉을 현장에서 지켜볼 수 있었다. 9점 차로 뒤지고 있는 상황에서 텍사스 제프 배니스터 감독이 불펜투수 대신 외야수 호잉을 마운드에 올린 것이다. 당시 호잉은 4명의 타자들을 상대로 14개의 공을 던졌다. 전광판에는 그의 공이 모두 너클볼로 기록됐다. 구속이 58마일에서 73마일이었기 때문이다. 

 

제러드 호잉은 원래 추신수의 부상 대체 선수로 빅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2016년 5월24일, 추신수의 햄스트링 부상으로 처음 메이저리그 무대에 데뷔했다가 추신수가 복귀하자 마이너리그로 내려갔었다. 7월에 다시 빅리그로 올라왔다가 투수로 미네소타전 마운드에 서게 된 것이다. 

 

호잉은 텍사스 클럽하우스에서 추신수의 라커룸 바로 옆자리를 사용했다. 같은 외야수 포지션인 두 선수는 대화를 많이 나눴고, 추신수는 메이저리그 생활이 낯선 호잉을 따뜻하게 배려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고 KBO리그를 누비고 있는 중이다. 

 

인구 1500여 명의 미국 오하이오주 포트 로라미란 작은 마을에서 태어난 제러드 호잉은 포트 로라미 고등학교를 다니다 차로 3시간 거리의 털리도대학에 입학했다. 대학 3학년 때 호잉은 드래프트 10라운드 전체 316순위로 텍사스 레인저스에 입단했다. 호잉이 마이너리그를 거쳐 메이저리그까지 올라가는 데 6년의 시간이 걸렸다. 그는 이 과정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싱글A를 거쳐 트리플A에 오른 때가 2013년이었다. 메이저리그 문턱이 얼마 남지 않았다고 생각했는데 그 문턱을 넘는 데 3년이란 시간이 걸리더라. 마이너리그에서 함께 야구했던 선수들은 한두 명씩 빅리그로 올라가는데 난 여전히 트리플A에 머물렀다. 그 시간이 굉장히 힘들었다. 2016년 5월, 처음으로 콜업됐을 때는 구름 위를 나는 기분이었다. 트리플A 경기를 앞두고 클럽하우스에서 낮잠을 자다 코칭스태프로부터 ‘너, 메이저리그로 올라가게 됐어’라는 얘길 듣는데 소름이 돋았다. 빅리그에 콜업되던 날, 바로 경기에 출전했다. 정말 잊을 수 없는 순간이었다.”

 

호잉은 2017년 겨울, 중대한 결심을 하게 된다. 1년 전부터 제안이 있었던 KBO리그행을 결정한 것이다. 2017시즌을 마치고 FA가 된 그는 원소속팀인 텍사스에서 자신과 계약할 의사가 없다는 걸 확인하고 에이전트를 통해 한화 이글스와 접촉했다. 호잉은 한화와의 계약이 무산될 것에 대비해 LA 에인절스와 메이저리그 스프링캠프 초청권이 포함된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대신 선수가 해외 진출을 원할 때는 자유롭게 풀어준다는 조항도 잊지 않았다. 결국 호잉은 한화 이글스와 사인했고, 한화는 에인절스에 이적료 1달러(상징적인 의미)를 지급하고 호잉을 영입했다. 

 

“아내와 나는 새로운 문화를 배울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에 감사했다. 아내는 KBO리그에서 뛰고 있는 다른 선수들의 와이프들과 친분을 맺고 그들로부터 한국에 대해 많은 정보들을 입수했다. 한국에서 뛰는 게 설레었던 건 KBO리그의 열정적인 관중들 앞에서 매일 경기에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얻었기 때문이다.”

 

5월22일 대전 한화생명이글스파크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화와 두산의 경기. 9회말 한화 4번타자 호잉이 동점 홈런을 날린 뒤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연합뉴스


 

 

“온전히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돼”

 

한화 이글스 유니폼을 입은 호잉은 시범경기에서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다. 한용덕 감독, 장종훈 코치 모두 호잉의 실망스러운 경기력에 우려를 나타낼 정도였다. 그러나 그는 넥센 히어로즈와의 KBO리그 데뷔전부터 4타수 3안타 2득점을 기록하며 멋진 출발을 알렸다. 


호잉은 처음 경험하는 외국 리그에서 시즌 초반부터 좋은 성적을 낸 비결을 이렇게 말했다. “오키나와 스프링캠프 동안 많은 공부를 했다. 주로 투수들 연구였다. KBO리그 투수들이 어떤 볼 배합으로 나를 상대할지 연습경기를 통해 배워 나갔다. 캠프 때는 주로 변화구 대처 능력을 시험했다. 설령 결과가 좋지 않다고 해도 흔들림이 없었다. 코칭스태프도 그런 나를 믿고 지지해 줬다.”

 

호잉은 당시 부진한 모습으로 인해 일찌감치 교체 대상 후보로 꼽혔다는 얘기에 “한국어를 잘 몰라서 그런 말이 있었는지 잘 몰랐다”면서 “스프링캠프는 보여주는 게 아니라 보완하고 준비하는 시간이다. 좋지 못한 타격감을 보였지만 크게 걱정하진 않았다. 준비만 잘한다면 개막전부터 좋은 모습을 보여줄 거란 자신이 있었다”고 설명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호잉의 미래는 암울했다. 그런 그가 KBO리그에서 대반전을 이뤄낸 비결이 무엇일까. 야구적인 면에서는 KBO리그의 특성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한국 야구장 크기가 메이저리그보다 작은 편이다. 메이저리그에선 담장 앞에서 잡히는 공이 많았는데 그게 KBO리그에선 홈런이 된다. KBO리그 투수들은 95~100마일(152~160km) 이상의 공을 던지지 않는다. 빠른 볼보다 변화구를 던지는 비중이 높다. 그래서 좀 더 참을성을 갖고 공을 봐야 한다. 불펜에서 100마일 이상을 던지는 선수들이 나오지 않는다는 건 타자 입장에선 행운이다.”

 

호잉은 한국에서 야구하는 시간들이 정말 행복하다고 말했다. 미국에서 오랜 시간 동안 스포트라이트를 받지 못했던 그가 한화의 ‘복덩이’로 인기몰이를 하는 상황이 어찌 행복하지 않을 수 있겠나. 

 

“트리플A에 있던 시절을 떠올리면 항상 쫓기는 마음뿐이었다. ‘잘하면 언젠가 올라가겠지’ ‘잘했는데 왜 빅리그에서 부르지 않는 거지?’ ‘어떻게 해야 빅리그로 올라갈 수 있는 걸까’라는 생각에 빠져 지냈었다. 그토록 소원했던 메이저리그에 합류했어도 불안한 마음은 가시지 않았다. 안타나 홈런이 없으면 자꾸 초조해졌다. 기회가 주어졌을 때 그 기회를 살리지 못하면 누군가가 나를 다시 마이너리그로 내려보내고 그 자리를 차지할 것만 같았다. 이런 고민과 갈등은 정신적으로 전쟁을 치르게 만들었다. 그러나 한국에서는 더 이상 초조하거나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많은 팬들의 응원을 들으며 매일 경기에 나갈 수 있고, 오늘 안타를 못 쳤다고 내일 마이너리그로 내려갈 일도 없다. 비로소 온전히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된 것이다.”

 

6월12일 서울 고척스카이돔에서 열린 2018 KBO 프로야구 한화 이글스와 넥센 히어로즈의 경기에서 6회초 1사 3루에서 한화 호잉이 2대2 동점을 만드는 1타점 2루타를 날리고 있다. ⓒ연합뉴스


 

한국 찾은 호잉의 부모

 

호잉은 한국에서 야구를 새로운 시각에서 배우고 있다고 말했다. 타석에 들어서면 여유 있고 차분한 마음을 가질 수 있게 됐으며 삼진을 당하든 홈런을 치든 안타를 치든 걸어 나가든 평정심을 잃지 않으려 노력한다는 말도 덧붙였다. 

 

미국은 원정 경기를 위해 비행기를 타거나 마이너리그라면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해야 한다. 그러나 한국은 거리가 가깝기 때문에 장시간 버스를 타고 이동할 일이 없다. 그 부분이 호잉한테 매력적인 요인으로 꼽혔다. 

 

“트리플A 시절 비행기를 타려면 새벽에 일어나야 한다. 새벽 비행기 타고 이동해서 그날 바로 경기에 나선다. 비용을 절약하기 위해 전날 이동하지 않는 것이다. 그렇게 경기를 치르면 수면 시간이 절대 부족하다. 비행기 이동이 어려운 싱글A나 더블A에서는 8~10시간 정도의 버스 이동이 대부분이다. 한국은 버스를 타도 이동 거리가 짧다. 좌석도 어찌나 넓고 편한지 모른다. 책 한 권 읽으면 이미 목적지에 도착해 있을 정도다. 이동 거리가 짧은 건 선수 체력에 큰 도움이 되는 것 같다.”

 

지난 5월 중순에는 호잉의 부모인 빌 호잉씨와 수 여사가 2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해 아들의 경기를 직접 관전하고 한화 팬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갔다. 호잉의 어머니 수 여사는 기자에게 “제러드가 한국에서 야구하게 됐다고 하니까 지인들이 한국 가면 폭탄 맞을 거라고 말렸다”는 에피소드를 전하며 “남편과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했는데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아름다운 나라”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 아들인 호잉이 야구하면서 행복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에 큰 만족감을 나타냈다. 

 

아버지 빌 호잉씨는 아들이 한국에서 좋은 출발을 했고 기대 이상의 성적을 올리고 있지만 언젠가는 다시 내려갈 수도 있다는 말로 야구의 어려움을 설명했다.

 

“야구는 굉장히 흥미로운 스포츠다. 업 앤 다운이 분명한 종목이다. 지금 잘한다고 해서 크게 기뻐할 것도, 지금 못한다고 크게 슬퍼할 일도 없다. 묵묵히 자신한테 주어진 숙제를 해결하면서 노력을 보탠다면 기대 이상의 결과가 나올 것이다. 아들이 보장된 연봉을 받고 야구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에서 야구하는 걸 보며 가슴이 벅찼다. 바람이 있다면 타석에서 조금 더 여유를 갖고 자신의 스윙을 해 나갔으면 좋겠다. 그래야 좀 더 안정감 있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

 

 

“한국에서 뛰는 게 정말 즐겁다”

 

호잉이 원정 경기차 서울을 찾아 부모와 함께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용산에 있는 전쟁기념관이었다. 작고한 호잉의 할아버지가 6·25 참전용사였다고 한다. 그래서 한국에 온 부모님을 모시고 전쟁기념관을 찾아간 것이다.

 

호잉이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건 단순히 야구를 잘해서만이 아니다. 그는 남다른 인성으로 구단 관계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잘나가는 선수에게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도 그는 ‘프로다움’을 내세우며 거절하지 않고 모두 응하는 편이다. 경기에 지장을 받지 않는 선에서 모두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아무리 비슷한 내용의 인터뷰가 진행돼도 얼굴 한 번 찡그리는 법이 없다. ‘복덩이’란 별명에 ‘젠틀맨’이란 수식어가 덧입혀졌다. 

 

한용덕 감독은 타격은 물론 수비에서 뛰어난 실력을 발휘하는 호잉을 두고 “호잉 같은 외야수가 2명 더 있었으면 좋겠다”는 말로 칭찬을 대신했다. 호잉의 강한 어깨로 인해 주자들은 무리한 주루 플레이를 할 수 없는 상황이다. 한 감독은 “호잉의 수비가 미치는 효과가 매우 크다”면서 “이런 세밀한 변화가 우리 팀이 강해지는 증거”라고 말했다. 

 

지난해까지만 해도 한화의 외야는 수비에 어려움을 겪었다. 중견수 이용규를 제외한 좌우 코너가 불안했고 외야에 공이 떨어지면 상대팀 주자들은 한 베이스를 더 진루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지금은 우익수를 맡고 있는 호잉의 어깨 탓에 마음 놓고 주루 플레이를 하지 못하고 있다. 그는 강한 어깨를 갖게 된 배경으로 어린 시절 뒷마당에서 아버지와 캐치볼을 한 게 도움이 된 것 같다고 말한다. 

 

호잉의 아버지는 “우린 맞벌이 부부라 시간 날 때마다 아들과 캐치볼을 하며 놀았고 배팅케이지에서 함께 운동했다”고 설명했다. 호잉이 야구를 잘한 배경에는 유전적인 요인도 작용한다는 얘기를 덧붙였다.

 

“제러드의 삼촌이 야구를 잘했고, 그 윗세대도 야구를 좋아했다. 유치원에 들어가서는 티볼을 했다. 많은 게임을 하진 않았어도 뒷마당에 만들어 놓은 미니 훈련장이 제러드의 야구에 도움이 됐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제러드에게 야구를 해라, 하지 말라는 말을 해 본 적이 없다. 덕분에 공놀이로 시작했던 야구가 아들의 취미가 됐고 지금은 직업이 됐다. 우린 항상 그랬듯이 뒤에서 응원만 해 줄 뿐이다. 결정은 매번 아들의 몫이었다.”

 

호잉은 한화의 4번 타자다. 그러나 내야 땅볼이 나와도, 투수 땅볼에도 그는 1루 베이스를 향해 전력 질주한다. 그 이유를 묻자 “내 다리를 믿고 땅볼이 나와도 최선을 다해 뛰다 보면 가끔은 행운이 찾아오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호잉의 만점 활약에 한화 팬들은 호잉의 여권을 빼앗아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한화와의 계약이 1년이기 때문이다. 그는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한국에서 계속 뛰고 싶다. 한국에서 뛰는 게 정말 즐겁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호잉의 가치가 높아질수록 NC 다이노스에서 뛰다가 밀워키 브루어스에 입단한 에릭 테임즈가 연상될 수밖에 없다. 2018시즌 이후 메이저리그에서 호잉에게 입단 제안을 한다면 그걸 거절하긴 매우 어렵기 때문이다. 6월19일 현재, 제러드 호잉은 타율 0.339, 17홈런, 86안타, 59타점, 출루율 0.399, OPS 1.045를 기록 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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