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해지역의 고독사 남의 일이 아니다
  • 이인자 도호쿠대학 교수(문화인류학)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4 15:19
  • 호수 1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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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자 교수의 진짜일본 이야기] 피해의식과 소외감, 상상 못할 어려움

 

[편집자 주]

일본 도호쿠(東北)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가르치는 이인자 교수는 재일교포·묘제(墓制) 연구의 권위자이며 동일본대지진의 재난인류학 연구에서 세계 일인자로 평가받는 석학(碩學)이다. 이 교수는 2011년 동일본대지진이 발생한 후 피해지역을 답사하며 재난에서 살아남은 희생자 유족과 생존자들의 정서적 피해와 복구에 대해 연구해 왔다.

 

11월15일 발생한 포항 지진으로 이재민은 추운 겨울을 그대로 감당해야 하는 상황들이 연일 보도되고 있습니다. 19일 휴일 아침 7시50분에 멀리 나가노(長野)현의 병원에 근무하고 있는 지인 의사에게 갑작스러운 연락이 왔습니다.

 

“산단바시리(三反走) 가설주택 다카하시 쇼조(高橋正三· 71)씨가 고독사를 했다고 합니다. 다른 사람에게 저지당해 잘 못 만났던 것이 참으로 유감스럽고 후회스럽습니다.”

갑자기 머리를 무엇인가로 얻어맞은 듯 띵하며 ‘올 것이 왔구나’라는 생각이 스치면서 가슴이 뛰었습니다. 소식을 접하고 바로 같은 가설주택 가까운 곳에 살고 있고 그와 교류하던 분이었기에 무엇인가 알지 않을까 싶어 전화를 했지만 잘 모르는 듯했습니다. 잠시 생각하다 얼마 전까지 같은 가설주택에 살다 두 달 전에 정부 주관으로 세워진 복구주택으로 이사한 분에게 전화를 해 봤습니다. 같은 마을 출신으로 가설주택에서는 젊은 층(60대 중반)으로 여러 일을 했던 분이었지만 그 역시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의 죽음을 멀리 나가노현에 살고 있는 의사가 센다이에 살고 있는 저에게 연락을 해 왔는데 같은 가설주택에 살고 있거나 살았던 사람도 아직 모르고 있었습니다.

 

다카하시씨는 가설주택 내에서 아주 조금씩 소외돼 갔던 주민이었습니다. 부고를 알려온 의사의 짧은 메시지에 써 있던 ‘다른 사람에게 저지당해 잘 못 만났던 것’이란 내부 사람이 다카하시씨와 외부 사람의 만남을 저지했던 것을 가리킵니다. 비인간적인 처사로 고쳐져야 한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습니다만, 당사자가 아니면 모를 감정적 앙금이 불러일으키는 아주 인간적인 문제라는 생각이 듭니다.

 

인적이 드문 가설주택가 © 사진=이인자 제공


 

쓰나미로 부인 잃은 후 술에 의지해

 

다카하시씨와 처음 만난 것은 가설주택이 지어진 2011년 7월초입니다. 쓰나미로 부인을 잃었지만 의료봉사로 온 의사나 연구조사를 위해 드나드는 대학 관계자들과 허물없이 지내는 몇 안 되는 가설주택 주민이었습니다. 그렇다고 그는 주민을 대표하는 리더는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리더와는 동떨어진, 술을 너무 많이 먹어 걱정스러웠기에 의사들이 그를 가까이했을 정도였습니다. 술에 의지하며 사는 듯한 그의 행태에 대해 의사가 저에게 전해 준 말이 있었습니다.

 

“그는 쓰나미로 부인을 잃었는데 그 주검을 스스로 수색하면서 발견했어요. 그런데 그 모습이 너무 끔찍했고 불쌍해 맨 정신으로 있기 어려울 때가 많아 술을 마신다고 하더군요.”

이렇게 그의 처지를 이해하는 의사들은 그와 가깝게 지내고 있었습니다.

 

“의사인 엔도 선생은 나와 술을 마셨는데 아침에 일어나니 내 방에서 함께 자고 있었어! 엔도 선생도 나와 마찬가지로 고주망태였어!”라며 자랑으로 들릴 만한 톤으로 이야기를 하곤 했지요. 의사와 밤새 술을 마시고 또 그 의사가 가설주택인 자기 집에서 함께 잤다는 것이 그의 자랑인 것입니다. 의사인 엔도씨는 재해지역에서 만든 한 편의 추억이라고 맞장구치면서 좋아하곤 했습니다.

 

밝고 아이 같은 캐릭터도 한몫해 그는 봉사자들과 관계가 좋았습니다. 하지만 외부 봉사활동자들의 발걸음이 뜸해지면서 다카하시씨의 과음과 여러 행실에 대해 비난이 들려오기 시작했습니다.

 

특히 마을의 리더 격인 사람이 “부인이 죽어 받은 보상금으로 일도 안 하고 매일 술만 마시러 다니니 한심해”라는 말을 서슴없이 외부인인 저에게 전했습니다. 그는 다카하시씨만이 아니라 외부인과 친한 주민들을 비난하면서 거리를 두길 원하는 듯했습니다. 복잡한 감정의 앙금들이 밖으로 빠져나오는 듯했습니다. “마을을 위해 아무것도 안 하는 사람들이 오히려 시간적 여유가 있어 의사 선생님이나 봉사활동가와 친하게 지낸다니까요. 나는 마을 일로 여기저기 다니느라 힘든데….”

 

이 리더는 재해 전에는 리더가 아니었습니다. 재해복구 과정에서 신임을 얻어 리더가 된 사람이었기에 ‘이런 말을 하는 사람이었나?’ 하고 제 귀를 의심할 정도였습니다. 자긴 리더로서 마을을 위해 희생하고 있는데 아무 희생도 안 하고 있는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좋은 위치에 있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들과 자유롭게 교류하는 것이 마음에 안 들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밖에서 찾아오는 사람들과 내부 사람들의 관계는 본의 아니게 경직됩니다. 왠지 혼란을 야기하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에 리더 격인 사람의 말을 따르게 되고 그를 통해서만 활동을 하게 됩니다.

 

이런 배경으로 점점 집회소에서 열리는 행사 모습은 변하게 됩니다. 리더가 배제하는 사람은 행사 참석이 뜸해지거나 오지 못합니다. 내부에서도 구조적으로 소외당하는 존재가 돼 가기 때문입니다. 외부사람도 일부러 찾아가기 어렵지요. 이런 상황은 의료봉사팀이었던 의사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멀리 나가노현에서 1년에 두 번 정도 찾아오곤 했는데 매번 그를 못 만나게 했다고 합니다. 부고를 전해 준 의사는 그 점을 후회했던 것입니다.

 

6년4개월째 가설주택에 살고 있는 노인 © 사진=이인자 제공


 

재난 겪어내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

 

자주 가는 저는 가끔 학생들과 찾아가 이야기도 하고 소소한 선물을 주고 오곤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어떻게 알았는지 저는 그의 험담 섞인 리더로서의 고충을 30분 이상 들어야 했습니다. 다카하시씨와 비슷한 연배인 그는 피해의식이 팽배해 있기에 그대로 무시하기 어려워 험담을 듣거나 그게 부담스러워지면 가설주택에 가도 그를 만나지 않고 돌아오는 날이 늘어났습니다. 재해지역 내에서 외부사람과의 교류를 ‘분수에 맞지 않게’ 하고 있는 사람은 리더들에게 소외당하기 일쑤입니다. 아마도 열악한 환경에서 격리된 듯 살아가는 재해지역의 이재민들은 피해의식과 소외감으로 밖에서는 상상하지 못할 어려움을 안고 살고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인간의 저변에 깔린 동물적 욕망이 꿈틀거리는 안에 다카하시씨의 고독사가 있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일주일이 지난 뒤 문상을 하기 위해 가설주택을 찾아갔습니다. 가설주택 회장 다카하시 다로(高橋太郎)씨가 맞이하면서 문상을 할 수 있게 해 줬습니다.

 

“제가 발견했습니다. 근처에 사는 분이 저에게 찾아왔어요.”

그러자 먼발치에 있던 여자분이 다가오면서 “봉사활동하는 사람들이 음식을 만들어 함께 먹는 날이었어요. 그는 언제나 행사에 참석하지 않기에 제가 음식을 갖다주곤 했거든요. 그러지 말라는 사람도 있지만 어디 인정이 그런가요. 최근에는 음식을 통 못 먹는 듯 아주 안색이 안 좋았어요.”

 

가설주택 회장 이야기에 의하면, 그의 장례식은 가까운 장례식장에서 아들과 딸이 집행했고 마을 사람과 가설주택 사람 80여 명이 조문했다고 합니다. 조문을 마치고 그의 방에서 나오자 다카하시씨와의 교류를 좋게 생각하지 않던 마을 사람이 우리를 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은 그와 교류하지 말라는 메시지가 담긴 그에 대한 험담을 하진 않았습니다. 서로 눈을 마주치고 두 손을 모아 합장을 할 뿐이었습니다.

 

예기치 못한 재해로 일상과 다른 특수한 공간에서 사람들이 함께 지내면 당사자와 비(非)당사자가 서로 공감할 수 있는 문제(예를 들어 추위, 배고픔, 불편함, 프라이버시 보호 등등)는 비교적 단시간에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가 아니면 알 수 없는 극한 상황에서의 감정적 앙금은 점점 쌓여 그 공간은 밖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문제를 품게 되는 것 같습니다. 대재해라는 재난을 겪어내는 과정에서 보이는 감정의 앙금이 얼마나 중요하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인지 다시금 생각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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