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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 외치는 김정은, ‘계획된 전략일까’ ‘진심일까’

[평양 Insight] 핵전쟁 말한 작년과 다른 파격 행보…본격 北 개방 이어질 가능성도 있어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전문기자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5.04(Fri) 17:00:00 | 1490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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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준을 바꾼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도 개인이나 단체 수준이 아닌 한 국가 체제의 경우라면 문제는 심각해진다. 적지 않은 행정적 비용을 수반하는 건 물론이고 공동체 구성원들의 혼잡과 불편함이 따를 수밖에 없다. 새로운 표준을 경쟁적 입장에 있거나 적대적 정서를 갖고 있는 상대의 것에 맞추는 것이라면 문제는 더 심각해진다. 기술적 측면뿐 아니라 심리적인 쪽에서 봐도 영 내키지 않는 일일 수 있다는 점에서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을 계기로 북한의 표준 시간인 ‘평양시(時)’를 남한이 쓰고 있는 시간에 맞추겠다고 밝힌 건 파격으로 평가할 수 있다. 청와대의 발표에 따르면, 김정은은 4월27일 판문점 남측 평화의집에 걸린 서울·평양시를 각각 표시하는 두 개의 시계를 보고 평양시 변경 입장을 문재인 대통령에게 언급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이건 같은 표준시를 쓰던 우리 측이 바꾼 것이니 우리가 원래대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북한은 사흘 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정령을 통해 김정은이 언급한 조치를 “5월5일부터 적용한다”고 밝혔다. 3년 전 북한이 남한보다 30분 늦은 평양시를 제시하면서 내건 명분은 “일제의 잔재이기 때문”이란 것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김정은의 이번 결정은 북한 정권 수립의 이념적 토대가 된 항일·반일의 이데올로기를 훼손하는 듯한 인상까지 줄 여지가 있다. 하지만 김정은 위원장은 이를 전격적으로 결정했고 북한 기관들은 즉각 이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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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항일’ 상징 평양時 전격 변경 결정

 

김정은의 파격적인 변신 행보는 거듭되고 있다. 올 1월 신년사에서 남북 화해·협력을 언급하며 대남 유화 제스처의 운을 뗀 그는 2월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 북한 선수단·고위인사를 보냄으로써 대화와 교류의 물꼬를 텄다. 특히 여동생인 김여정 노동당 부부장이 청와대를 방문해 김정은 친서를 전달하고 정상회담을 제안함으로써 남북관계에 엄청난 변동이 일 것임을 예고했다. 4월27일 판문점 남측 지역에서 열린 문재인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은 김정은 위원장이 과거의 틀에서 벗어나 새로운 인식과 접근법으로 남북관계를 다뤄나겠다는 메시지를 던진 자리였다고 조심스레 관측할 수 있다.

 

물론 아직은 구체적 행동이 아닌 말과 약속 차원이란 제한점이 있지만 김정은의 잇단 언급은 과거 그의 발언이나 행보에 비춰볼 때 놀라운 수준인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판문점 정상회담에서 타결된 3개 분야 13개의 합의문을 살펴봐도 그렇다. 정상회담의 정례화는 물론 올해 안에 한국전쟁의 종전선언을 하는 문제, 평화수역 합의와 관련해 서해 북방한계선(NLL)의 존재를 인정하는 듯한 대목 등이 눈길을 끈다. 특히 ‘완전한 비핵화’란 표현에 대해 합의하고 판문점 선언에 명문화한 점은 의미가 있다. 북한 체제 보장 등 적지 않은 전제조건이 있을 수 있지만 북한 핵 문제를 남북 간에 논의하고 해결해 나가는 데 있어 단초를 마련했다는 측면에서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까지만 해도 핵과 미사일 ‘도발자’로서의 이미지뿐이었다. 2017년 연초부터 미사일 도발에 나선 그는 미국 본토 타격을 공언하며 괌 지역을 대상에 올리는 등 위협적인 모습을 드러냈다. 급기야 대륙간탄도미사일(ICBM)급 ‘화성-15형’을 쏘아 올렸고 11월말에는 소위 국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앞서 9월엔 6차 핵실험을 강행해 국제사회의 강력한 대북제재를 자초하기도 했다. 미국과의 대립각은 날로 날카로워지면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극렬한 ‘말 폭탄’을 주고받기도 했다. 이런 분위기는 올해 신년사에서 김정은이 “내 책상 위에 핵 버튼이 있다는 건 현실”이라며 핵전쟁을 위협하는 수준까지 치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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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중 해외 전문가 불러 핵실험장 폐쇄 확인

 

대남 노선도 거칠기는 마찬가지였다. 문재인 정부에 대해서도 대화·교류 제안을 거부하면서 거리를 뒀다. 당국회담과 대북지원 제의도 걷어차면서 비난에 매달렸다. 잇단 핵과 미사일 도발 과정에서 ‘남조선 핵 불바다’ 위협이 나왔고 급기야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의 도발에 맞서 우리 군의 미사일 발사 현장을 참관하며 북한을 ‘적’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대치 국면까지 초래됐다. 그동안의 남북관계에서 핵 위협까지 쏟아지고, 우리 국민들이 핵전쟁 공포를 느껴야 하는 최악의 상황이 닥친 것이다.

 

판문점 정상회담은 이런 분위기를 완전히 바꿔 버렸다. 판문점 선언의 합의 내용뿐 아니라 합의문 이외의 사안에서도 놀라운 변화가 드러났다. 핵실험장 폐쇄와 관련한 김정은의 발언이 대표적이다. 그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비핵화 문제를 논의하던 중 함북 풍계리에 위치한 핵실험장 폐쇄와 전문가·언론인 참관 허용을 밝혔다. 그는 “북부 핵실험장 폐쇄를 5월 중 실행하고 이를 국제사회에 투명하게 공개하기 위해 한국·미국의 전문가와 언론인들을 조만간 북으로 초청하겠다”고 말했다. 특히 김정은은 “못 쓰게 된 것을 폐쇄한다고 하는데 와서 보면 알겠지만 기존 실험 시설보다 더 큰 두 개의 갱도가 더 있고 이는 아주 건재하다”고 주장했다. 민감한 사안인 핵 관련 시설에 대해서도 적극적으로 알려 자신의 진정성을 드러내 보이려는 의도로 읽힌다.

 

물론 이 같은 김정은의 언급만으로 북한의 핵 포기나 체제변환 등을 이야기하는 것은 성급하다는 지적도 가능하다. 남북 정상회담의 결과에 성원을 보내는 국민 중에도 아직 김정은의 웃음 띤 얼굴과 ‘완전한 비핵화’ 선언에 대해 찜찜해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서울 핵 불바다와 워싱턴 타격으로 겁박하던 그의 얼굴이 생생한데, 올리브 가지를 흔들며 평화와 비핵화를 설파하는 모습이 어색하다는 얘기다.

 

하지만 김정은의 최근 언급과 행보에선 과거 6년간의 집권 시기에선 찾아보기 힘든 대목이 적지 않다. 어느 것이 진짜 북한 최고지도자 김정은의 모습인지 가늠하기 쉽지 않은 것도 사실이다.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라는 주장도 제기돼 경각심을 높이게 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한반도와 주변 정세의 흐름에 착목해 보다 폭넓게 이 상황을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지적도 있다. 기존의 틀에 얽매여 김정은과 북한 체제의 움직임을 분석하고 향후 행보를 예측하다간 자칫 중대한 변곡점을 놓칠 수 있다는 것이다. 복잡한 정세 속에서 자기 나름대로 체제와 권력을 유지하고 안팎으로 리더십을 발휘하려면 김정은 역시 조성된 정세에 맞춰 변신하고 대처해 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란 관점에서 상황을 주시할 필요도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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