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열악한 환경에선 ‘태움’ 당할 수밖에 없다”
  • 조문희 기자 (moonh@sisajournal.com)
  • 승인 2018.02.23 17:15
  • 호수 14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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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호사 내에서만 회자되는 ‘태움’ 문화의 본질은 “살인적인 업무량”

 

꽃다운 나이 27세. 제대로 피어보지도 못한 채 한 여성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서울 아산병원 신입 간호사 박모씨다. 박씨는 설 연휴 첫날인 2월15일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창문 밖으로 몸을 던졌다. 이 여성은 왜 안타까운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유족은 박씨가 “병원의 ‘태움’ 문화 탓에 벼랑 끝으로 몰렸다”고 주장했다. 극심한 업무 스트레스를 못 이겨 자살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간호사들 사이에서 회자되는 ‘태움’ 문화는 선배 간호사가 신임 간호사를 ‘재가 될 때까지 태우며’ 가르친다는 데서 유래했다. 10여 년 전부터 주목받았고 수많은 대책이 나왔지만 현실은 달라지지 않았다. 선임이 후임을 괴롭히는 일은 다른 집단에서도 흔하다. 그런데 그중에서 유독 간호사 직업군의 군기 문화에만 ‘태움’이라는 신조어까지 붙은 이유는 왜일까. 이는 간호사 직업군의 ‘구조적 문제’와 연관이 있다. 열악한 업무환경이 신임 간호사를 벼랑 끝으로 내몰아서다.

 

생명을 다루는 업무상 간호사들은 기본적으로 예민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최장 16시간을 일한다. 화장실 갈 시간도 없이 온종일 서 있어야 한다. 그래도 일손은 모자란다. 신입을 500명씩 뽑아도 그중 3분의 1인 170명이 그만두는 게 현실이다. 남은 사람이 일을 떠맡을 수밖에 없다. 이로 인해 쌓이는 스트레스는 후임들에게 전가될 수밖에 없다. ‘태움’ 당한 후배는 또 퇴사한다. 이렇게 악순환이 반복된다.

 

자료: 간호사·간호학생 전용 온라인 커뮤니티와 페이스북 대나무숲 페이지에 게시된 ‘태움’ 사례

 

해법은 “1인당 환자 수를 법제화하는 것”

 

지난해 7월 조성현 서울대 간호대학 교수가 국회에서 열린 ‘간호사 처우개선 토론회’에서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간호사들은 평균 10시간을 근무하고 시간외 근무로 2시간을 더 일한다. 그중 식사와 화장실을 이용하는 시간은 평균 21분에 그쳤다. 그마저도 약 39%가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다”고 말했다. 앉을 새도 없이 돌봐야 하는 환자는 병원 규모에 따라 최대 40여 명에 달한다. 조 교수에 따르면, 우리나라 간호사 1인당 환자 수는 43.6명이다. 미국(5.3명)의 8배가 넘는다. 병원간호사회의 ‘병원간호인력 배치현황 실태조사’에서도 2016년 일반병동 간호사 1명이 담당한 환자 수는 19.5명으로 조사됐다.

 

그런데도 임금은 적은 편이다. 한국보건산업진흥원의 간호사 활동현황 실태 조사(2014)에 따르면, 신규 간호사 초임 연봉은 종합병원의 경우 2748만원에 불과하다. 조성현 교수는 지난해 토론회에서 “종합병원 간호사의 임금 수준은 평균 근로자 임금의 89%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이렇듯 업무가 과중한 데다 임금은 취약하다 보니 간호사들이 도중에 일을 그만두는 경우가 속출하고 있다. 대한간호협회는 지난해 8월 “2016년 간호사 이직률은 15.7%”라고 발표했다. 그중 신규 간호사는 35.3%에 달했다. 2011년 30.3%였던 신규 간호사 이직률은 오히려 5%포인트 증가했다. 이는 전체 산업별 이직률에 비해 8.2배 높은 수치다. 입사 2년 차인 한 지방 병원 간호사 A씨는 “하루 16시간씩 환자를 40명 넘게 돌보는 현실에서 문제는 계속 악순환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내 일 하기도 바쁜데 후임들이 계속 그만둬 2년 내내 가르치고 있어 고통스럽다”고 했다. 그런 A씨는 자신도 지난해 여름 한 후임에게 소리를 지르고 차트를 내던졌다고 털어놨다.

 

간호사의 근무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전국 간호학생·간호사 연합인 간호사연대NBT 측은 “1인당 환자 수 법제화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NBT는 “인력부족이 태움 문제의 핵심 원인”이라면서 “질 좋은 인력이 떠나갈 수 없도록 근로시간과 환자 수를 법에 명시해 지키지 않으면, 향후 강력하게 처벌할 필요가 있다”고 설명했다.

 

현재 법정 간호 인력은 간호사 1인당 입원환자 2.5명이다. 그러나 별다른 처벌 규정은 없다. 간호등급제를 통해 간호사 1인당 환자 수가 적을수록 높은 등급을 부여해 입원료 수가를 책정하는 데 가산점을 줄 뿐이다. 이마저도 신고를 안 하면 그만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따르면, 2016년 3분기 병원 8001곳 중 90%(7133곳)가량이 간호 인력을 신고하지 않았다. 신고한 868곳 가운데 법정 기준을 지켜 1~3등급을 받은 병원은 341곳으로 절반이 채 안 됐다. 지난 1월, 39명의 목숨을 앗아간 화재참사가 발생한 경남 밀양 세종병원도 법적 기준을 충족하지 않았다. 세종병원의 적정 간호사 수는 35명이었으나,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신고된 실제 인원은 단 3명에 불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간호사들 의견 반영하려면 회장 직선제 필요”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해당 내용의 청원 글이 100개를 넘어섰다. 청와대 국민청원 홈페이지에서 ‘간호사’와 ‘법’을 검색한 결과, 133건이 검색됐다. 그중 ‘간호사 1인당 담당 환자 수를 법으로 제한해 주세요’라는 글은 2월22일 오후 4시 기준 1만1085명의 청원을 받았다. “중환자실 간호사는 1명의 환자만 맡게 해 달라”는 내용을 담은 ‘문재인 대통령님 간호사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말아주세요’라는 글에는 3만2000여 명이 서명했다.

 

한편 간호사들을 대변하는 대한간호협회(간협)가 전혀 간호사들의 권익을 대변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거세다. 간호학생·간호사 온라인 커뮤니티에는 “간협 당신들도 공범”이라며 “발 벗고 나서야 했던 간협이 방관만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이 2월15일 이후 10여 개 올라왔다. 간호사연대NBT는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간협은 보다 적극적으로 나설 필요가 있다”며 “간호사 개개인의 목소리를 반영하려면 지금의 간선 회장 선거를 직선제로 바꿔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실제 간협은 5개 보건의료단체(대한의사협회·대한치과의사협회·대한약사회·대한한의사협회·대한간호협회) 중 유일하게 간선제로 임원을 뽑는다. 때문에 간호사 전체 ‘민의’를 제대로 반영하지 못한다는 비판을 받았다.

 

이에 대해 간협 홍보국은 “간협은 다른 단체와 달리 회원 수가 20만 명이 넘어 직선제는 현실적으로 어렵다”면서도 “관련 연구가 진행 중이어서 검토 후 타당하면 도입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한 간협은 서울 아산병원 간호사 자살 사건에 대한 대처가 부족하다는 지적에 대해 “경찰 조사 결과가 나오지 않은 상태에서 섣불리 대응할 순 없다”며 “결과 발표 이후 조치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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