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의 인성,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 신동기 인문경영 칼럼니스트 (dgshin0825@daum.net)
  • 승인 2018.01.08 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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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동기의 잉여Talk (2)] ‘이성적이고 민주주의적 독립된 개인’ 만드는 게 진정한 인성교육

 

대학 시간강사를 하고 있는 선배로부터 전화가 왔다. 학장이 다음 학기부터 ‘인성교육’ 관련 과목을 하나 더 맡아달라고 하는데, 무엇을 어떻게 가르쳐야 할지 잘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일단은 ‘고급 진(?) 사회적 약자’ 시간 강사에게 학장이 한 과목을 추가로 부탁했으니 그것은 선배한테 좋은 일이었다. ‘강사라고 다 같은 강사가 아니야. 나 이런 강사야’ 하고 은근히 자랑하려고 전화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얼핏 들었지만 그것은 아닌 듯 했다. 진지했다. 

 

나는 둘 중 하나라고 했다. 그냥 녹음기 틀듯이 ‘인사를 잘 해라’, ‘예의를 지켜라’, ‘선공후사(先公後私) 해라’, ‘나보다 남을 생각해라’고 가르치든지, 아니면 ‘철학하는 것’을 가르치라고 했다. 선배는 ‘엥? 웬 철학?’하는 눈치였다.

 

몇 년 전 대학에서 겸임교수로 있을 때 ‘윤리경영’ 과목을 가르쳤다. 윤리경영 교재들이 주로 ‘무엇이 윤리인가’ 또는 윤리경영 관련 ‘기술적 지식들’을 다루고 있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가르치고 배울 것이 별로 없었다. 뻔한 내용들이었다. ‘회계분식을 하면 안된다’, ‘부정한 돈을 받아서는 안된다’, ‘윤리경영은 기업에 이익이 된다’ 같은 내용은 누구나 다 익히 ‘알고’ 있는 것들이었다. 그것도 지겨울 정도로. 

 

영화 《공자춘추전국시대》의 한 장면 © (유)영화사 화수분 제공

 

왜 윤리적이지 않으면 안되는가

 

그리고 ‘기술적 지식들’은 윤리와 별 관계가 없었다. 그것을 안다고 해서 없던 윤리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날 것도 아니고, 또 윤리가 결여된 비대한 지식이 얼마나 거악(巨惡)으로 작용하는지 학생이나 교수 모두 매일같이 뉴스를 보면서 사무치게 느끼고 있는 바였다. 결국은 직접 책을 썼다. ‘무엇이 윤리인가’가 아닌, ‘왜 윤리적이지 않으면 안되는가’를 따지는 골치 아픈 책을. 

 

많은 사람들이 인성 하면 흔히 ‘착한’, ‘윗사람에 대한 예의 바른‘, ‘말 잘 듣는’과 같은 개념을 머리에 떠올린다. 공자 때의 인성이다. 공자 때는 아직 문명화가 많이 진행되지 않았다. 따라서 사람과 동물 간의 간극이 그리 크지 않았다. 사람들을 문명화 하고 순치시킬 필요가 있었다. 또 봉건제적 신분제 유지를 위해서도 그런 인성 개념이 필요했다. 논어3권 소인학도즉이사야(小人學道則易使也․학민문화사)에서 공자가 ‘소인이 도를 배우면 부리기 쉬워진다’라고 한 말은 바로 그런 의미이다. 

 

인성교육은 귀족사회의 노예나 영화 아일랜드에서와 같이 복제인간을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인성, 즉 ‘사람의 성품’을 갖추게 하는 것이다. 물론 그 성품은 이 시대에 맞는 성품이다. 사람만이 가지고 있는 성품이라면 그 것은 바로 ‘이성’이다. 이성은 ‘독립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독립된 주체로서 논리와 사실에 바탕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해 그것을 표현하고 또 실천하는 것이다. 

 

그 다음은 타인과의 관계인 사회적 이성이라 할 수 있는 민주주의적 사고방식과 태도이다. 사람은 동물과 같이 무리지어 살지만 동물과 달리, ‘사람’이라는 조건에서는 모두 평등하다. 그것은 ‘독립된 개인’의 근거인 ‘이성’을 동일하게 가졌다는 데에서 그렇다. 민주주의적 사고방식은 다름이 아니다. 상대방을 나와 동등하게 대하는 것이다. 오만도 굴욕도 아닌 당당하고 균형 있게, 그리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호의적으로 대하는 것이다. 

 

 

말 잘 듣고 순한 사람 만드는 게 인성교육?

 

따라서 지하철에서 대학생이 노인에게 자리를 양보했다면 그것은 단순히 상대가 연장자여서가 아니라 ‘신체적 약자’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화재와 같은 비상 상황 발생 시 여성을 먼저 대피시킨다면 그것은 꼭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남성보다 근력이 부족한 약자’이기 때문이어야 한다. 그것이 사람을 이성적 주체로 대접하는 것이고 민주주의적으로 배려하는 것이다.

 

칸트는 학생들에게 늘 ‘철학을 배우지 말고, 철학함을 배우라’고 말했다. 그 철학함은 다른 것이 아니다. 칸트가 스스로 해석한 것처럼 ‘이성을 스스로 사용하는 것’이다. 바로 스스로 생각하여 판단하고 그 판단에 따라 행동하고 그리고 그 결과를 스스로 책임지는 것이다. 자기 몸과 자기 정신의 주인, 즉 독립된 개인이 되기 위한 출발이다. 인성교육은 ‘말 잘 듣고 순한 사람’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이성적이고 민주주의적인 독립된 개인’을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문명은 낮고 귀천의 차별은 높았던 공자 때의 인성, 그 때는 맞고 지금은 틀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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