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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 대결장"이 결정타…77일 춘몽, 악마는 '말'에 있었다

되돌아보는 북·미 관계…짧은 밀월 뒤 다시 험악한 말싸움

오종탁 기자 ㅣ amos@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Fri) 17:3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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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과의 평화에 대한 희망은 여전히 있지만, 그렇게 하려면 북한은 수사(말)를 바꿀 필요가 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5월24일(현지시간) 북·미 정상회담을 전격 취소한 뒤 나온 백악관 고위 관계자의 말이다. 그간 북·미 관계는 말싸움의 향연이었다. 굳이 경중을 따지자면 북한이 더 원색적이었으나, 미국의 발언도 만만찮았다. 서로 간 말싸움 속 균열은 점점 더 커져갔다. 급기야 북한이 "핵대 핵 대결장"을 운운하며 위협하면서 북·미의 77일 공든 탑은 와르르 무너졌다. 비핵화 방식 등 '디테일'에 세간의 이목이 쏠린 사이 '말'이란 악마가 상황을 빨리 종료시켜버린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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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핵화 기대감 속 서로 칭찬했던 북·미


대화 국면 초반 북한과 미국의 말은 한껏 부드러웠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지난 3월8일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비핵화와 회담 의사를 수락했다. 이어 복심인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부 장관(당시 내정자)이 3월31일~4월1일 방북해 김 위원장을 만나고 오면서부터 낙관적인 반응을 쏟아냈다. 이 사실이 언론 보도로 뒤늦게 알려진 지난 4월17일을 전후해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의 세계적 성공" "좋은 일들이 일어날 것" "회담이 아주 멋질 것"이라며 좋아했다. 김 위원장도 폼페이오 장관을 만난 뒤 "내 배짱과 이렇게 맞는 사람은 처음"이라며 기뻐했다고 일본 아사히신문이 보도했다. 

 

당시 김 위원장은 폼페이오 장관에게 비핵화 의향을 솔직하고 확실하게 전한 것으로 알려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어 4월24일 김 위원장에 대해 "매우 많이 열려 있고 훌륭하다"고 호평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용한 '훌륭한'(honorable)이란 말은 상대에 대한 존경, 예우를 담은 표현이다. 통상 '명예롭다'는 의미를 내포한 극찬의 의미로 쓰인다. 말 그대로 상전벽해다. 북·미 정상이 그 이전인 올해 초까지만 해도 폭언을 주고 받으며 으르렁댔기 때문이다.

 

금방이라도 대격변이 일어날 것 같던 북한 비핵화 문제는 북·미 정상회담 일정과 장소 발표가 늦어지면서 삐걱대는 모습을 보였다. 비핵화 방식을 두고 양측 간 의견 충돌이 생긴 게 아니냐는 의혹이 커졌다. 그 사이 김 위원장이 5월7~8일 두 번째로 방중해 '단계적·동시적 비핵화' 방식을 재확인하자 미국 정부가 불쾌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고조되던 불안감은 폼페이오 장관의 2차 방북(5월 8~9일)으로 다소 누그러졌다. 트럼프 대통령은 5월10일 회담 날짜와 장소를 6월12일 싱가포르로 발표했다. 이틀 뒤 북한이 풍계리 핵실험장을 폐기하겠다고 밝히자 트럼프 대통령은 "매우 똑똑하고 정중한 몸짓"이라며 칭찬했다.

 

 

존 볼턴-김계관 말싸움 속 신뢰 '와르르' 

 

분위기는 하루 만에 또 반전됐다. 5월13일 존 볼턴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언론 인터뷰에서 북한 핵무기를 폐기해 미국으로 옮기고 우라늄 농축과 플루토늄 재처리 능력까지 제거하겠다고 말한 데 대해 북한은 북·미 정상회담 무산 가능성을 처음 거론했다. 북한은 16일 김계관 외무성 제1부상 명의로 발표한 담화문을 통해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가 조·미(북·미) 관계 개선을 위한 진정성을 가지고 나오는 경우 우리의 응당한 호응을 받게 되겠지만, 우리를 구석으로 몰고 가 일방적인 핵 포기만을 강요하려 든다면 다가오는 수뇌회담에 응하겠는가를 재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밝혔다. 그러면서 "만일 트럼프 대통령이 전임자들의 전철을 답습한다면 이전 대통령들이 이룩하지 못한 최상의 성과물을 내려던 초심과는 정반대로 역대 대통령들보다 더 무참하게 실패한 대통령으로 남게 될 것"이라며 트럼프 대통령의 속을 긁었다. 한·미 연합공중훈련을 문제 삼아 예정된 남북 고위급 회담도 전격 취소했다. 

 

북한과 자주 대화했던 한국 정부에겐 저런 몽니가 익숙하다. 북한이 진심을 숨기고 에둘러 표현하는 것임을 알아채고 별다른 대응을 하지 않았다. 노무현 정부 때 국무위원(보건복지부 장관)이었던 유시민 작가는 24일 JTBC 《썰전》에 출연해 "(남북 고위급 회담 취소 등은) 북한이 북·미 정상회담 사전 협상 난항에 따른 불만을 작은 현상적 문제로 표현한 것"이라며 "중재자 역할을 해온 문재인 대통령을 향해 '트럼프 대통령에게 문제 제기 했으니 잘 정리해 달라'는 메시지를 보냈다"고 분석했다. 

 

반면 미국, 특히 트럼프 대통령의 입장은 완전히 다르다. 사상 첫 북·미 정상회담일 뿐더러 '협상의 귀재' '냉혈한'으로 통하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내 우려를 무릅쓰고 어렵게 도전한 과제다. 북한이 정상회담 무산을 들먹인 이 때 이미 미국의 대북 신뢰도는 급감한 것으로 보인다. 미국 의회에서는 야당인 민주당을 중심으로 북·미 정상회담 회의론이 거세졌다. 북한은 미국에 판을 엎을 명분을 계속 만들어줬다. 당초 북·미 양측은 지난주에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 접촉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북한은 아무 말도 없이 대화 테이블에 나오지 않았다고 미국은 전했다. 이와 관련해 북·미 정상회담 취소 직후 백악관 고위 관계자는 "북한에 수많은 연락을 시도했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면서 "이 같은 대화 중단은 심각한 신뢰 부족을 암시한다"고 강조했다.    

 

 

北 "핵 대결장" 담화 결정타…신뢰 한계 여실히 드러나 

 

결국 트럼프 대통령은 5월17일엔 북한에 최후통첩성 경고를 던졌다. 우선 회담장에 나와 비핵화에 합의하면 김정은 정권의 '안전'을 보장하고 북한을 부유하게 해주겠다고 약속했다. 회담을 거부할 경우 리비아를 초토화했던 '리비아 모델'을 북한에 적용하겠다고 경고했다. 더 나아가 마이크 펜스 미국 부통령은 5월22일 폭스뉴스 라디오 인터뷰에서 "김정은이 트럼프 대통령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심각한 실수가 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미국의 정책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고 (지금까지 북한에) 어떠한 양보도 하지 않았다"며 "우리는 모든 옵션을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전방위 외교적 압박을 계속 가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는 전날에는 "만약 김정은이 합의를 하지 않는다면 이번 사안은 리비아 모델이 끝난 것처럼 끝나고 말 것"이라고 했다. 펜스 부통령 입을 빌렸을 뿐 트럼프 대통령의 평소 성향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표현이다. 김 위원장에 대한 호칭도 생략한 채 북한에 노골적으로 분노를 표출했다. 

 

파국이 눈 앞에 닥쳐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최후통첩에 무반응이던 북한은 펜스 부통령 발언엔 참지 않았다. 북한 외무성에서 대미 외교를 담당하는 최선희 부상은 24일 "미국이 우리의 선의를 모독하고 계속 불법무도하게 나오는 경우 나는 조·미 수뇌회담을 재고려할 데 대한 문제를 최고지도부에 제기할 것"이라며 "우리를 회담장에서 만나겠는지 아니면 핵 대 핵의 대결장에서 만나겠는지는 전적으로 미국의 결심과 처신 여하에 달려 있다"고 비난했다. 펜스 부통령을 겨냥한 수사에선 고삐가 풀려버렸다. '횡설수설' '무지몽매한 소리' '정치적으로 아둔한 얼뜨기' 등 거친 말은 북·미 사이를 갈라놓는 결정타가 됐다. 

 

백악관 관계자는 로이터 통신에 "펜스 부통령에 대한 북한의 반응이 '인내의 한계'였으며 정상회담을 취소하도록 했다"면서 "북한이 기꺼이 통과하고자 한다면 여전히 열려 있는 뒷문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최소한 그들의 수사 방식을 바꾸는 것과 관련 있다"고 밝혔다. 익명을 요구한 한 대북 전문가는 "북·미 모두 애초에 전무했던 신뢰를 쌓아나갈 생각 없이 수싸움만 해왔다. 깊숙한 대화로 가기도 전 겨우 말 때문에 정상회담이 무산된 것에서 알 수 있다"며 "우리 정부의 경우 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이 만나기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처럼 여겨왔는데, 차라리 억지로 정상회담을 열지 않고 지금 제로 베이스가 된 게 불행 중 다행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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