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법정의 훼손한 양승태 前대법원장의 두 얼굴
  • 권상집 동국대 경영학부 교수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6.05 0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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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법부를 행정부의 시녀로 만든 장본인…법 앞의 평등 스스로 거부한 사법부 수장

2017년 9월 대법원장 임기를 마치는 퇴임식에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사법체계의 근간이 흔들리거나 정치세력 등의 부당한 영향력이 판결에 침투하면 우리가 어렵게 이뤄낸 사법부 독립은 무너지고 민주주의는 결국 후퇴하고 말 것”이라는 날선 경고를 우리 사회에 보냈다. 헌법의 기본 원칙이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점을 다시 한 번 언급한 것이다. 교과서에 기본처럼 나오는 3권 분립을 스스로 무너뜨리고 사법부를 행정부의 시녀로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에 대한 핑계를 외부세력의 불순한 의도라고 치부하는 그가 대법원장이었다는 점이 부끄러울 뿐이다.

 

법원은 우리 사회 최후의 보루이다. 미국 및 유럽 등에서 법원이 국민의 신뢰를 받는 이유는 억울한 사람이 없도록 모든 사람이 법 앞에 평등하다는 원리를 법관들이 몸소 실천하고 있기 때문이다. 과거 프랑스는 나치 시절 유태인 처형을 진행한 이유로 재판에 오른 폴 투비에를 대상으로 대통령의 특별 사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뒤집고 유죄를 선고, 그 아무리 막강한 권력의 인치(人治)도 모든 국민이 평등하게 받아야 할 법치(法治) 앞에서는 결코 예외가 될 수 없음을 천명했다. 대통령의 권력도 법원의 엄중한 판결 앞에서는 무력화된 셈이다.

 

법 앞의 평등이라는 단어를 우리는 듣고 또 들었지만 여전히 양승태 전 대법원장 같은 권력지향적 인사들은 법을 자신의 성공 수단 또는 도구로 삼고 있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사법농단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에 비견될 정도로 심각한 이유는 우리 사회에서 약자들이 마지막으로 찾아야 할 보루인 법원이 강자들의 입장에서 그리고 편향된 시각으로 우리 사회를 구석구석 조망하고 권력자들의 입맛에 맞게 판결을 조종해왔기 때문이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하물며 그 어떤 것과도 맞바꿀 수 없는 판결을 거래 대상으로 격하시키기까지 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이 6월1일 오후 경기도 성남시 자택 인근에서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관련 입장을 발표하고 있다. 임준선 기자

 

사법부와 행정부가 견제와 균형을 추구해야 한다는 점은 웬만한 학생들도 잘 알고 있다. 미국 및 유럽의 사법부가 확실하게 행정부에 대해 건설적인 견제를 취하고 있다는 점 역시 수많은 사례들을 통해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그러나 양승태 전 대법원장 시절, 상고법원 도입 추진 과정에서 법원은 박근혜 정부의 눈치를 살피는데 급급했다.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은 박근혜 정부 시절 법원행정처가 상고법원 도입을 위해 자신들의 고유 권한인 판결을 청와대와 협조하며 진행한 사항들이 담긴 문건을 다수 확보했고, 그 내용은 충격적인 것들로 가득했다. 

 

확보된 문건에는 모두 약자들을 철저하게 짓밟은 판결 내용 등이 담겨 있었다. 노동자의 체불임금 요구에 대해 중대한 경영상의 어려움이 발생할 경우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2013년 12월 판결, 쌍용자동차 직원들의 정리해고는 무효라는 원심을 최종에서 깬 2014년 11월 판결 등이 문건에 기록돼 있었다. 모두 기득권, 가진 자들의 입장에서 약자를 우롱하고 농락한 판결들이었다. 아울러, 2015년 2월 원심을 깨고 KTX 승무원이 철도공사의 근로자가 아니라고 본 판결 역시 박근혜 정부와 협력하기 위해 대법원이 판결을 뒤바꾼 최악의 사례로 꼽힌다. 

 

항간에 퍼지고 있는 농담이 하나 있다. 유럽에서 우리가 흔히 볼 수 있는 정의의 여신상은 공정한 재판을 위해 법관의 주관적인 편견을 버리겠다는 의미로 여신상의 눈을 헝겊으로 가리고 있다. 그리고 한 손에는 칼 또는 법전을 들고 있고 다른 한 손에는 그 누구에게도 치우침 없이 판결하겠다는 의미로 저울을 들고 있다. 그 누구의 편에 서지도 않고 오로지 법을 통해 최대한 공정하고 정의롭게 판결하겠다는 법관들의 의지와 각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미국 및 유럽 정치세력도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이 바로 정의의 영역, 법원이라는 것이 그들의 시각이다.

 

반면, 우리나라 대법원 중앙 현관에 위치한 정의의 여신상은 두꺼운 서적과 저울을 들고 있는 점은 유럽과 큰 차이가 없지만 우리의 정의의 여신상만 유독 눈을 뜨고 있는 점이 이색적이다. 판결을 내리는 법조인들은 하나같이 “최대한 양쪽 입장의 사정을 세심히 살피고 저울에 달아서 공정하게 판결하기 위해 눈을 뜬 것”이라고 항변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여신상의 모습 자체만으로도 대한민국 법원 판결이 얼마나 정의와 거리가 멀었는지 엿볼 수 있다. 눈을 감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과 눈을 뜨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 놀라운 대조이면서 동시에 씁쓸한 대목이다. 

 

눈을 뜨고 있는 정의의 여신상을 통해 몸소 불균형적인 판결을 실천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 체제 하에서 해당 사건의 피해자들은 말할 수 없는 고통과 충격을 겪어야 했다. 비정규직 보호라는 말은 헛된 메아리로 들렸고 사법부 역시 행정부의 일개 부처만도 못한 굴욕적인 노릇을 하며 종속기관임을 스스로 인정했다. 박근혜 정부 시절 우병우 청와대 민정수석은 심지어 법원에 전화를 걸어 일부 사건에 대해 “청와대에 유리한 쪽으로 또는 권력에 유리한 쪽으로 판결해 달라”고 청탁하기도 했다. 법원의 독립성이 얼마나 훼손되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법행정권 남용과 재판 거래 파문 등으로 코너에 몰리자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자신의 자택 앞에서 “재판에 간섭한 적도 없고 재판을 거래 대상 등 흥정거리로 삼은 적이 결코 없다”고 항변했다. 상고법원에 반대하거나 재판에서 특정한 성향을 보였던 법관에게 불이익을 준 적도 없다고 얘기한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자신을 향한 조사단의 칼날에는 “더 이상 밝혀진 게 없는데 제가 굳이 조사받아야 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쾌함을 드러냈다. 성역화의 대상인 자신은 결코 조사받을 수 없다는 점을 누차 강조하며 유체이탈 화법으로 일관한 인터뷰는 최악이었다. 

 

철학자 칸트는 ‘정언명령’이라는 법칙을 통해 자신이 내세우는 기준과 법칙은 보편적으로 타당해야 하고 나와 타인을 포함 모두를 수단이나 도구가 아닌 목적으로 다뤄야 정의를 확립할 수 있다고 얘기했다. 지도자의 발언이 누가 봐도 보편적으로 타당하지 못할 때 그리고 자신이나 특정 세력을 위해 다른 사람들을 수단이나 도구로 간주할 때 정의는 지켜질 수 없음을 칸트는 경고했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의 그간 발언은 보편적으로 타당하지 못했고 대법원장 시절 그는 철저하게 약자를 수단이나 도구로 간주했다. 그는 정의(Justice)와 가장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미국에서는 대법원장을 ‘Chief Justice’라고 부르고 대법관을 ‘Associate Justice’라고 부른다. 우리말로 풀이하면 대법원장과 대법관 모두 스스로 정의라고 서로를 부르는 셈이다. “법을 실행할 경우에는 신분이 귀하다고 해서 아첨하지 않아야 하고 신분이 높은 자라 할지라도 법을 위반할 때에는 즉시 이에 제재를 가해야 한다.” 만인이 법 앞에 평등해야 한다는 점을 엄격하게 강조한 ‘한비자’의 내용이다. 동양적 사상인 법 앞의 평등을 미국 및 유럽에서 적극적으로 지켜나가고 있는데 비해 대한민국 대법원이 스스로 이를 거부하는 모습은 아이러니하고 안타깝다. 

 

2011년 2월25일 양승태 대법관은 자신의 법관 퇴임식을 기념하기 위해 법률신문과 진행한 마지막 인터뷰에서 “대한민국 대법원장은 우리나라 양심을 대표하는 사람이기에 존경 받을 수 있는 인격과 포용력을 바탕으로 굳은 의지를 갖고 있어야 한다”며 대법원장의 덕목을 제시했다. 차기 대법원장 후보에 오르고 있다는 기자의 질문에 대해 양승태 대법관은 “저는 자질이나 능력에서 그만한 재목이 못 된다고 생각합니다”라고 밝혔다. 당시 그의 말을 세심히 들었어야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MB는 7년 전, 차기 대법원장으로 양승태 대법관을 지명했고 결국 2018년 사법부의 정의가 심각하게 훼손되는 참사가 벌어졌다. 자질이나 능력에서 역시 그는 재목이 못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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