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마민주항쟁 보고서는 엉터리…정부, 재조사해야”
  • 경남 창원 = 이상욱 기자 (sisa524@sisajournal.com)
  • 승인 2018.03.07 12: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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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부마민주항쟁 진상 재조사 요구 나선 정성기 경남대 교수

정성기 경남대학교 교수를 3월6일 창원에 있는 경남대에서 만났다. 그는 30여 년 동안 부마민주항쟁기념사업회 회장과 실무진을 지내며, 부마민주항쟁 관련 진상규명에 앞장서 현대사 전문가들 사이에 잘 알려져 있는 인물이다. 

 

정 교수는 부마민주항쟁진상조사보고서와 관련, 오는 4월12일 최종 채택을 앞두고​ 요즘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다. 1979년 경남대 3학년 재학 당시 부마민주항쟁을 직접 경험했고,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정 요구와 10주년 기념 자료집 발간 등에 앞장서면서 부마항쟁에 대한 역사적 책무를 느끼고 있는 듯 했다. 그는 이번 보고서 제출과 관련, 진상조사위원회 활동의 문제점을 조목조목 짚은 뒤 "이번 심의위원회는 보고서 발표를 포기하고, 다른 위원회가 구성돼 재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부마민주항쟁, 박정희 유신체제에 대한 첫 시민 저항” 

 

1979년 10월16일 부산, 10월18일 마산에서 일어난 부마민주항쟁은 박정희 유신체재에 대한 첫 번째 시민항쟁이었다. 학생과 재야를 중심으로 시작된 항쟁은 수만 명의 시민이 참가하면서 4·19 혁명과 같은 양상을 보였다. 첫 시위 나흘 만에 내려진 계엄령이 아니었으면 전국적인 시위로 이어졌을 것이란 게 정 교수의 설명이다.  

 

부마민주항쟁 진상 재조사를 요구하고 있는 정성기 경남대 교수 ⓒ 이상욱 기자

 

부마민주항쟁이 잘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며칠 뒤 바로 10·​26 사건이 터지면서 부마민주항쟁은 완전히 묻혀버렸다. 이후 민주화운동은 5·​18광주민주화운동이 주된 이슈였다. 안타깝게도 부마민주항쟁은 언론에서 제대로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런 상태에서 1989년 처음으로 부산과 마산에서 각각 10주년 기념사업을 추진했다. 그때 비로소 처음으로 진상조사와 명예회복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989년 10월 당시 진상조사를 요구했는데.

 

“그때부터 1990년대 중반까지 사실 우리는 5·​18 진상조사에 힘을 집중했다. 워낙 큰 사건이었다. 전두환·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 구속과 5·​18특별법 제정에 힘을 보탰다. 5·​18특별법이 제정되는 등 일부 성과가 나왔지만 불행히도 1997년 IMF 사태가 일어났다. 당시 경제상황이 어렵게 되자 민주화 세력에 대한 불신이 사회 전반적으로 팽배해졌다. 또 3당 합당 정부인 김영삼 정부와 DJP 연합 정부인 김대중 정부 시절에도 유신 본당이 그대로 남아 있어서 20주년 기념사업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후 노무현 정부 시절 적극적으로 진상조사를 요구했지만, 여소야대 정국에 막혀 버렸다. 부마민주항쟁은 유일하게 언론과 학계로부터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사건의 무게만큼, 아니 절반이라도 우리 사회가 관심을 가졌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어쩌면 무관심의 대가로 박근혜 정권이 등장했는지 모른다.”

 

진상조사가 이뤄지게 된 결정적인 전환점은.

 

“2012년 대선 당시 새누리당 후보였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과거사 문제로 곤혹을 치루고 있었다. 그는 5·​16쿠데타 복권 등 김영삼 전 대통령의 역사 바로 세우기를 다시 뒤집는 발언으로 발목이 잡혀 있었다. 결국 대선을 의식한 박 전 대통령이 유신체제와 인혁당 사건 등을 사과하는 국면에서 우리는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정을 강하게 요구했다. 그 전까지 이주영 의원과 설훈 의원 등이 낸 법안에 부정적이던 박 전 대통령도 대선을 목전에 두고 결국 발의된 법안에 서명했다. 당시 내가 기자회견에서 유신과 인혁당 사건을 사과하면서 부마민주항쟁은 왜 한마디도 언급하지 않느냐며 항변했던 게 주효했다고 본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안’은 2013년 5월7일 국회에서 통과된다.

 

진상조사는 순조롭게 진행됐나.

 

“사실 그 법률안은 국회 법사위를 거치면서 특별법이 아닌 일반법으로 바뀌었다. 이 때문에 유공자 대상과 조사 권한 등 핵심적인 많은 부분이 제외돼 버렸다. 이후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정부는 정식으로 부마민주항쟁진상규명 및 관련자명예회복심의위원회(심의위원회)를 만들어 진상 조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심의위원회 1기 출범 때 '친 박정희론'을 펼치는 학자와 박근혜 대통령 지지자로 채워져 논란이 된 것은 물론, 2기가 출범하면서 뉴라이트 계열의 교수 2명이 위원으로 채워졌다. 자연스레 진상조사는 부실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남부희 위원과 우리 측이 추천한 일부 실무위원들은 사퇴해 버렸다. 또 2011년 출간한 부마민주항쟁 증언집과 유족 증언 등을 심의위원회에 제출했지만, 사건과 관련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는 이유로 모두 배척당했다. 마치 결론을 짜놓고 조사하는 형국이었다.”

 

지난 2월23일 진상조사결과 보고회 참석 여부를 고민했다고 하는데.

 

“부마민주항쟁 법률은 진상조사를 통해 관련자 명예회복과 더 나아가 국민화합에 그 목적이 있다. 심의위원회는 이 법률의 취지에 맞게 최소한의 조사를 해야 하는데 그렇지 못했다. 결국 보고서 제출 시한에 임박해 보고회를 열었다. 사전에 보고회 토론자로 선정돼 한 부분을 맡기로 했지만, 보고서가 너무 부실해 토론회 참석자 몇 분과 참석 여부에 대해 의논까지 했다.” 

 

진상조사보고서엔 부마민주항쟁 당시 시대적 배경을 담고 있나.

 

“보고서엔 전반적으로 내용이 너무 없다. 일반적인 시위 정도가 아닌 대규모 항쟁이 일어났음에도 그 배경을 제대로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당시 산업화의 혜택을 가장 많이 본 부산과 마산에서 항쟁이 일어났음에도 그 이유가 기술되지 않았다. 즉 유신체제의 핵심인 국가공단 지역에서 경제적 혜택을 많이 본 시민들이 왜 항쟁을 벌였는지 기본적으로 파악하지 않았다. 배경을 통해 보수 뿐만 아니라 진보 세력도 엄정한 역사적 교훈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도저히 이 보고서로는 역사적 교훈을 알 수가 없다.”

 

보고서의 전개과정과 시위진압 부분도 부실하게 기록됐다고 지적했는데.

 

“전개과정은 굉장히 엉성하다. 시위진압 및 수사과정 부분도 곧바로 부산시위와 마산시위로 들어간다. 하지만 보고서가 그렇게 작성돼선 안된다. 보고서에서는 항쟁이라고 표현했지만, 당시로선 반국가 폭도들의 난동으로 규정했다. 당시 박정희·최규하 정권이 이 사건을 어떤 인식으로 바라보고 진압했는지 정도의 기술이 있어야 한다. 그 조차도 없다. 당시 정부는 유신헌법에서 국민을 주권자라 인정하면서도 이 사건을 사태라고 인식, 군대를 동원해 국민을 진압했다. 당시 정부는 국민을 주권자로 인정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는 대목이다." 

 

보고서 결론 부분은 어떻게 보는가.

 

“심의위원회는 보고서에서 부마민주항쟁은 다수의 시민이 참여한 민중항쟁으로서 유신정권의 내부 분열을 촉진시켰고, 유신체제를 붕괴시키는 10·​26 사건의 결정적 계기가 됐다고 한다. 상당히 상투적인 결어다. 부마민주항쟁의 후폭풍이 우리나라 사회 전반에 나타났음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고찰하지 못했다. 당시 현장에서 잡혀갔던 대다수 시민들은 박정희 전 대통령이 죽고 나서도 한동안 부산교도소에 갇혀 있었다. 1979년 12월7일 긴급조치 9호가 해제되면서 풀려났다. 더욱이 전투적으로 항쟁에 참가했던 사람들은 ‘소요죄’라는 죄명으로 전두환 신군부의 재판을 받고 1980년도 연말쯤 뒤늦게 풀려 나왔다. 박정희 전 대통령 사망 후 유신헌법은 폐기되지 않았고 유신체제의 핵심 인물인 전두환 전 대통령 등은 그대로 남아 유신헌법에 따라 정권을 잡았다. 유신체제가 무너졌다고 주장할 수 있는가. 앞뒤가 맞지 않는 결론이다.”  

 

보고서에선 항쟁 중 사망자를 확인할 수 없다고 한다. 이에 대한 견해는.

 

“총체적 부실의 핵심은 부마민주항쟁의 순교자를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고 유치준씨 사망 사건이 대표적인 예다. 심의위원회는 당시 유치준 사건은 절차에 따라 처리된 것으로 보이며, 유족 주장대로 경찰 진압에 의한 사망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진술이나 객관적 자료가 없어 유치준을 부마민주항쟁 사망자로 판단할 수 없다고 봤다. 하지만 부마민주항쟁 10주년 기념 자료집을 만들면서 남부희 위원으로부터 기증받은 자료에는 유씨에 대한 변사체 발생 기록이 나온다. 사실 이 기록은 당시 경남신문 사회부장으로 근무하던 남 위원이 입수한 자료를 보관해오다가 1989년 10주년 기념사업에 즈음 우리 측에 기증한 경찰 내부 보고서다. 경찰 자료임에도 유족은 나타나지 않다가, 지난 2011년 우리 측이 부마민주항쟁특별법 제정 위원회를 구성해 활동할 때 마침내 유족이 나타났다. 고인의 신원을 제적등본으로 확인했는데, 남 위원이 기증한 경찰 보고서와 100% 일치했다. 또 심의위원회에 이같은 자료를 모두 제공했다. 하지만 고인은 끝내 부마민주항쟁 관련 사망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심의위원회는 고인을 누구 죽였는지 알 수 없는 행려자라고 주장한다. 당시 경찰이 행려자 시신을 어떻게 유족에게 인도하고, 유족이 묘를 만들어 제사를 지낼 수 있단 말인가. 유씨 사망 관련 부분은 유족 요구대로 보고서에서 전체 삭제하거나, 아니면 유족이나 관련 단체가 납득할 수 있게 전면 수정해야 한다.”

 

결과적으로 심의위원회가 준비하고 있는 보고서를 어떻게 평가하는가.

 

“엉터리 보고서다. 이 보고서는 몇 사람이 몇 달 동안 수정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이번 심의위원회는 보고서 발표를 포기하고, 다른 위원회가 구성돼 재조사할 수 있도록 넘겨야 한다. 이 보고서가 절대 채택돼선 안된다. 조사를 부실하게 했으니 당연히 부실한 보고서가 나왔다. 정부의 한 위원회가 이런 부실 보고서를 냈다는 사실은 국가의 격을 실추시키는 행위다. 심의위원회 활동 시한을 연장해야 한다. 그 이후 위원을 교체해야 한다. 진상을 제대로 파악해야 한다. 그래야만 민주 헌정질서를 바로 세우고 국민 저항권을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부마민주항쟁 관련자의 명예회복 및 보상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2014년 10월13일 공식 출범했던 심의위원회는 오는 4월12일까지 최종 보고서를 발표하고 채택하게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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