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자연 사건 ‘판도라 상자’ 열리나
  • 정락인 객원기자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8.01.04 13:38
  • 호수 14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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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과거사위 재조사 안건으로 오르내려…미완의 사건 ‘장자연 죽음’ 진실 밝혀질까

 

대검찰청 개혁위원회가 검찰 과거사위원회에 장자연 사건을 검토 대상으로 제안하겠다는 언론보도가 나오면서 ‘장자연 사건’이 8년 만에 재조명되고 있다. 검찰 과거사위원회는 검찰의 부적절한 사건 처리 의혹을 조사하는 곳이다. 하지만 실제 재조사 결정이 내려질지는 아직까지 알 수 없으며, 재조사에 들어간다고 해도 어디까지 실체를 밝힐 수 있을지도 미지수다. ‘여배우 장자연의 죽음’은 숱한 의혹만 난무했던 ‘미완의 사건’이다.

 

지난 2009년 3월7일 저녁 7시40분쯤, 경기도 분당시 이매동의 한 빌라에서 배우 장자연씨(30)가 숨진 채 언니에게 발견됐다. 자택 내부 1층과 2층 사이 계단 난간에 목을 맨 상태였다. 그녀는 당시 인기 드라마였던 KBS 《꽃보다 남자》에 조연으로 출연 중이었다. 경찰은 유서가 나오지 않고 타살 혐의점이 없자 우울증에 따른 단순 자살로 처리했다.

 

장씨가 숨진 다음 날인 3월8일 전 매니저 유아무개씨는 자신의 미니 홈페이지에 의미심장한 글을 남겼다. 그는 장자연의 사망과 관련해 심경고백이 들어 있는 문건을 갖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여배우 장자연씨의 자살과 관련해 술접대와 성상납 의혹이 제기됐지만 그 실체가 밝혀지지 않은 채 경찰수사가 종결됐다. © 시사저널 이종현·연합뉴스

 

자필편지 공개, 성접대 폭로

 

고인의 장례가 끝난 3월9일 오후에는 ‘자연이에게’라는 제목의 글을 통해 “자연이를 아는, 아니 연예계 종사자는 자연이가 왜 죽었는지 알고 있을 것”이라며 “《공공의 적》이라는 영화가 생각난다. 단지 자연이가 단 한 명의 공공의 적과 싸울 상대로 나를 선택한 것이다. 공공의 적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고통을 주고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이어 유씨는 “공공의 적의 말을 믿고 지키려는 사람들에게 말하고 싶다. 더 이상 공공의 적을 지키려 하지 마라. 자연아 내가 절대 이 싸움을 포기한 건 아니다. 꼭 지켜봐줘”라고 적었다. 장씨의 죽음에 배후가 있음을 강하게 암시한 것이다.

 

장씨가 숨진 지 6일 후인 3월13일 KBS 《9시뉴스》는 그녀가 죽기 전 유씨에게 보낸 자필 유서 형식의 문건을 공개했다. “저는 나약하고 힘없는 신인 배우입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습니다”라며 죽음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적나라하게 폭로했다.

 

여기에는 연예기획사 관계자, 대기업·금융업 종사자, 언론사 관계자 등 31명에게 100여 차례 이상 술접대와 성상납을 했고, 폭행까지 당했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또 접대 상대방의 소속과 직위까지 자세하게 적혀 있었다.

 

장씨는 문건에서 “PD들, 감독들, 재벌, 대기업, 방송사 관계자 등이 날 노리개 취급하고 사기 치고 내 몸을 빼앗았어요. 언제까지 이렇게 살아야 할지 미쳐버릴 것 같아요”라고 적었다. 극단적인 선택을 할 당시의 심경이 묻어나는 대목이다. 문건의 신뢰성을 강조하려는 듯 글 맨 마지막에 ‘09.2.28’이라는 날짜와 자신의 이름, 주민등록번호, 사인, 지장까지 남겼다.

 

문건에는 한 여배우의 비극적인 인생사가 비밀처럼 담겨 있었다. 언론에서는 이를 ‘장자연 문건’이라고 명명했다. 한 여배우의 자살, 그 배경이 담긴 문건이 세상에 공개되면서 여론이 들끓었다. 그동안 쉬쉬하며 추측만 나돌던 연예계의 어두운 면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충격을 줬다.

 

명단 전체 공개를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았다. 여성단체들은 연예인 지망생들을 접대에 이용하는 기획사의 인권 유린과 불법성을 성토하기 시작했다. 연예계와 사회 지도층의 추악한 단면이 드러나면서 우리 사회의 분노는 더욱 커져만 갔다. 자연히 ‘장자연 문건’에 등장하는 유명 인사들에게 전 국민의 이목이 쏠렸다. 온라인에는 금융계·언론계 등의 유력 인사들 실명이 거론된 ‘장자연 리스트’가 떠돌기 시작했다.

 

경찰도 수사팀을 꾸려 대대적으로 수사에 나섰다. 수사는 장씨의 거주지 관할인 경기 분당경찰서가 맡았다. 일각에서는 피해 당사자인 장자연씨가 자살했고, 유력 인사들이 관련된 이른바 ‘장자연 사건’을 제대로 수사할 수 있을지 의문을 나타냈다. 실제 이 사건을 덮으려는 시도가 없었던 것도 아니다. 자신의 이름이 문건에 들어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인사들은 ‘정치적인 의혹’까지 제기했다.

 

경찰은 KBS 보도 다음 날인 3월14일 장씨의 전·현 소속사를 전격 압수수색하고 관련 문건을 확보했다. 경찰은 문건의 진위를 확인하기 위해 국립과학수사연구연(국과수)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국과수는 “고인의 필적과 문건의 필적은 동일 필적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결론을 내렸다. 장자연씨가 직접 쓴 ‘자필 문건’이라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문건의 진위가 가려지면서 수사는 급물살을 타는 듯했다. 문건에 거론된 인사들의 소환도 불가피하게 됐다.

 

하지만 이상하게 수사는 더 이상 속도를 내지 않았다. 분당경찰서는 “주변 인물 10여 명을 참고인 자격으로 조사했고, 고인 등 6명에 대한 휴대폰 통화내역을 통신사로부터 받기 위해 영장을 집행했으며, 서울 청담동 소재 소속사 대표 김아무개씨의 집을 압수수색했다”고 밝혔다.

 

 

유력 인사 ‘면죄부 수사’에 그쳐

 

경찰은 4월24일 수사결과를 발표하고 수사 대상에 오른 총 12명 중 9명을 ‘접대강요·강제추행·명예훼손’ 등 혐의로 입건하고 사건을 종결했다. 문건에 오른 유력 인사들은 무혐의를 받아 모두 빠지면서 부실수사 논란을 키웠다. 경찰은 “술자리 접대를 받은 사실은 확인했으나, 범죄 관련성이 확실하지 않아 내사중지 또는 내사종결하기로 했다”고 해명했다.

 

이로써 장자연의 죽음을 둘러싼 술자리 접대 강요와 성접대 등 핵심 의혹 해소는 모두 물거품으로 끝났다. 경찰수사는 진실을 가려내기보다 오히려 유력 인사들에게 면죄부를 준 셈이 됐다. ‘축소·편파수사’라는 비난을 자초한 것이다.

 

이날 시사저널 편집국으로 분노하는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그중 한 명은 “이게 나라냐, 국민의 경찰이 맞느냐. 이런 나라에서 사는 국민이 불쌍하다”며 분개하기도 했다. 결국 장씨 사건과 관련해 기소되고 처벌된 사람은 두 명에 그쳤다. 소속사 전 대표인 김아무개씨와 전 매니저인 유씨뿐이었다. 김씨의 경우 징역 4월에 집행유예 1년을 선고받았는데, 이것 또한 장씨를 폭행·협박한 혐의다.

 

장자연 문건을 세상에 알린 전 매니저 유씨는 김씨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돼 ‘모욕죄’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사회봉사 160시간을 받았다. ‘장자연 리스트’의 핵심인 술접대나 성상납 강요로는 기소된 사람도, 처벌받은 사람도 없었던 것이다. 결국 죽은 사람만 억울하게 된 상황이 됐다.

 

그 후 이 사건은 흐지부지되며 다른 사건과 마찬가지로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러다 2년 후인 2011년 3월6일 SBS는 《8시뉴스》를 통해 장자연의 자필편지 사본 50통 203장을 입수해 “편지에 성접대를 강요한 인사 31명의 명단이 포함됐다”고 보도하며 다시 불씨를 댕겼다.

 

경찰은 3월8일 수감 중인 장자연의 지인 전아무개씨의 광주교도소 감방을 압수수색, 장자연 편지 원본 23장을 확보했다. 편지 원본이 장자연의 친필이 맞는지 국과수에 필적 감정을 의뢰했다. 하루 뒤인 3월9일 조선일보는 ‘장자연 리스트’에 거론된 조선일보 사장은 사실은 스포츠조선 전 사장이라고 해명하는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장자연 소속사 대표인 김씨가 스포츠조선 사장을 조선일보 사장이라고 호칭하면서 비롯된 오해라는 것이다. 그러면서 “장씨가 쓴 ‘조선일보 사장’은 조선일보 계열사인 스포츠조선의 전 사장인 것으로 명백히 확인됐다”고 강조했다.

 

조선일보 해명이 있은 지 하루 뒤인 3월10일 이종걸 민주당 의원은 이에 전면 배치되는 폭탄 발언을 했다. 이 의원은 이날 국회 본회의 5분 발언을 통해 “조선일보 사주 일가 술자리에 장자연이 있었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한 근거로 ‘2008년 9월 룸살롱에 불려나가 잠자리를 요구받았다’는 내용의 문건을 공개했다. 밑줄이 그어진 부분을 가리키며 “원래 조선일보 사장 이름이 있었는데 경찰이 지웠다”고 말해 파장을 불러왔다.

 

이 의원은 이어 “구체적 증거들이 새롭게 발견된 만큼 불기소 처분을 했던 인사들에 대해 철저하게 재수사해야 한다. 이번에도 제대로 수사를 않는다면, 국회가 특검을 통해서라도 진실을 규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유력 언론사 사장의 등장은 엄청난 폭발력을 가져왔다. 조선일보는 즉각 “사실이 아니다”라고 반박하며 이 의원 등을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하고 손해배상 소송을 제기했다.

 

SBS 보도와 이종걸 의원의 문건이 공개되자 경찰 부실수사에 대한 불만 여론이 커졌다. 배우 문성근씨는 조선일보 사옥 앞에서 ‘길 위에서 꽃 한송이 올립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장자연님. 문성근 올림’이란 글이 쓰인 피켓을 들고 1인 시위를 펼쳤다. 배우 김여진씨 또한 자신의 트위터에 “고 장자연씨의 죽음에 관한 모든 의혹을 밝혀주세요. 거기, 기자님 부탁합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조선일보는 자사와 장자연 사건의 연관성을 거론한 이종걸 의원을 비롯해 언론사 등을 연이어 고소했다. 하지만 법원은 조선일보의 손을 들어주지 않았다. 이에 불복해 항소했지만 그 후 취하했다. 법원이 또 다른 재판에서 조선일보와 사장이 장자연 사건과 관련이 없다고 판단했다는 이유에서였다.

 

한국성폭력상담소, 한국여성단체, 한국여성민우회 등 여성단체 회원 10여 명이 2009년 3월18일 분당경찰서 정문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장자연씨 죽음에 대한 성역 없는 경찰수사를 촉구했다. © 사진=연합뉴스

 

법원, 소속사 대표 술자리 접대 강요 인정

 

결국 이종걸 의원의 폭로도 그 실체에 제대로 접근하지 못한 채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치며 유야무야되고 말았다. SBS가 보도한 문건은 국과수 필적 감정 결과 가짜로 드러났다. SBS는 이에 대한 책임을 물어 보도국장과 사회부장 등을 징계하며 오보와 관련해 공식 사과문을 냈다. 문건 자체가 조작으로 밝혀짐에 따라 당시 경찰은 재수사를 하지 않기로 했다. 이렇게 장자연 사건의 실체는 아무것도 규명되지 않은 채 수면 아래로 완전히 가라앉았다.

 

2009년에는 그녀가 출연한 영화 《펜트하우스 코끼리》가 개봉됐다. 여기에는 장자연의 정사 장면과 자살 장면이 들어 있어 선정성 논란과 함께 죽은 사람을 마케팅에 이용한다는 비난도 있었다.

 

유족들은 2010년 10월 “죽음에 이르게 한 책임을 배상하라”며 장씨의 소속사 전 대표 김씨를 상대로 1억6000만원대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냈다. 2014년 10월12일 재판부는 “김씨의 요구나 지시로 장씨가 저녁식사나 술자리 모임에 자주 참석해 노래와 춤을 췄고, 태국 등지에서의 골프 모임에도 참석했다”며 “비록 형사 사건에서 술접대 강요나 협박이 증거부족으로 인정되지 않았지만, 술자리 참석 등이 장씨의 자유로운 의사로만 이뤄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며 유족에게 24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사실상 소속사 대표로부터 술자리 접대를 강요받았음을 인정한 판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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