침묵의 카르텔 깨트린 ‘미투’
  • 김경민 기자 (kkim@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8 16: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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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서 女참정권 선포된 지 97년…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

 

“우리 모두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을 받아들이는 것을 멈추도록 독려했다.”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매년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침묵을 깬 사람들(the Silence Breakers)’이 선정됐다. 성폭력 피해 사실을 공개하고 사회 변화를 이끌어낸 ‘미투(#MeToo) 캠페인’ 당사자들을 포함한 이들이 그 주인공이다. 타임은 12월6일(현지시간) ‘올해의 인물’을 발표하면서 이들이 ‘거부의 혁명’을 통해 “집합적 분노로 최고경영자를 쫓아내고, 실력자를 쓰러뜨렸으며, 유명인의 명성을 떨어뜨렸다”고 선정 이유를 밝혔다.

 

타임(TIME)이 '올해의 인물'로 성폭력의 부당함을 고발한 불특정 다수 '침묵을 깬 사람들'을 선정했다. © TIME 제공


 

TIME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 선정

 

미투 캠페인은 10월 초 불거진 할리우드 거물 제작자 하비 와인스타인 성추문에서 촉발됐다. 배우 알리사 밀라노가 10월16일(현지시간) 자신의 트위터에서 성추행이나 폭행을 당한 사람들은 ‘나 역시 피해자였다’는 의미의 ‘미투(#Metoo)’라는 해시태그를 달자고 제안하면서 캠페인이 시작됐다. 24시간 만에 약 50만 건의 트윗이 뒤따랐고, 안젤리나 졸리, 기네스 팰트로, 레이디 가가 등 유명 연예인들이 잇따라 캠페인에 동참하며 점점 확산됐다. 결국 와인스타인은 자신이 설립한 회사에서 쫓겨났다.

 

이 캠페인은 영화 산업계를 넘어 미국 사회 전반으로 확산됐다. 클래식 음악계, 무용계, 언론계와 정계까지 뻗어갔다. 미국 뉴욕 메트로폴리탄 오페라 제임스 레바인 명예 음악감독은 성추문으로 정직 처분을 받았고, 세계적인 무용가 피터 마틴스는 강습을 중단했다. 앨라배마주 상원의원 보궐선거에서 공화당 후보로 나선 로이 무어는 사퇴 요구에 직면했으며, CBS와 NBC의 간판 앵커는 해고됐다.

 

성폭력을 당한 경험은 미투 캠페인 이전엔 분명 금기시되던 주제였다. 수많은 여성들이(때론 남성들도) 집에서, 직장에서, 혹은 길을 가다가 성희롱과 성폭행의 대상이 돼왔지만, 공개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지 못했다. 물 밑에서 홀로 혹은 은밀히 연대하며 스스로의 상처를 치유해오던 성폭력 희생자들이 처음 공개적으로 자신의 경험을 말하기 시작한 것이다. 단순한 발언으로 그친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변화를 이끌어내며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미투 캠페인이 미국 대륙을 강타하기 1년 전, 한국에서도 비슷한 성폭력 경험의 공론화 움직임이 있었다. 지난해 10월 배용제 시인의 성추행 파문으로 촉발된 ‘문단_내_성폭력’ 해시태그 운동이다. 고교 문예창작 실기교사이자 유명 시인이었던 그가 학생들을 상대로 지속적인 성추행을 해왔다는 사실은 사회 전반에 큰 충격을 던졌다. 그와 함께 그간 침묵해오던 ‘문단 내 성폭력’ 피해자들이 입을 열기 시작했고 거물급 작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문단_내_성폭력’ 운동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타고 ‘영화계_내_성폭력’ ‘미술계_내_성폭력’ ‘교육계_내_성폭력’ 등으로 변주돼 퍼졌다. 

 

12월5일(현지시간 CNN과의 인터뷰에 나선 강경화 외교뷰 장관이 '미투 캠페인'에 대한 의견을 밝혔다. © 사진=CNN 캡처

 

강경화 “미투, 진보의 기회로 삼아야”

 

12월5일(현지시간) CNN은 강경화 외교부 장관과 인터뷰를 진행했다. 인터뷰어는 종군기자로 유명세를 탄 CNN의 대표 앵커 크리스티안 아만푸어였다. 아만푸어는 북한 문제를 주로 다루던 인터뷰 말미에 돌발 질문을 던졌다. 미투 캠페인에 대해 어떻게 보냐는 것이었다. 

 

“저는 외교부 수장이지만 두 계급 아래만 봐도 대부분 남성이다. 성평등이라는 개념과 성폭력, 성희롱이 없는 사회가 우리가 함께 나아가야 할 목표다. 이 순간을 진보의 기회로 삼으려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

 

2017년은, 페미니즘 비평의 선구자 버지니아 울프의 ‘자기만의 방’(1928)이 세상에 나온 지 89년, 20세기의 가장 영향력 있는 페미니즘 저서로 꼽히는 시몬 드 보부아르의 ‘제2의 성’(1949)이 나온 지 68년이 된 해다. 1893년 뉴질랜드에서 세계 최초로 여성에게 참정권이 주어진 후로 124년이 흘렀다. 미국 여성참정권이 선포된 지는 올해로 97년, 한국 여성이 법적으로 남성과 대등하게 국회의원 선거권과 피선거권을 갖게 된 지는 내년에 60년이 된다. 

 

100년도 채 안 된 시간동안 여성 인권은 빠르게 신장돼왔다. 사회 각계각층에서 보부아르의 ‘제2의 성’ 속에 나오는 “여성들은 여성으로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지는 것”이란 문장에 대한 도전이 계속됐다. 이제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여성이 도전하지 못할 직업은 없다. 여성이라고 하지 못할 경험은 없으며 말하지 못할 것 없는 세상이다. 

 

하지만 여전히 선거 결과나 대기업 임원 승진 소식 뒤에는 ‘유리 천장’이란 말이 따라붙는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은 여전히 ‘기울어진 운동장(처음부터 공정한 경쟁을 할 수 없는 상황에 대한 비유)’임을 인정하며 살아간다. 그러는 동안 여성들은 여전히 침묵 속에 갇혀 있었다. 타임이 ‘올해의 인물’로 ‘침묵을 깬 사람들’을 선정한 것은 역설적이게도 이 땅의 여성들이 힘겨운 싸움을 이어가고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 모른다. 마침내 침묵을 깨고 나온 ‘목소리’들이 진보의 역사를 열어가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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