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 前한은 총재 “복지 로드맵 내놓고 증세 논의 시작해야”
  • 김종일 기자 (ide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23 20:30
  • 호수 1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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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인터뷰]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내가 경제부총리라면 증세·부동산·혁신성장 순으로 정책 추진”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한국 경제의 대표적인 원로이자 중도 실용주의 인사다. 지난 대선 당시 문재인 대통령의 싱크탱크였던 ‘정책공간 국민성장’에 합류하면서 스스로를 ‘중도 실용주의자’라고 밝혔다. 그는 지금도 좌우를 넘나든다. 과거 보수 정부의 경제정책 오류를 비판하고 새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을 지지하면서도, 진보 측이 언급하기 꺼려 하는 노동 개혁과 규제 개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식이다. 5월10일 취임 1주년을 맞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정책에 대한 그의 평가가 궁금했다.

 

박 전 총재는 문재인 정부의 경제 성적표에 대해 “전체적인 흐름은 바르게 가고 있다”며 “성장과 형평, 복지의 균형이라는 큰 방향을 잘 잡았다”고 총평했다. 그는 “낙수효과 엔진이 고장 난 현재 상황에서 가계소득과 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내수 성장 쪽으로 방향을 잘 잡아 지난해 3%대 성장률을 기록했다”고 말했다. 소득 주도 성장에 대해서는 후한 점수를 줬지만, 기업의 생산성을 높여 글로벌 경쟁력을 갖게 하는 ‘혁신성장’에 대해서는 아직 보완해야 할 지점이 많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문재인 정부가 정치·외교·안보 등의 영역과 달리 경제에서는 중도 실용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성과를 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문재인 정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무엇으로 보고 있는지에 대해서도 궁금했다. 박 전 총재는 ‘만약 경제부총리나 청와대 정책실장이라면 최우선적으로 추진할 정책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증세, 부동산, 혁신성장 정책에 집중할 것”이라고 답했다. 특히 그는 “문 대통령이 ‘임기 동안 어떤 복지 제도를 실시할 것인지, 대신 세금은 얼마를, 어떻게 걷겠다’는 로드맵을 내놔야 한다”고 강조했다. 증세는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소득세 그러고도 모자라면 부가가치세 순으로 해야 한다고 밝혔다. 정부가 주택정책을 장기임대주택 공급에 집중해야 한다는 조언도 내놓았다.

 

박승 前 한국은행 총재 ⓒ 시사저널 이종현


 

문재인 정부의 지난 1년간 경제정책을 어떻게 평가하나.

 

“전체적인 흐름은 바르게 가고 있다. 문재인 정부는 성장과 형평, 복지라는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경제정책을 펴고 있다. 과거 수출 주도 모델에서 가계소득과 복지를 중심으로 하는 내수 성장 쪽으로 방향을 잡아 작년 3%대 성장을 기록했다. 일단 성공하고 있다고 본다.”

 

 

문재인 정부의 소득 주도 성장론을 어떻게 보는가.

 

“방향을 잘 잡았다. 보수 정권의 경제정책 실패는 이미 작동이 멈춘 산업화 시대 성장모델인 수출 주도 성장을 고집한 데 있다. 이젠 수출이 성장을 이끌지 못한다. 일자리 창출도 담보하지 않는다. 수출보다 내수 주도 성장으로 경제의 물꼬를 틀었어야 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을 통해 가계소득을 증대시키고 빈부 격차를 축소해 성장이 소비로 이어지는 고리를 만들고 있다. 잘하고 있다.”

 

 

정부 주도의 일자리 창출은 어떻게 평가하나.

 

“정부가 일자리 창출에 적극 나서는 것은 잘한 일이다. 그러나 일자리 창출을 위한 정부 역할은 어디까지나 보완적 역할에 그쳐야 한다. 주된 역할은 기업이 해야 한다. 일자리는 기업의 혁신을 통한 성장에서 창출된다. 지금 기업들이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해 정부가 보완적으로 나서 추가경정예산 편성 등 불가피하게 나서고 있는 측면이 있긴 하다. 그렇더라도 정부의 ‘반쪽 노력’만으로는 일자리 창출에 한계가 있다.”

 

 

‘혁신성장’에 대한 평가는.

 

“아직 미흡하다. 우리 경제에는 여전히 좋은 물건을 싸게 생산해서 국제 경쟁력을 갖추는 공급 측면의 성장 엔진이 필요한데, 그걸 위해선 생산성 혁신을 해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노동 개혁, 규제 개혁이 필요하다. 혁신성장의 필요충분조건을 아직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

 

 

노동 개혁과 규제 개혁은 진보진영에서 반발이 클 수 있다.

 

“정부가 노동조합 등과 주고받는 ‘딜(deal)’을 해야 한다. 정부가 노동자를 위한 복지 제도를 과감히 도입하고, 노조엔 고통 분담을 요구해야 한다. 고임금 대기업 노조는 기득권을 내려놓아야 한다. ‘노동 유연성’도 상당 부분 보장돼야 한다. 한번 정규직이 되면 평생 자리를 지킬 수 있는 지금의 시스템이 노동자들에게 좋을 것 같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오히려 그렇게 되면 일자리가 준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서비스 중심으로 가게 되면 노동 유연성은 매우 중요해진다. 이게 어느 정도 보장돼야 신규 고용이 들어와서 고용 증대가 가능해진다. 이런 흐름을 우리 대기업 노조들도 이해해야 한다.”

 

 

복지 확대를 위해 증세가 필요할까.

 

“다양한 복지 공약을 하면서 마치 증세는 없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국민에게 복지를 주는 것만 약속할 게 아니라 그 재원 마련을 위한 고통 분담도 동시에 요구해야 한다. 문재인 정부는 ‘임기 동안 어떤 복지 제도를 실시할 것인지, 대신 세금은 얼마를, 어떻게 걷겠다’는 로드맵을 내놓아야 한다. 그래야 그 로드맵을 갖고 노사, 정부, 국회 등이 함께 머리를 맞대고 증세에 대한 결정을 할 수 있다. 지금은 정부가 무엇을, 어떻게, 얼마나 해 줄지 국민이 모른다. 세금을 얼마나 더 내야 하는지, 아닌지도 확실히 모른다. 이것은 아주 잘못된 것이다.”

 

 

증세 없는 복지는 불가능하다는 지적인가.

 

“맞다. 세금을 더 걷지 않고 복지 개혁을 하겠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 재정 적자를 더 쌓는다는 의미인데, 이건 미래세대에게 부담을 전가하는 일이다. 개인적으로는 저소득층 교육 균등을 위해 우수한 학생에게는 4년간 대학 등록금을 면제해 주는 안(案)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개천에서 다시 용이 나올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이런 안에 대해 국민이 동의하면 관련 세금은 올릴 수 있는 것이다.”

 

 

증세는 어떤 순서대로 하는 게 바람직한가.

 

“법인세, 종합부동산세, 소득세 그러고도 모자라면 부가가치세 순으로 해야 한다고 본다. 여유가 있는 경제 주체부터 부담하되 서민들도 증세에 동참해야 한다. 그래야만 복지 개혁을 할 수 있다.”

 

 

법인세는 세계적으로 내리는 추세라는 지적이 있다.

 

“다른 나라는 법인세가 높기 때문에 낮추는 거다. 미국은 올해 법인세 최고세율을 35%에서 21%로 내렸고 한국은 22%에서 25%로 올렸다. 한국은 각종 비과세·감면 때문에 실효세율이 18%지만 미국은 21%다. 아직도 우리는 미국보다 실효세율이 낮다. 근본적으로 다른 점은 미국은 법인세를 내리면 국내 투자가 늘어나서 고용이 증가한다. 반면에 한국은 국내 투자 경쟁력이 없기 때문에 대기업이 유보금을 쌓고도 국내 투자를 안 한다. 그래서 법인세를 낮춰줘도 투자와 고용이 늘어난다고 볼 수 없다. 법인세 인상은 단순히 복지 재원 문제가 아니라 정부가 세금을 걷어서 기업이 안 하는 고용과 투자를 대신하고 일자리를 늘리라는 의미도 있다. 정부가 이른바 ‘돈맥경화’에 빠진 경제를 환류시키자는 것이다.”

 

2017년 9월 제주시 롯데시티호텔에서 열린 ‘리더십 포럼’에서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가 기조연설을 했다. © 사진=연합뉴스


 

문재인 정부도 부동산 문제 해결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저출산도 부동산 문제 때문이다. 한국 사회의 많은 병폐가 여기서 비롯된다. 우리는 해방 이후 지난 정부까지 모두 부동산을 경기 부양 수단으로 봤다. 그 결과, 지난 50년간 물가가 30배 정도 올랐는데 땅값은 3000배 뛰었다. 최근에도 경제성장률보다 집값 상승률이 훨씬 더 높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

 

“근본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혁명에 가까운 발상의 전환과 노력이 필요하다. 우선 부동산을 경기 부양 수단이 아니라 국민생활 안정 수단으로 보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부동산을 재산 형성 수단으로 삼지 못하게 해야 한다. 지난 4년간 가계소득은 9% 오르는 데 그친 반면 집값은 22%, 전셋값은 52% 뛰었다. 부동산 보유과세(재산세+종부세)가 미국은 1.5%, 일본이 1.2%인데 한국은 0.15%다. 미국의 10분의 1이다. 하지만 거래세는 높다. 사고파는 것은 못 하게 하고, 갖고 있는 것에는 지나치게 보호를 한다. 보유세를 3~4배 올리고 거래세를 대폭 낮추는 게 맞다.”

 

 

구체적으로 쓸 수 있는 정책이 있나.

 

“장기임대주택 공급에 중점을 둬야 한다. 한국토지주택공사(LH)가 핵심 역할을 해야 한다. LH를 정부의 공공임대주택 건설 및 관리의 중심기구로 만들고, 국유지와 그린벨트를 대폭 푼 곳에 주거 약자를 위한 장기임대주택을 지어야 한다. 저소득 신혼부부, 다자녀 저소득층, 일반 저소득층 등의 순서로 싼값에 공급하면 의외로 많은 문제를 풀 수도 있다.” 

 

 

 

‘경제계 원로’ 박승…J노믹스 ‘비판적 지지자’

 

박승 전 한국은행 총재는 중앙은행(한국은행)과 정부(청와대·건설부·공공기관)에서 우리나라 경제 발전의 굽이굽이마다 굵직한 족적을 남겨온 ‘경제계의 원로’다. 1936년생으로 올해 만 82세인 박 전 총재는 2002년부터 2006년까지 4년간 한국의 통화정책을 이끌었다. 1976년 중앙대 경제학과 교수, 1988년 건설부(현재 국토교통부) 장관, 1993년 대한주택공사 이사장, 1999년 한국경제학회장, 2001년 공적자금관리위원회 민간위원장, 2002년 한은 총재 등을 역임했다. 1961년 서울대 상대를 나와 1974년 미국 뉴욕주립대에서 ‘노동력 잉여 후진국에서 외자의 경제개발 효과’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은 총재로 재임하던 2003년 한은 부총재를 금통위원 당연직으로 임명하는 한은법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키며 ‘재무부 남대문출장소’라는 비판을 받던 한은의 독립성을 강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한은 총재 재임 당시 특유의 ‘직설화법’이 시장에 혼란을 준다는 지적도 있었지만, 정부와 통화 당국 간의 ‘견제와 균형’을 맞추기 위해 소신을 폈던 것으로 평가된다.

 

한은 총재 퇴임 이후에도 대학 강단(중앙대 경제학과)에서 소신 있고 깊이 있는 분석으로 경제계는 물론 정치권에서도 뜨거운 러브콜을 받아왔다. 평생 정치에 관여하지 않겠다는 다짐을 지켜오고 있는 이 경제 원로는 지금도 직접 운전하며 강연과 토론에 나서고 있다. 특히 증세와 분배 정책 강화, 가계소득 증대 정책 등에 대해 목소리를 내고 있다. 지난 대선에서는 당시 문재인 대통령 후보의 싱크탱크 ‘정책공간 국민성장’ 자문위원장을 맡았다. 문 대통령의 경제정책 뼈대를 구성하는 데 참여한 박 전 총재는 ‘J노믹스’의 ‘비판적 지지자’로서 쓴소리도 아끼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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