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 검사가 쏘아올린 공, ‘미투 쓰나미’ 돼 한국 사회 덮쳤다
  • 조유빈 기자·하재근 문화 평론가 (you@sisajournal.com)
  • 승인 2018.02.27 11:15
  • 호수 14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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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정치계 넘어 문화계까지 번진 #me too…침묵 강요받던 피해자들 깨워

 


여성들의 침묵이 깨졌다. 그동안 음지에서 똬리를 틀고 있던 성폭력이라는 병폐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성범죄를 고발하는 ‘미투 운동(#me too)’은 최근 서지현 창원지검 통영지청 검사가 안태근 전 법무부 국장의 성폭력을 폭로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법무부와 검찰이 전반적인 진상조사에 나섰고, 후배 검사를 성추행한 혐의로 한 부장검사가 구속되는 일도 벌어졌다. ‘후폭풍’은 컸다. 검찰에서 시작된 미투 운동에 정치계가 동참했다. 성폭력 피해를 입고도 보복이 두려워 전전긍긍해야 했던 대학생들도 하나둘씩 입을 열기 시작했다. ‘미투 물결’은 결국 또 하나의 ‘철옹성’으로 여겨지던 문화예술계를 덮쳤다.

 

이 여성들의 폭로에 한국 사회는 뜨겁게 반응했다. 그동안 성폭력 피해 사실을 드러낸다는 것은 한국 사회에서 익숙하지 않은 영역이었다. 하지만 언론이 성추문을 고발하는 미투 목소리를 샅샅이 찾기 시작했고, 최영미 시인이 계간 《황해문화》 2017년 겨울호에 게재한 시가 뒤늦게 조명됐다. ‘노털상 후보로 거론되는 En 선생’의 성추문을 고발하는 《괴물》이라는 시였다. 누가 봐도 노벨상 단골 후보이자 한국 문학계 거목인 고은을 가리키는 내용이었다.

 

서 검사의 폭로를 계기로 미투 운동에 호응할 만반의 준비가 돼 있던 한국 사회는, 유명 시인 고은에 대한 고발에 강하게 반응했다. 오랫동안 행해졌고 많은 사람들이 쉬쉬했던 악습이 마침내 세상에 드러난 것이다. 그동안 침묵하던 문단계 인사들도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했다. 류근 시인은 “1960~70년대부터 공공연했던 고은 시인의 손버릇, 몸버릇을 마치 처음 듣는 일이라는 듯 소스라치는 척하는 문인과 언론의 반응이 놀랍다”며 “소위 ‘문단’ 근처에라도 기웃거린 내 또래 이상의 문인 가운데 고은 시인의 기행과 비행을 들어보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되나. 심지어는 눈앞에서 그의 만행을 지켜보고도 마치 그것을 한 대가의 천재성이 끼치는 성령의 손길인 듯 묵인하고 지지한 사람들조차 얼마나 되나”라고 꼬집었다. 그동안 쉬쉬해 왔던 문단계 자체가 ‘침묵의 카르텔’이었다는 것이다.

 

2월1일 ‘미투(me too)’ 캠페인에 동참하는 대구 지역 시민단체 회원들이 진상규명과 대책마련을 촉구하며, 성 평등과 평화로 향하는 꽃길을 걸어가라는 의미를 담아 흰 장미를 대구지방검찰청 입구에 뿌렸다. © 사진=뉴스1

 

무너진 문화예술계의 철옹성

 

이렇게 분위기가 무르익자 마침내 한국 문화예술계의 ‘철옹성’은 붕괴되기 시작했다. 고발자들이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이다. 출발은 연극계였다. 한 공연 관계자가 SNS를 통해 “2년 전에 연극배우 이명행으로부터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당시 작품 연출가에게 이 사실을 알렸지만 오히려 작품에서 빠지라는 요구를 받았다”며 연극계 카르텔까지 고발했다. 이명행은 사과문을 내고 출연 중인 작품에서 중도하차했다.

 

이때부터 ‘공연계에서 성폭력 논란은 과거부터 비일비재하게 들어왔다’ ‘피해자가 공연계를 떠날 각오를 하지 않는 이상엔 문제제기가 쉽지 않은 상황’ ‘대학 때 엠티 가서 술 먹고 자고 있던 여자애들 다 주물러댔던 남자 선배는 좋은 이미지로 광고까지 나왔다’ 등 연극계 인사들의 증언이 보도되면서, 과연 용기 있는 피해자가 나서서 실명으로 고발할 것인지에 관심이 모아졌다.

 

이 과정에서 연극계 거대 권력인 이윤택씨의 성추문 사건이 터진다. 이윤택씨는 극단 연희단거리패를 이끌며 밀양연극촌을 세운 인물로, 연극계에서 큰 산맥과 같은 인물이다. 그가 과거 국립극단에서 성폭력을 행사했다가 국립극단에서 배제됐다는 보도가 뒤늦게 나왔다. 당시엔 박근혜 정부에 밉보여 블랙리스트에 올랐기 때문이 아니냐는 추측이 있었지만, 이제야 그 이유가 성추문인 것으로 밝혀졌다.

 

이 보도가 나올 때까지만 해도 공식적으로는 ‘유명 연출가 A씨’로 지칭됐다. 하지만 극단 미인의 김수희 대표가 직접 ‘미투’ 폭로에 나서면서 이윤택이라는 이름이 마침내 공개되기에 이른다. ‘내가 속한 세계의 왕’이었던 이윤택씨가 부적절한 안마를 시켰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추가 폭로들이 이어지면서, 심지어 성폭행을 당해 낙태를 했다는 한 배우의 주장까지 나왔다. 문화예술계가 발칵 뒤집혔고, 결국 이윤택씨가 나서 공개 사과하기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 사과에는 진정성이 없었다. 또 다른 폭로가 나왔고, 피해자들은 공동 법적 대응까지 예고했다.

 

이윤택씨의 사과 이후 또 다른 폭탄이 터진다. 이윤택씨 못지않은 연극계 거대 권력인 연출가 오태석씨의 성추문이 터진 것이다. 배우 출신 A씨가 ‘ㅇㅌㅅ’이라는 연출가에게 23년 전 성추행을 당했다고 폭로했다. 여럿이 술을 마시던 고깃집에서 테이블 아래로 다리를 만졌다는 것이다. 합석한 다른 사람들은 침묵했다고 한다. 뒤이어 다른 여성이 과거 오태석씨 연극의 뒤풀이 자리에서 비슷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면서, 오태석이란 이름이 공개됐다. 두 명의 ‘큰 어른’이 연이어 추문에 휩싸이자 연극계는 충격에 빠지는 한편, 일이 이 지경에 이를 때까지 방조한 문화예술계 시스템도 문제라는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그동안 한국에서의 미투 운동은 요원할 것으로 여겨져 왔다. 한국 문화예술계의 기본적인 속성이 있고, 그동안 여러 가지 소문도 있었기 때문에 많은 피해 사례가 누적됐을 것으로 추정되지만, 스스로 자신이 성범죄 피해자임을 드러내기에 아직 한국 사회의 분위기가 성숙하지 않다는 이유에서였다. 문화예술계 성폭력 가해자들이 보통 강력한 ‘권력’이어서 피해자와 업계 관계자들이 그들의 눈치를 보지 않을 수 없다는 이유도 있었다.

 

그러나 미국 대중예술계 여성들이 2016년 10월 미투 운동에 참여하면서 한국 사회에도 작은 움직임이 일었다. 한국 사회의 미투 운동 역시, 시작은 문화예술계였다. 같은 달 SNS를 통해 배용제 시인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터져 나온 것이다. 당시 피해자들은 ‘#문단_내_성폭력’이라는 해시태그를 붙여 배 시인의 성희롱 발언과 성관계 제의 등을 폭로했다. 배용제 시인은 미성년자였던 제자들을 성추행·성폭행한 혐의로 기소돼 지난해 9월 1심에서 징역 8년을 선고받았지만 항소했다.

 

이후 다른 피해자들도 입을 열었다. 문화예술계에 만연한 성폭력 문제가 연이어 폭로됐고, 가해자로 지목된 사람 중 일부는 사과문을 게시하고 활동 중단이나 출간 보류를 선언하기도 했다. 뒤이어 한샘과 현대카드 등 직장 내 성폭력 피해 폭로도 이뤄졌다. 그러나 오히려 피해자가 명예훼손죄나 무고죄로 역고소를 당하는 등 피해를 입는 일들이 벌어졌다.
 

이 같은 2차 피해에 대해 조현욱 한국여성변호사회장은 “피해자들은 일단 명예훼손 고소를 당하면 혐의가 없다는 것을 밝히기 위해 수사기관에서 조사를 받아야 한다. 그 절차 자체가 피해자를 두렵게 하고, 결국 피해에 대한 폭로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라며 “우리나라는 사실을 말해도 그 내용이 타인의 명예를 훼손하면 명예훼손죄가 성립한다. 적어도 사실을 말했을 때는 명예훼손죄로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 개정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조 회장은 또 “비슷한 폭로는 반복됐던 일이다. 이전에도 문화계 내의 성폭력 문제가 대두된 적이 있지만 흐지부지 끝나고 말았다”며 “잔잔한 고발에 그치지 않고 사회 전반적인 분위기가 바뀔 때까지 지속돼야 한다. 이번에는 법조계를 넘어 문단, 연극·영화계, 대학 등 다양한 곳에서 피해 폭로가 지속되는 등 큰 변화가 일고 있다”고 평가했다.

 

이번에 쓰나미를 몰고 온 미투 운동은 확실히 다르다. 역고소 등을 우려한 익명 폭로가 대세였지만, 이제는 서 검사를 비롯해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고 성폭력 피해를 폭로하는 피해자들이 늘어나고 있다. 사실을 부인하고 반성을 하지 않는 가해자와 조력자에 대한 분노 역시 피해자들의 신상을 드러내게 했다.

 

이윤택씨에게 성폭력을 당했다고 폭로한 배우 홍선주씨는 김소희 연희단거리패 대표가 폭로 내용을 부인하자, SNS를 통해 자신의 신상을 밝히고 해명을 요구하기도 했다. 이제 법조계를 넘어 문화계를 덮친 미투 운동은 단순히 피해 사실 폭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적극적인 폭로에 나서면서 해명과 처벌을 요구한다. 여성단체들도 이에 동참해 고질적 병폐 개선을 해야 한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연극연출가 이윤택씨가 2월19일 서울 종로구 ‘30 스튜디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연희단거리패 단원들이 항의와 문제를 제기했고, 그러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번번이 제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고 이런 악순환이 오랫동안 계속됐다”며 “응당 어떤 벌도 받겠다”고 밝혔다. © 시사저널 최준필

 

배우 조민기의 여학생 성추행도 폭로돼

 

최근에는 배우이자 청주대 교수인 조민기씨가 추문에 휩싸였다. 인터넷 게시판에 ‘연예인 ㅈㅁㄱ씨’가 학교에서 몇 년간 여학생들을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나온 것이다. 이후 언론 보도로 조민기라는 이름이 드러나자, 조민기씨 측은 ‘명백한 루머’라며 적극적으로 부인했다. 이러한 조민기씨의 해명은 도리어 더 강력한 고발을 촉발했다. 청주대를 졸업한 신인 배우 송하늘이 자신의 실명을 공개하고 장문의 글을 써 조민기씨의 성추행을 폭로한 것이다. 조민기씨가 학교 주변에 있는 자신의 오피스텔로 학생들을 불러 부적절한 행위를 했다거나, 노래방에서 부적절한 접촉이 있었다는 등의 주장이다. 다른 학생들의 폭로도 잇따르면서 경찰이 수사에 나섰다.

 

이외에도 다양한 사례들이 나오고 있다. 밀양연극촌 촌장인 하용부 인간문화재에게 성폭행을 당했다는 피해자의 폭로도 나왔다. 현재 사실관계가 규명될 때까지 문화재청의 지원금이 보류된 상태다. 뮤지컬 《타이타닉》 《시라노》 등에서 음악감독을 맡은 변희석씨가 성희롱과 동성 성추행 등을 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또 경남 김해에서 유력한 극단 활동을 했던 연출가가 10년 전에 제자인 여중생을 성폭행했다는 주장이 제기돼 경찰이 수사에 나서기도 했다. 영화계 유명 조연배우에 대한 의혹도 제기됐다.

 

최근 배우 조민기씨가 학생들을 성추행했다는 폭로가 이어지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그 밖에 SNS를 통해 더 많은 사건들이 거론되고 있다. 하지만 이조차도 빙산의 일각에 불과하다는 지적이다. ‘연극계 유명 인사 중 몇몇을 뺀 대부분이 부적절한 행위의 가해자’라는 주장도 나왔다. 특히 연예계의 문제는 장자연 사건 이래로 대단히 심각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연예계는 일단 터지면 너무나 크게 터질 것이기 때문에 도리어 비교적 잠잠하다는 분석도 있다.

 

피해자들이 용기를 내 고발에 나설 수 있도록 응원하는 ‘위드유(with you·당신과 함께하겠다)’ 운동도 나타났다. 성폭력 관련 글을 올리며 ‘위드유’라는 해시태그를 다는 운동이다. 뮤지컬 배우 김지우씨는 “17살 때부터 당연하게 내뱉던 ‘어른’들의 언어 성폭력을 들으며 무뎌져 온 나 자신을 36살이 된 지금에야 깨닫게 됐다. 마음을 담아 지지한다”며 ‘위드유’ 해시태그를 달았다. 이외에도 많은 연예인과 일반 네티즌이 동참하고 있다. 창작집단 LAS는 단원들의 손바닥에 ‘위드유’라고 적은 사진들을 공개해 화제가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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