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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 사태로 ‘미투 청정지역’ 방송계 살얼음판

‘김생민 미투 폭로’ 사태, 방송계 전체로 확대될지 주목

하재근 문화 평론가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4.10(Tue) 18:00:00 | 1486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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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생민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한 여성의 ‘미투 폭로’가 나와 연예계가 충격에 휩싸였다. 2008년 가을, 김생민이 출연했던 프로그램의 회식 자리에서였다. 노래방에서 김생민이 따로 나와 방을 잡고는 여자 스태프 A씨를 불렀다. 방으로 찾아간 A씨를 완력으로 제압하고 강제 추행했다. 추행이 진행되는 중에 다른 스태프가 A씨를 찾으러 와 다행히 ‘구출’됐다는 내용이었다. 당시 A씨는 속옷 끈이 풀어질 정도로 심각한 상황이었다. 게다가 다른 여자 스태프 B씨도 그날 밤 김생민에게 성추행을 당했다는 것이 알려졌다.

 

A씨는 선배 스태프와 메인 작가에게 성추행 피해를 알렸고, 메인 작가는 이 사실을 당시 PD에게 알렸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김생민의 사과는 오직 B씨에게만 이루어졌다. A씨에게는 사과는커녕 주위의 부정적인 시선만 쏟아졌고, 결국 방송국을 그만뒀다. 그 후 10년간 TV에 나오는 김생민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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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범적인 이미지의 충격 ‘스튜핏!’

 

A씨는 최근 미투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는 것을 보며 용기를 얻었다. 자신이 이대로 침묵하는 것은 가해자를 도와주는 것이며, 또 다른 여성이 피해를 당하도록 방조하는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매체에 장문의 편지를 보내기에 이른다. “이런 일들이 방송가에서 암묵되고, 그로 인해 누군가 상처를 안은 채 살아간다면, 나 역시 가해자의 대열에 서는 것과 다를 바가 없습니다. 그래서 나를 찢어가며 이 글을 열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편지를 받은 매체 측에서 김생민에게 연락했고, 올 3월21일 김생민이 직접 A씨를 만나 사과했다는 보도가 4월2일 나왔다. 그가 별다른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바로 사과한 것으로 보아 A씨의 폭로는 상당 부분 진실인 것으로 판단된다.

 

이 폭로가 사람들에게 특히 충격을 안겨준 것은 대상자가 김생민이기 때문이다. 그는 1992년 KBS 개그맨으로 데뷔했지만 주목받지 못했다. 다른 연예인들이 꺼리는 연예정보 프로그램에 자원해 리포터 및 패널 전문 방송인으로 무려 25년 정도를 활동했다. 자신의 동기와 후배들이 스타로 뜨는 모습을 지켜보면서도 연예계 주변부에서만 활동한 것이다. 이것이 사회 주류로부터 소외된 사람들을 자극했다. 대중은 김생민을 자신과 동일시했다.

 

김생민은 유명 연예인보다 수입이 훨씬 적었다. 그 돈을 알뜰히 저축하고, 재테크 방법을 연구해 마침내 10억원 이상을 모으고 타워팰리스 아파트도 샀다. 이런 스토리도 대중을 자극했다. 대리만족을 주면서 ‘나도 김생민처럼 열심히 살면 돈을 모을 수 있다’는 희망을 갖게 했다. 통장이 10개 이상이라 ‘통장 요정’으로 불린 김생민은 마침내 데뷔 25년 만에 인기 스타의 반열에 올랐다.

 

웃기는 재능으로 뜬 것이 아니라 ‘모범적인 생활’로 뜬 것이다. 스타가 된 김생민이 TV에서 한 일은 다른 사람의 삶을 재단하는 것이었다. 잘못된 생활방식을 가진 사람에겐 ‘스튜핏!’ 딱지를, 모범적인 생활방식의 사람에겐 ‘그뤠잇!’ 딱지를 붙여줬다. 그랬던 사람이 성폭력 가해자라고 하자 사람들이 배신감을 느꼈다.

 

그가 A씨를 만나 사과할 때 “술에 너무 취해서”라고 말한 것도 여론을 악화시켰다. 마치 술을 핑계로 변명하는 듯한 인상을 줬기 때문이다. 사과할 때는 깨끗하게 해야 그나마 진정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공식 사과문에서 A씨가 상처받은 것을 몰랐다가 최근에야 그것을 전해 들어 사죄했다고 한 것도 문제였다. 과거 피해자 A, B씨 중에서 B씨에게 사과한 것은 문제를 인식했다는 얘긴데, A씨에 대해서만 그걸 몰랐다는 게 대중 입장에선 석연치 않은 것이다. 또, 공식 사과하면서 동시에 하차 선언까지 했어야 하는데 김생민은 사과하고도 거취 문제를 밝히는 데 주저하다가 여론이 더 악화되고 나서야 뒤늦게 하차를 선언했다.

 

3월21일 A씨를 만나고도 4월2일 기사가 터질 때까지 아무 일 없다는 듯이 방송활동을 이어간 대목도 문제였다. 처음 매체로부터 연락을 받았을 때 깨끗하게 사과하면서 자숙 선언까지 했다면 그나마 동정여론이 조금이라도 있을 수 있었지만, 11일간 대중을 속이며 방송하고 사과도 변명하듯 하면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기 때문에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고 말았다.

 

A씨의 폭로엔 놀라운 지점이 있다. 김생민처럼 모범적인 이미지의 연예인이 성추행했다는 것도 놀랍지만, 그 사건 이후 A씨가 겪었다는 일들이 더욱 놀랍다. A, B씨가 동시에 성추행을 당했는데 B씨만 사과를 받았다. 이에 대해 A씨는 “B씨는 김생민의 하차를 요구하지 않았는데 자기는 강력히 문제를 제기했기 때문에 불이익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출연진이 술김에 한 일로 (프로에서) 나가면 방송을 어떻게 이끌어가냐” “이런 일은 방송계에서 비일비재하다. 스태프면 스태프답게 생각하라” “방송가에서 이런 일로 출연진을 자르는 법은 없다. 스태프가 나가면 나갔지, 연예인은 나갈 수 없다” “경찰로 끌고 가서 금전적 합의를 받고 싶냐? 이런 일은 방송국에 소문이 금방 퍼진다”. 당시 A씨는 방송사로부터 이런 말들을 들었다고 한다.

 

 

“이런 일은 방송계에서 비일비재하다”

 

A씨는 오기로 버텼다. ‘가해자의 경력이 단절될 수 없다면, 피해자의 경력 또한 단절될 수 없다’는 각오로 버텼지만 암묵적으로 압력이 들어왔고 결국 스스로 그만뒀다. 김생민의 성추행이 한 개인의 일탈이라면, A씨가 그 이후에 당했다는 일은 방송계의 구조적인 문제인 것이다. 방송계에서 ‘절대 을’이라고 할 수 있는 여성 스태프가 과거 어떤 상황에 있었는지를 극명히 보여준다. 당시 김생민은 리포터나 패널 정도로 활동하던 무렵이었다. 절대로 스타라고는 할 수 없는, 그저 방송이 직업일 뿐인 방송인 같은 느낌의 연예인이었다. 그런 사람에게조차 여성 스태프가 ‘파리 목숨’이었다면 정말 힘 있는 스타나 방송사 간부, PD 등의 위세는 어땠을까?

 

그렇지 않아도 최근 미투 운동에서 방송사 간부와 PD에 대한 폭로가 없다는 점이 이상하다는 지적이 있었다. 정말 핵심적인 문제는 나오지 않는 ‘팥소 없는 찐빵’ 같은 미투 운동이라는 자탄도 나왔다. A씨가 들었다는 말 중에서 ‘이런 일은 방송계에서 비일비재하다’는 말이 사안의 심각성을 짐작하게 한다.

 

성폭력은 대표적인 암수(暗數)범죄, 즉 드러나지 않는 범죄다. 피해자가 수치심이나 2차 피해에 대한 우려 등으로 피해 고발을 거의 하지 않는다. 성폭력을 당하고도 조직적인 은폐, 불이익을 당한 사례가 한 건 알려졌다면 실제로는 훨씬 많다고 봐야 한다. 글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인 것이다. 우리 사회에 더 활발한 미투 운동이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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