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미 정상회담에 북한 언론이 침묵하는 이유
  • 이영종 중앙일보 통일북한 전문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6 17: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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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종의 평양 Insight] 북한 매체들, 북·미 회담 보도 수위 고민

 

서울과 워싱턴을 향해 정상회담 카드를 내보인 김정은 북한 노동당 위원장이 장고에 들어갔다. 군부대와 공장·기관 등을 둘러보는 공개 활동인 이른바 현지지도를 자제한 채 남북 정상회담과 북·미 정상 간 만남에 골몰하고 있는 형국이다. 문재인 대통령과 4월말 판문점에서 갖기로 한 남북 정상회담의 경우 빠듯한 준비 일정 때문에 채비를 서둘러야 하는 상황이다. 청와대의 경우 준비위를 본격 가동하는 등 부산하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회담은 김정은에게 더욱 신경 쓰이는 대목이다. 핵과 미사일 문제로 대립각을 세워온 관계인 데다, 북·미 간 첫 정상회담이란 역사적 의미 때문에 세계의 이목이 쏠려 있기 때문이다. 리용호 북한 외무상이 북·미 간 외교관계의 중개자 역할을 해 온 스웨덴을 3월15일 방문해 회담을 갖는 등 실무선에서의 탐색과 준비작업도 시작됐다.

 

2017년 4월14일 평양 시민들이 태양절 기념식 축하 소식이 실린 노동신문을 살펴보고 있다. 노동신문은 북한체제를 홍보하는 대표 관영매체다. © 사진=EPA연합


 

북·미 정상회담 연기 가능성 낮아

 

김정은 위원장으로선 올봄 두 개의 커다란 체스판을 움직여야 하는 상황이 됐다. 지난해 핵과 미사일 도발로 남북관계와 한반도 정세에 먹구름을 몰고 왔던 국면에서 벗어나 체제의 명운을 건 회담판과 맞닥뜨린 것이다. 우선 남북 정상회담을 치러야 하고 이어 트럼프 대통령이 “5월에 만나겠다”고 한 데 따라 마련될 북·미 간 회담에도 임해야 한다. 국무장관 교체 등 미국 측 내부 사정에 따라 다소 조정될 여지가 있다는 게 미 유력 언론들의 관측이지만 크게 늦어질 상황은 아니라는 게 우리 외교 당국자의 귀띔이다. 자칫 모멘텀을 잃을 경우 다시 워싱턴과 평양 측이 조율을 벌여야 하는 어려운 상황을 맞을 수 있다는 점에서다.

 

북한은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과 관련해 말을 아끼고 있다. 3월5일 평양을 방문한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비롯한 특사 5인방의 김정은 면담 보도 이후로 노동신문과 조선중앙통신, 중앙TV 등은 정상회담과 관련해 아무런 언급이 없다. 당시 보도에서도 “(김정은이) 남측 특사로부터 수뇌상봉(정상회담)과 관련한 문재인 대통령의 뜻을 전해 들으시고 의견을 교환했으며, 만족한 합의를 보았다”는 수준만 전했을 뿐이다.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선 아예 보도 자체가 없다. 3월8일 정의용 대북특사가 방북 결과 설명을 위해 워싱턴을 방문해 트럼프 대통령을 만난 사실은 아예 북한 관영매체에 등장하지 않았다. 우리 정부 당국자는 “해외에 근무하거나 대외업무에 종사하는 핵심 엘리트와 외부 소식을 접하기 쉬운 북·중 변경지역의 주민들 외에 북·미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아는 경우는 많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북한 관영매체들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의 만남이 추진되고 있는 상황을 뻔히 알고 있는 노동신문과 조선중앙TV의 편집 간부나 기자들의 경우 대미 보도의 수위 조절에 애를 먹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노동당의 선전선동부나 조선중앙방송위원회 등에서 기본적인 지침이 내려온다 해도 지면과 방송에 어떤 수준의 보도와 표현을 해야 할지는 막막한 상황일 수밖에 없을 것이란 게 고위 탈북인사의 지적이다. 분위기 파악을 못하고 엉뚱한 보도를 내보냈다가는 숙청의 피바람이 닥칠 수 있다는 공포감마저 느낄 수 있다는 얘기다.

 

실제 지난해 11월 국가정보원은 국회 정보위 보고에서 북한 당국이 보도내용을 문제 삼아 노동신문 간부들에게 본보기식 숙청을 가한 바 있다고 밝혔다. 당시 김정은 위원장은 자신이 주도한 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 성공을 축하하는 군중대회를 노동신문이 1면에 게재하지 않았다며 불쾌감을 표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따라 노동신문 간부 수 명이 혁명화 조치를 당했다는 게 국정원이 파악한 내용이다.

 

이후 북한 관영매체들이 바짝 긴장하고 있는 분위기라 남북 정상회담은 물론 북·미 정상회담을 다루는 데 민감할 수밖에 없다. 노동신문의 경우를 보면 정의용 특사 일행과 김정은의 만남과 만찬이 이뤄진 3월5일 이후 대남 비난은 완전히 사라진 상황이다. 노동신문 6면의 남조선 지면은 다른 소식으로 채워지는 경우가 많고, 남한 소식을 전한다 해도 “남조선의 보수패당이 북남 간 화해협력의 기운에 재를 뿌리려 한다”는 수준에 그친다.

 

 

노동신문·조선신보 간 혼선

 

대미 비난의 경우는 여전히 단골 소재로 등장하고 있지만 미묘한 기류가 감지되고 있다. 과거 직접적이고 맹렬한 비난을 퍼붓는 수준에서 최근엔 미국의 대북제재나 무역 보복조치 등에 대한 대미 비판 쪽으로 무게중심을 옮겼다. 북·미 정상회담 개최 합의 사실이 알려진 이튿날인 3월10일 노동신문은 미국의 대북제재를 비난하며 “우리에게는 그 어떤 군사적 힘도, 제재와 봉쇄도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실었다. 북한 내각 기관지 민주조선은 3월14일자 보도에서 미국이 최근 해운·무역회사와 선박 등 56개 대상에 제재를 가한 데 대해 “반공화국 제재 강화를 통하여 정세 역전이라는 음흉한 목적도 추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관련 보도를 내놓으려다 혼선을 빚는 상황도 드러났다. 북한의 입장을 대변해 온 것으로 알려진 재일 조총련 기관지 조선신보는 3월10일 인터넷판에 북·미 정상회담 개최 소식을 전하며 “분단의 주범인 미국이 일삼아온 북침전쟁 소동에 영원한 종지부를 찍는 평화 담판이 시작되려고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한국과 미국 등의 언론매체들이 이 보도에 관심을 드러내며 북한의 후속 보도를 점치는 상황이 이어지자 관련 보도 내용을 모두 삭제해 버렸다. 백태현 통일부 대변인은 브리핑에서 “북한 나름대로 입장 정리에 시간이 필요해 신중한 접근을 하고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서울과 평양을 향한 승부수로 정상회담을 던져놓은 김정은은 여전히 고민스러운 모습을 보이고 있다. 대북특사와의 만남에서 김정은이 ‘비핵화’ 용의를 밝혔다는 게 청와대 설명이지만 구체적인 전제조건이나 실행방안은 드러나지 않고 있다. 무엇보다 트럼프 행정부는 비핵화에 대한 구체적인 조치가 담보되지 않는다면 만남이 의미가 없을 것이란 입장을 내비치며 북한을 압박하고 있다. 허버트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 보좌관이 3월12일 북·미 정상회담에 대해 “비핵화를 향한 북한의 말과 행동이 일치하고, 실질적 진전이 있을 때까지 ‘최대한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고 밝힌 건 이런 분위기를 반영하고 있다. 예전처럼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에 나서는 것만으로 보상을 받고, 다시 합의 파기의 길로 나서도 마땅한 제재 방법이 없던 상황과는 판이 달라졌다는 얘기다. 김정은의 오랜 침묵과 평양 관영매체의 줄타기 움직임에는 대북제재의 압박감과 매머드급 정상회담 테이블 사이에서 고심하는 북한의 실상이 그대로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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