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환익 한국전력 사장이 지난 8일 전격 퇴임했다. 그는 이명박 정부 말인 2012년 12월 취임해 만 5년 가까이 한전을 이끌었다. 대통령이 두 번 바뀌는 동안 두 차례 연임에 성공했지만 결국 임기를 석 달여 남기고 물러났다. 지역의 한 언론은 그의 퇴임을 두고 ‘아름다운 퇴장’이라고 제목을 뽑기도 했다. 그가 갑작스럽게(?) 한전을 떠남으로써 향후 거취에 관심이 쏠리고 있다. 지금까지 지역 정치권에서 ‘아이디어‘ 수준에서 떠돌던 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 후보 추대설이, 그가 한전을 떠나면서 점차 ‘설(說)‘로 업그레이드되는 양상이다.
정권 때마다 조 전 사장은 산업부 장관 후보에 올랐다. 산업자원부 차관, 한국수출보험공사 사장, KOTRA 사장에 이어 한전 사장이 된 그의 경력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 때마다 실패했다. 지난 2013년 박근혜 정부 당시에도 언론은 조 사장을 차기 산업부 장관 후보 중 유력한 한 명으로 꼽았다. 결국 윤상직 지식경제부 1차관과 막판까지 경합을 벌이다 고배를 마셨다. 현 문재인 정부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는 한때 산업부장관과 차기 무역협회장에 거론되기도 했으나 이 또한 무산됐다.
조기 퇴임하자 정치권 진입설 등 ‘설왕설래(說往說來)’
조 전 사장이 조기 퇴임하자 정치권 진입설 등 여러 가지 관측들이 나돌고 있다. 그의 향후 행보와 관련 유독 눈에 띄는 것이 내년 지방선거 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 출마설이다. 실제로 올 벚꽃 대선 이후 조 전 사장의 지방선거 추대설이 심심찮게 나왔다. 주로 지역 정치권을 중심으로 나오는 얘기지만 여러 가지 여건을 감안할 때 차기 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 후보로 내세울 만 하다는 얘기가 없지 않다.
본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조 전 사장의 정치권 진입 문제가 거론되는 데는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지역 정치권의 한 인사는 “본인이 비록 정치에는 거부감을 갖고 있지만 자치단체장의 업무는 행정의 성격이 강하다”며 “지금 추진되는 지방분권형 개헌이 성사되면, 시도지사들이 제2 국무회의를 구성하는 등 광역자치단체장의 위상과 역할이 달라질 수 있다. 이때를 대비해 시도지사 출마도 검토해볼 수 있다”고 내다봤다.
무엇보다 광주·전남 지역사회의 우호적인 반응은 그의 강점이다. 조 전 사장이 짧은 시간에 지역에 끼친 영향은 막대하다. 조 전 사장은 지난 2014년 12월 나주 혁신도시로 한전 본사를 옮긴 뒤 빛가람 에너지밸리 조성 등 지역 성장동력 확보 측면에서도 가시적인 성과를 거두었다는 평가가 따른다. 오는 2020년까지 500개 에너지 관련 기업을 유치해 미국의 실리콘밸리 같은 세계적인 에너지 분야 특화도시로 만들면 혁신도시는 물론 미래 광주·전남 발전의 견인차 구실을 해 낼 수 있다. 한전은 지난해 에너지밸리에 77개 기업을 유치했고 올해 말까지 100개를 끌어온다는 목표로 뛰고 있다. 최근엔 배후 산단인 나주혁신산단도 준공되면서 에너지밸리는 본궤도 진입을 눈앞에 두고 있는 상황이다. 또 조 전 사장이 추진해온 한전공대 설립도 빠르게 가시화했다.
이 같은 시점에서 조 전 사장이 계속 지자체 수장으로 남아 지역발전을 이끈다면 지역민들이 반길 것은 당연하다는 분위기다. 누구보다 한전을 속속들이 아는 그는 그간 뛰어난 경영 수완을 발휘해 온 터여서 광주전남의 미래 먹거리인 에너지밸리 조성 사업과 한전공대 설립을 성공시킬 수 있는 최적임자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지역 정치권의 복잡한 정치지형도 그의 소매를 정치권 쪽으로 이끌고 있다. 조환익 출마설 논리는 이렇다. 광주시장 선거의 경우 이용섭 탈락→조환익, 국민의당 후보 부재→조환익 구원투수, 전남도지사 선거는 민주당 후보 약세 평가→조환익 대체재 검토 시나리오다.
현재까지 내년 광주시장 선거는 선두를 달리는 이용섭 대통령직속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에 민형배 광산구청장이 다크호스로 부상하는 양상이다. 11월20일 한국사회여론연구소(KSOI) 자체 조사 결과 차기 광주광역시장 적합도에서 이 부위원장은 23.3%를 획득해 선두를 질주하고 있다(여론조사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중앙선거여론조사심의위원회 인터넷 홈페이지(www.nesdc.go.kr) 참조).
하지만 이 부위원장은 일자리위원회 부위원장이란 직책이 ‘복병’이 될 것이란 분석도 있다. 현 정부의 최대 국정과제인 일자리 만들기를 진두지휘하다 광주시장 출마를 위해 그 자리를 내려놓을 경우 적잖은 ‘후폭풍’이 불수도 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이 부위원장의 출마가 좌절될 경우 정치판은 요동칠 수밖에 없고 조 전 사장 카드는 급부상할 가능성도 없지 않다.
국민의당 사정은 더 나쁘다. 중진 3인방인 박주선, 김동철, 장병완 의원 등은 당 안팎의 상황이 어수선해선지 아직까지 출마를 공식화하진 않고 있다. 어려운 정치지형 하에서 의원직을 내놓고 선뜻 출마하기는 쉽지 않아 보인다. 그 경우 조 전 사장이 선발투수로 차출 당해 투입될 수도 있다는 전망이다. 특히 장병완 의원과 조 전사장 간의 돈독한 친분관계도 이 같은 분석에 설득력을 높여주고 있다.
전남도지사 선거도 변수가 많다. 이낙연 전 전남지사가 문재인 정부 초대 총리로 발탁되면서 전남지사 자리는 무주공산이 됐다. 전반적인 선거 구도는 집권당인 더불어민주당과 지난 총선에서 호남을 석권한 국민의당 양자대결 양상이다. 호남에서 상징성이 크다는 점에서 전남지사 선거 결과가 양 당에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여권에는 호남의 지지가 국정 운영 동력의 중심축이다. 국민의당으로선 당의 존립 여부가 달려 있다. 모두 양보할 수 없는 상황이다.
현재 민주당 쪽 후보로 이개호 최고위원이 유력하게 거론되고 있다. 국민의당에선 박지원 전 대표와 주승용 전 원내대표의 출마가 점쳐지고 있다. 민주당 유력 후보군이던 김영록 전 의원이 농림축산식품부 장관으로 발탁되고 우윤근 전 의원도 러시아 대사로 부임해 전남지사 선거 출마가 어렵게 됐다. 여기에 임종석 청와대 비서실장은 국정감사에서 전남지사 선거에 나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정치적 무게감이 큰 3명이 사실상 배제된 것이다.
이 최고위원의 경우 보궐선거를 통해 지난 19대 국회에 진출한 1.5선에 불과하다. 정치적 중량감이 덜하고 관료 출신이라 한계가 있다는 목소리도 있다. 일각에서 광주·전남의 유일한 현직 의원이자 당 최고위원인 이 의원이 호남 지방선거를 진두지휘해야 한다고 말한다. 여권에선 자당 후보가 여의치 않을 경우 참신한 외부 인사를 영입해 투입하는 그림도 그리는 중인 걸로 알려진다. 그때 하나의 묘안으로 조환익 카드가 검토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 전 사장의 지방선거 출마 여부에 부정적인 예측도 나온다. 평생을 고위 관료와 공기업 수장으로 양지에서 보낸 그가 ‘풍찬노숙’의 정치판에 뛰어들기는 현실적으로 쉽지 않다는 것이다. 민주당과 국민의당 등 정당 입장에서도 내년 지방선거에서 텃밭 사수와 탈환을 위해 총력을 기울일 경우 무색무취한 그를 ‘당의 얼굴’로 내세우기는 어렵지 않느냐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나아가 조 전 사장의 캐릭터 상 그나마 광주시장이나 전남도지사 후보로 모두 ‘전략공천’일 경우에만 움직임이 가능할 터인데 지역 정치권의 반발을 무릅쓰고 이를 관철하기에는 무리수라는 지적이다.
“내가 정치하면 그동안 해온 일 다 망가진다”
조 전 사장도 현재 이 같은 관측에 매우 부정적이다. 조 전 사장은 10일 오후 시사저널과의 전화인터뷰를 통해 “나는 정치에 어울리지 않으며 정치할 사람은 따로 있다”고 일축했다. 그는 이어 ”정치를 하려면 벌써 했다. 내가 이 나이에 왜 거기 가서 신입생으로 일하나. 선출직에는 나갈 의사가 없다”고 밝혔다. 조기 퇴임과 관련해서는 “잔여 임기가 내년 3월 말까지이나 신년도 사업 계획 수립 등 후임 경영진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조기 퇴임하기로 결심했다”며 일각의 현 정부와의 원전개발을 둘러싼 불화설이나 지방선거 출마설에 선을 그었다.
특히 그는 자신이 광주·전남 지방선거에 출마할 경우 그동안 해온 일과 한전에 미칠 악영향을 크게 우려했다. “내가 정치를 하면 그동안 지역에서 해온 일(에너지밸리 사업 등)이 다 망가뜨려진다. 한전도 정치권의 입김에 휘말리는 등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후임자에게도 정치권에 기웃거리는 일은 말리고 싶다.”
그는 “당장 내일(월요일)부터 백수생활을 경험하게 될 것 같다. 그동안 전 세계를 돌아다녀본 경험으로 재미있는 소설이나 극본을 써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싶다”며 정치권 진입설은 차단하면서도 국가에 봉사하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참여하겠다는 여지를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