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용비리 ‘폭탄’에 필기시험 부활시킨 은행권
  • 송주영 시사저널e. 기자 (jysong@sisajournal-e.com)
  • 승인 2018.05.21 09:32
  • 호수 1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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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기시험 도입하고 채용 전 과정 외부 공개…'우수 인재'보다 '투명한 채용' 방점

 

국내 은행의 채용제도는 시대상을 반영하며 그동안 숱한 변화를 겪었다. 1980년대에는 임직원 자녀 채용 우대 등을 제도화한 은행도 있을 정도였다. ‘기득권’ ‘특혜’ 등의 단어가 보편화돼 있지 않던 시기였다. 주요 은행들이 저마다 불공정한 채용 과정에 대한 시비에 휘말려 곤욕을 치르고 있는 최근 상황을 감안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게 하는 풍경이 아닐 수 없다. 2000년대 초반에는 블라인드 면접이 유행이었다. 지방대 소외나 스펙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블라인드 면접을 탄생시켰다. 이즈음 필기시험은 점점 사라져갔다.

 

왼쪽부터 손태승 우리은행장, 위성호 신한은행장, 함영주 KEB하나은행장, 허인 KB국민은행장 © 연합뉴스


 

1980년대까지 임직원 자녀에게 채용 특혜

 

채용비리로 큰 홍역을 치르면서 은행의 인재 선발 제도가 또 한 번 큰 변화를 맞고 있다. ‘은행고시’라 불리는 필기시험이 부활했고, 청탁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한 외주화가 새로운 트렌드가 됐다. 뛰어난 인재 선발보다는 누구나 인정할 객관적이고 투명한 채용 방식에 방점이 찍혔다. 채용비리가 가져온 후폭풍이 그만큼 크다는 방증이다.

 

1980년대 일부 은행에서는 임직원 자녀 채용 제도가 있었다. 옛 외환은행의 경우 퇴직 당시 학교를 졸업해 막 취업준비생이 된 자녀가 있는 직원들에 대해 채용 특혜를 줬다. 가장의 역할과 권위를 극대화한 가부장적 문화의 산물이었다. 당시 ‘금융권은 돈을 만지는 직업으로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앞세워 임직원 자녀를 채용하는 것을 정당화하는 분위기도 있었다.

 

현재도 임직원 자녀 가점 제도 등이 몇몇 지방은행에서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임직원 자녀 채용은 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최흥식 전 금융감독원장도 연초 은행권 채용 모범규준안 준비 작업에 맞춰 “없애도록 권고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임직원 자녀라면 어릴 때부터 아버지 직장에 대한 얘기를 듣고 자라 은행에 친숙한 면은 있을 수 있다”며 “그 같은 충성도는 면접 때 평가하면 되지 가산점을 줄 일은 아니다”고 말했다.

 

2000년대 들어 취업준비생들이 스펙 따기에만 몰입한다는 비판과 함께 블라인드 채용이 은행권 채용의 대세로 떠올랐다. 블라인드 채용은 2005년 옛 외환은행이 처음으로 도입했다. 이후 면접관들이 지원자들을 선입견 없이 대할 수 있도록 하는 다양한 방식이 꾸준히 도입됐다. 외환은행을 합병한 KEB하나은행 관계자는 “옛 외환은행에 2005년 열린공채라는 제도가 도입됐다”며 “학력과 연령제한을 파괴한 채용제도”라고 설명했다.

 

이어 블라인드 면접은 국민, 우리, 신한 등이 앞다퉈 도입했다. 우리은행도 2008년 열린 채용으로 서류전형에만 학력과 전공을 기재하도록 했고 면접전형에선 자기소개서 없이 평가하도록 했다. 대신 프레젠테이션 면접과 토론평가 등 면접 방식이 다채로워졌다.

 

열린 채용으로 전향적인 행보를 보이던 은행권의 인력 채용은 과거로 회귀하는 모양새다. 점수라는 확실한 근거가 있는 필기시험을 되살리고, 채용 전 과정을 외부에 공개해 논란을 사전에 차단하는 방향으로 제도를 손질하고 있다. 우리은행의 경우 지난 2007년 필기시험을 폐지한 후 꼭 10년 만에 다시 도입했다. 은행연합회도 채용 모범규준안을 만들면서 필기시험을 규정 초안에 집어넣었다. 은행연합회 관계자는 “필기시험을 모범규준안 초안에 포함시켰다”면서 “6월말 이사회에서 의결되면 은행들이 내규에 반영하는 절차를 진행할 것”이라고 말했다.

 

실제 우리은행은 올해 상반기 채용 예정 인력 200명을 채용하면서 서류전형, 필기시험, 1차 면접, 2차 면접을 실시할 방침이다. 필기시험은 지난 4월 이미 치러져 5월초 합격자를 발표한 상태다. 필기시험은 2교시에 걸쳐 진행됐다. 1교시는 경제·금융·일반상식, 2교시는 언어·수리·추리·시각적 사고 등 적성검사로 진행됐다. 우리은행 관계자는 “필기시험은 경제·금융뿐 아니라 역사·사회·문화 등 다양한 분야에 대해 고루 출제해 기존 은행 시험에서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유형의 문제가 제시돼 은행 취업 문제와 차별화했다”고 설명했다.

 

2017년 10월21일 오후 서울 경기고에서 열린 산업은행 채용 필기시험을 마친 응시생들이 밖으로 나서고 있다. © 연합뉴스


 

채용비리 후폭풍 따른 고육지책 평가

 

신한은행도 9년 만에 필기시험을 부활시켰다. 필기시험은 NCS직업기초능력 평가(75분), 금융 관련 시사상식·경제지식 평가(40분)를 2교시에 나눠 본다. 전국 5개 주요 도시(서울·부산·대구·대전·광주)에서 동시 실시된다. 신한은행 관계자는 “보다 투명하고 공정하게 지원자들에게 기회를 부여하고 직무적합도가 우수한 인재를 선발하는 것이 이번 채용의 핵심”이라며 “신한은행은 2018년 한 해 청년 일자리 창출을 위해 전년도 채용 규모를 초과하는 인원을 채용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은행권이 최근 필기시험 도입에 적극 나선 이유는 채용비리 후폭풍에 따른 고육지책이라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이광구 전 우리은행장 낙마 이후 여파가 만만치 않아 객관성 확보가 그 어느 때보다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은행들은 사람의 평가를 거치는 서류와 면접보다는 필기가 채용비리 논란에서 안전하다고 판단하고 있다.  윤창현 서울시립대 경영학과 교수는 “은행권이 채용비리 문제가 불거지자 채용의 당락을 점수로 판가름 내기로 한 것”이라며 “필기시험 부활은 일종의 고육지책으로 보면 된다”고 분석했다. 필기전형은 서류나 면접에 비해 정량적인 지표를 보여줄 수 있기 때문에 시비를 걸기 어려운 전형 방식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필기시험에 대한 우려도 만만치 않다. 단편적인 점수화 등으로 종합적인 평가를 하기 어렵다는 지적도 있다. 과거 필기시험이 사라진 이유기도 하다.

 

은행 채용의 또 다른 변화도 나타났다. 전형의 외주화다. 외부 인력을 통한 전형으로 공정성 논란 여지를 줄이겠다는 것이다. 신한은행은 이번 채용을 위해 외부 전문가와 내부통제 관리자를 포함한 ‘채용위원회’를 신설했다. 채용 시작 전 채용 프로세스 전반과 각 전형별 세부 기준 등을 점검하며 최종 합격자 발표 이전 실제 채용 과정이 사전에 정한 기준에 부합한지 따져본다. 또 이번 채용에서는 해당 점검 절차를 통과해야 다음 전형으로 채용 과정이 진행될 수 있도록 각 전형 단계별로 컴플라이언스 리뷰(Compliance Review) 절차를 신설해 투명성을 강화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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