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활동하며 지역신문 만드는 ‘전대협’ 출신 이지상씨
  • 구민주 기자 (mjooo@sisajournal.com)
  • 승인 2018.02.05 11:37
  • 호수 14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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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 출신 이지상씨, 거리에서 보낸 청춘을 행복으로 기억하다

 

“계속 말해도 돼요?”

 

현재 무슨 일을 하시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이지상씨의 대답은 한동안 막힘없이 이어졌다. 남북철도 연결을 꿈꾸는 시민단체 ‘희망래일’ 이사부터 서울 은평구 지역신문 ‘은평시민신문’ 대표, 인권연대 운영위원, 대학 교수까지, 이씨가 가진 명함은 다양했다. 그러나 그는 기타를 들고 사람을 노래하는 ‘가수’로 소개될 때 가장 익숙하다. 30년 전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전대협)·서울지역총학생회연합(서총련) 노래단 출신으로, 치열한 투쟁 현장 한가운데서 노래하던 모습이 그가 가진 가장 길고 강렬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이씨는 1985년 경희대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했다. 반공의식 투철한 경기도 포천 군사지역에서 나고 자라, 그 당시 치열했던 사회문제에 한동안 멀뚱했다. 그는 입학 이듬해 군에 입대해 1989년 학교로 돌아왔다. 복학 후 맞닥뜨린 사회는 이전과 달리 보였다.

 

“5월 광주에 대한 공론화는 여전히 안 돼 있었다. 학내에선 여전히 학생들이 숨어서 비디오를 보고 있었다. 할 수 있는 거라곤 기타를 드는 일뿐이었다. 단과대 노래패를 만들어 활동하다 당시 4기 체제였던 전대협 문화국과 얘기해 ‘전대협 노래단 준비위’ 이름으로 활동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대학 4년이 다 흘렀다.” 이후 이씨는 서총련 노래단 ‘조국과 청춘’으로 이름을 바꿔 활동하며 당시 학생운동 현장에서 자주 불린 노래를 만들었다.

 

1992년 경희대 노천극장에서 열린 전국대학생통일노래한마당 행사에서 노래하는 이지상씨 © 사진=이지상 제공 / © 시사저널 임준선

 

“그때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았다”

 

그날의 기억이 현재 이씨의 삶에 얼마나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물었다. 그는 망설임 없이 “그게 곧 전부”라고 답했다. “대학생활 중 그런 모습을 보지 못했다면 과연 내가 지금처럼 살았을까. 그땐 어떤 거창한 이념은 잘 몰랐고 그저 정서적으로 ‘사람이 죽네’ ‘뭔가 잘못됐는데’ 느낄 뿐이었다. 그 마음이 작은 행동들로 이어지다 보니 자연히 지금과 같은 삶이 만들어진 것 같다.” 이씨는 30년 전과 유사한 일들이 최근까지 벌어져왔기 때문에 여전히 노래할 일은 많다고 말한다. 지난해 촛불광장에도 과거 그와 노래단을 함께 이끌었던 친구들이 무대에 섰다.

 

현재 삶에 단단한 밑거름이 된 경험이다. 하지만  ‘다시 그때로 돌아가도 같은 삶을 살겠냐’는 물음엔 단호하게 “싫다”고 답했다. “한 번 경험해 봤으니 다르게도 살아보고 싶다”는 것이다. 단, 어떤 삶을 살든 당시 자신이 가졌던 사회를 향한 ‘시선’은 그대로 지키고 싶다고 강조했다. 그는 “그때 내가 택할 수 있는 최선의 삶을 살았던 건 분명하다”며 “그게 나를 충분히 행복하게 했고, 그래서 지금 삶에도 만족한다”고 말했다.

 

‘거리에 피어나는 동지의 사랑…우리의 청춘은 행복하여라’

(조국과 청춘 ‘내가 그대를 처음 만난 날’, 1992)

 

그의 노래 구절처럼, 그는 거리에서 보낸 자신의 청춘을 행복이라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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