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서기실’ 베일 벗긴 태영호의 승부수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25 10:48
  • 호수 14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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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김정은 집사’ 김창선 서기실장 주도로 대남 공세

 

훈풍 불던 남북관계에 빨간불이 켜진 건 5월16일 북한이 관영 조선중앙통신을 통해 이날 오전 판문점에서 열릴 예정이던 남북 고위급회담을 일방적으로 취소하겠다고 통보하면서다. 4·27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합의의 열기가 한창 달아오르던 시점에 나온 북한의 이런 발표는 뜻밖으로 받아들여졌다. 북한은 회담 파기의 이유로 한·미 연합 공중훈련인 ‘맥스선더(Max Thunder)’를 앞세웠다.

 

하지만 이 훈련은 이미 5월11일부터 시작된 상태였다. 북한 당국도 이에 대해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아왔다. 더욱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특사 방북과 정상회담 석상에서 한·미 훈련을 용인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혔다는 청와대의 발표가 있던 터라 남북회담의 판을 깰 진짜 요인이라 보기엔 설득력이 떨어졌다.

 

2015년 5월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형인 김정철이 런던 에릭 클랩튼 공연장을 방문했을 당시 포착된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오른쪽) © 뉴시스


 

北, 태 前 공사 국회 강연 트집 잡고 나서

 

북한의 대남 비난 보도는 매우 긴급한 의사결정 과정을 거쳐 나온 것으로 보인다는 게 우리 정부 당국의 판단이다. 이례적으로 새벽 3시쯤 ‘조선중앙통신사 보도’라는 형태로 공개됐다. 노동신문에 싣거나 오전 6~7시쯤 관영 라디오를 통해 보도할 수 있는데도 굳이 심야시간을 선택했다는 건 그만큼 급박한 입장표명이나 대응이 필요했다는 얘기가 된다. 익명을 요구한 대북 정보 관계자는 “북한이 남북 정상회담 이후 화해 기류까지 거슬러가며 불만을 토로한 배경에는 태영호 전 영국 주재 북한공사의 책 발간 문제가 핵심으로 깔려 있다”고 말했다. 북한이 급히 내놓은 비난 보도의 후반부에 등장하는 “천하의 인간쓰레기들까지 국회 마당에 내세워 우리의 최고 존엄과 체제를 헐뜯고 판문점 선언을 비방 중상하는 놀음도 버젓이 감행하게 방치해 놓고 있다”고 비난한 대목이 태영호 전 공사를 지목한 것이란 얘기다. 맥스선더 훈련을 앞세운 건 명분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태 전 공사는 5월14일 오후 국회에서 자신의 저서 《3층 서기실의 암호》 발간에 즈음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이 책에는 태 전 공사가 북한 외무성 근무와 영국 체류 기간 중 직접 체험하거나 전해 들은 북한 권력 내부와 김정은 관련 사안에 대한 비판적 견해가 담겨 있다. 같은 날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강연에서 태 전 공사는 “북·미 정상회담에서 ‘진정한 핵 폐기’에 기초한 합의가 나오는 건 절대 불가능하다”고 강조했다. 또한 완전한 북핵 폐기는 ‘환상’ 또는 ‘허상’이라고 주장했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 공을 들이고 있던 김정은 위원장에게 직격탄을 날린 셈이다. 북한으로선 이런 상황에 대해 불만을 표시하면서 한국 정부와 국정원에 태영호의 행동을 중단시킬 것을 요구한 것이란 얘기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김정은 비서실에 해당하는 서기실 책임자인 김창선 실장이 생존전략 차원에서 대남 비난과 남북 고위급회담 중단이란 조치 쪽으로 분위기가 흐르도록 주도했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태 전 공사가 자신의 책에서 베일에 싸여 있던 김정은 서기실의 내막을 비교적 소상히 공개하고 김정은 일가 관련 사안까지 폭로한 데 대해 김창선 실장이 상당한 위기감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태 전 공사는 “3층 서기실은 중앙당 일꾼(간부)들도 마음대로 접근할 수 없는 완전한 금지구역으로 김정은 부자를 신격화하고 세습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조직”이라고 주장했다. 이 관계자는 “태영호의 책이 파장을 부르기 전에 김창선이 선수를 쳐서 김정은에게 ‘태영호를 앞세운 대북 모략’이란 주장을 펼치고, 이를 빌미로 남북관계 속도까지 조절하는 조치를 취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노회한 김창선이 서기실 특유의 생존술을 구사한 것이란 지적이다.

 

김창선은 김일성 시대부터 서기실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김씨 일가의 집사로 통한다. 김정은 위원장은 물론 여동생 김여정과 부인 리설주 등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며 의전과 경호 문제 등을 총괄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올 4월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때 ‘국무위원회 부장’ 직함으로 참석했고, 앞서 ‘의전·경호·보도’ 분야 실무회담에 북측 단장으로 나오기도 했다. 판문점 의전행사 중에 문재인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을 따라 김여정 노동당 제1부부장과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이 레드카펫 위에 올라가자 김창선이 황급히 다가가 김영철을 끌어내리는 모습이 TV 카메라에 포착되기도 했다. 김여정도 뒤늦게 자신의 잘못을 알아차리고 동선을 바꿨다. 대북 정보 관계자는 “핵심 고위인사뿐 아니라 김씨 일가까지 김창선의 말 한마디, 손짓 하나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장면에서 서기실의 파워를 감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4월27일 판문점에서 열린 제3차 남북 정상회담에서 서기실 책임자인 김창선 실장(맨 왼쪽)이 레드카펫 위를 걸어가는 김영철 통일전선부장의 팔을 잡아당기고 있다. © 판문점 공동 영상 취재단 캡쳐


 

친형 김정철 비롯해 서기실 내막 자세히 소개

 

김정은에게 있어 감추고 싶은 존재인 친형 김정철을 태 전 공사가 구체적으로 드러낸 대목도 북한의 심기를 건드렸을 수 있다. 동생 김정은 때문에 후계 자리에서 밀려난 뒤 은둔 생활을 강요받아온 김정철은 영국의 팝스타 에릭 클랩튼의 광팬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김정철이 2015년 5월 런던에 공연 관람차 체류했고 당시 사전 준비와 통역·안내를 맡은 게 태영호 공사였다. 태 전 공사는 자신의 책에서 김정철이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런던으로 오는 비행기 안에서 음반 판매점만 생각했다”며 심야에 음반을 사겠다고 채근했던 이야기나 미국산 전자기타를 사겠다며 100km 떨어진 지방 도시의 전문 악기 판매점까지 찾아갔던 사연 등을 공개했다. 특히 당시 평양의 서기실을 통해 김정철 런던 방문 준비를 지시받을 때 “수령의 신변 안전과 관련되는 특별사항”이란 암호전문이 온 사실 등도 털어놓았다. 김정철이 차 속에서 팝송 《마이 웨이》를 부르며 눈물을 흘렸고 연민의 정이 느껴졌다는 내용도 담았다. 북한은 일반 주민들이 접하기 어려운 인터넷 대남 선동 매체를 통해 “태영호 문제에 특단의 대책을 세우라”(5월19일 ‘우리민족끼리’)고 우리 정부를 압박하고 있다.

 

하지만 태 전 공사는 그동안 몸담고 있던 국정원 산하 국가안보전략연구원에 사직서를 던졌다. 앞으로 대북 비판의 날을 더욱 세우겠다는 입장이다. 태 전 공사의 책도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 북한 김정은과 그를 보좌하는 서기실의 고민이 더욱 깊어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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