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 종주국임에도 세계적 ‘티 브랜드’ 하나 없는 중국
  • 서영수 차(茶)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3.15 09:55
  • 호수 14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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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의 Tea Road] 과거 차 생산·판매 국유화로 중국차 브랜드 걸음마 수준

 

차(茶) 종주국 중국에서도 차 소비량과 유통량이 제일 많은 곳은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다. 광저우 팡촌(芳村)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차시장이 있다. 서울 중구 면적만 한 넓은 차시장에 중국의 다양한 차가 집하돼 국내 유통과 해외 수출을 위해 이동한다. 보이차(普洱茶)도 원산지인 윈난성(雲南省)보다 팡촌 차시장에서 유통되는 물량이 훨씬 많다. 해마다 팡촌 차시장을 둘러보면서 체득한 사실 중 현지에서 답을 얻기 힘든 문제가 있었다.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중국차 제조회사가 있지만 특정 생산지역을 넘어 전국적 지명도와 해외 경쟁력을 가진 회사가 의외로 많지 않다는 것이었다. 현지 차 상인과 차 전문가의 의견은 단편적이고 자가당착에 빠진 견해가 많아 동의하기 어려웠다. 립톤(Lipton) 같은 세계적 인지도를 가진 중국차 회사와 브랜드를 찾기 어려운 원인을 현재보다 과거에서 우선 찾아야 했다.

 

차에 세금을 부과한 최초의 나라는 중국이다. 당나라 덕종(德宗)은 782년 차세를 처음으로 만들었다. 차 거래가격의 10%였던 세율은 점점 높아져 821년에는 50%를 뛰어넘었다. 차를 생산하는 지역에 특별세를 부과하고 차 상인이 지나는 길목에서도 세금을 징수했다. 785년부터 황실공차 제도를 본격적으로 실시한 당나라는 황실에 진상할 고급 차를 생산하는 직할다원을 전국 유명 차산지마다 선정해 황실에서 관리를 파견해 감독했다. 차나무 재배 방식과 차 제조 기술을 비약적으로 발전시킨 황실공차 제도는 백성들의 부담을 가중시키는 부작용이 있었다. 명성과 자부심보다 조세와 용역 부담 증가를 두려워한 백성들은 황실다원 지정을 달가워하지 않았다.

 

세계 최대 규모의 차시장이 있는 중국 광둥성(廣東省) 광저우(廣州) 팡촌(芳村)에 위치한 차(茶) 매장 © 사진=서영수 제공


 

당나라 때인 835년부터 차 전매품목 지정

 

차는 835년부터 전매품목으로 지정됐다. 전매사업 강화와 높은 세율로 일시적인 세금 수입은 늘었지만 지방 토호와 상인의 반발이 심해졌다. 세금 폭탄과 관료주의에 시달려 차를 밀거래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그들은 수로를 이용해 시장을 습격하는 강적(江賊)들과 결탁해 세금을 피하고 관군과 맞서기 위해 불법 무장 부락을 조성했다. 밀매업자로 전락한 백성들은 무리를 지어 강적이 되어 국가 재정과 치안을 뒤흔들었다. 소금과 차를 밀매하던 황소(黃巢)가 일으킨 난(875~884년)이 대표적이다. 황소의 난을 계기로 당나라는 국력이 급격히 기울며 중원을 송나라에 내줘야 했다.

 

차 전매제도로 확보한 국가 재정을 송나라는 국방비로 대부분 지출했다. 송나라는 당나라 때부터 민간 차원에서 중국차와 티베트 말을 교환하던 차마호시(茶馬互市)를 국가가 주도하는 차마무역(茶馬貿易)으로 활성화시켰다. 송나라 차 문화는 당나라의 육우(陸羽)가 779년 세계 최초의 차 백과사전 《차경(茶經)》을 만들어 중국 다도(茶道)의 초석을 세운 후광을 입어 정교함과 화려함이 최고조에 달했다. 무인을 경계하고 문인을 중용한 송나라는 차로 마련한 국방비를 전투에 필요한 마필뿐 아니라 국경을 수비하는 군인을 용병으로 대체하는 데 사용했다. 넘치는 국방 예산을 적재적소에 집행하지 못한 송나라는 원나라에 쫓겨 남송을 세우지만 결국 패퇴해 멸망했다.

 

차 전매제도를 정립한 송나라는 사라졌지만 명나라를 거쳐 청나라 말기까지 차 전매제도는 유지됐다. 차 전매제도는 국가재정에 큰 도움이 됐지만 일반 백성에게는 족쇄로 작용해 생산성이 저하됐다. 황실공차 제도와 과도한 세금은 차나무 재배 기피와 밀매업자를 양산했다. 차 생산지역 농민에게 차는 부역만 늘리는 부담스러운 존재로 전락했다. 차는 황실부터 말단관료와 지방 토호에 이르기까지 선호하는 착취 대상이 됐다. 먹이사슬과 부패 고리에 지친 농민들은 차밭을 불태우고 산속으로 숨어버리거나 민란에 가담했다.

 

차 전매제도가 시행되는 국가에 ‘브랜드’는 필요 없었다. 어느 지역에서 생산된 차라는 정보면 충분했다. 중국에서 차 이름을 짓는 관행은 생산지역이 우선하고 제조공정상 분류되는 6대 차종 중 하나를 붙이는 것이다. 제조자의 비중은 상대적으로 빈약했다. 해외 반출이 금지된 품목이던 목화와 비단의 국외 반출이 허용된 뒤에도 차는 금지품목으로 감시 대상이었다. 유럽에 차를 수출하는 것도 대국이 은혜를 베푸는 조공무역이라고 여긴 청나라에 영국은 자유무역을 요구했다. 광저우에서 제한된 무역만을 허락한 청나라는 영국이 작심하고 벌인 전쟁에서 연패했다. 일본에도 패배한 청나라는 신해혁명(1911년 10월10일)으로 사라지고 아시아 최초의 공화국인 중화민국이 탄생했지만 서구열강의 각축장이 되고 말았다. 중국차의 위상도 영국의 위세에 밀려 추락했다.

 

황실공차를 바치던 중국 쓰촨성(四川省)의 황차원 © 사진=서영수 제공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으로 차의 사유화 인정

 

차 문화가 왕실에서 대중문화로 보편화되면서 영국인들은 아침에 일어나면서부터 잠들기까지 차를 즐겼다. 전투 중에도 티타임을 거르지 않을 정도로 차를 입에 달고 살아도 차에 대한 분별력과 선택능력이 부족했던 상당수 영국인에게 ‘브랜드’는 필수불가결한 존재였다.

 

차를 처음부터 무역과 산업으로 접근한 영국과 달리 중국은 쌀과 같은 생필품으로 인식했다. 지역 특산물로서 차의 개성과 품질에 치중한 중국에 반해, 영국은 ‘브랜드’에 어울리는 차 품질 표준화와 맛 균일화로 대량생산에 집중했다. 1706년 영국 런던에서 트와이닝스(TWININGS)가 홍차 브랜드로 탄생하고, 1707년 식료품 판매로 출발한 포트넘 앤 메이슨(FORTNUM & MASON)은 영국 왕실에 홍차를 납품했다. 식품유통업에 성공한 토머스 립톤(Thomas Johnstone Lipton)은 1889년 차 사업에 합류해 백만장자에서 억만장자로 도약했다. 립톤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차 음료 ‘브랜드’로 성장했다.

 

차는 중화민국을 중국대륙에서 밀어낸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며 생산과 판매가 국유화됐다. 국가통제를 받던 차는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다른 전통문화와 함께 핍박받으며 퇴행했다. 덩샤오핑의 개혁개방과 더불어 차도 봄을 맞이했다. 사유화를 인정받은 중국차는 겨우 ‘브랜드’ 걸음마 단계에 들어섰다. 차 원산지 국가로서 중국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과 확장성은 조만간 차 산업 판도를 흔들 저력이 충분히 있다. 국제적 브랜드가 없다고 우수한 차가 중국에 없다고 속단하면 실수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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