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리그 챌린지 우승 이끈 ‘비운의 축구 천재’ 김종부 경남 FC 감독
  • 이영미 스포츠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2.01 11:42
  • 호수 14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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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영미의 생생토크]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닥서부터 하나씩 만들어갔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서 함께 태극마크를 달고 뛰었던 선후배가 ‘KEB하나은행 K리그 2017 대상 시상식’에서 시상자와 수상자로 만났다. 제대로 얼굴을 마주한 건 30여 년 전 대표팀 이후 처음이었다. 감독상을 받은 수상자도, 그 상패를 건넨 시상자도 상패를 앞에 두고 감회가 새로울 수밖에 없었다.

 

시상자는 차범근 전 감독(64)이었고, 수상자는 ‘비운의 축구 천재’이자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축구대회 4강 신화의 주역인 김종부 경남 FC 감독(52)이었다. 김 감독은 경남 FC를 K리그 챌린지 우승과 동시에 클래식 승격으로 이끈 지도력을 인정받아 2017 챌린지 최고의 감독으로 선정됐다. 독일 분데스리가를 누비며 한국 최고의 축구 레전드로 자리매김한 차 전 감독이 스카우트 파동을 겪으며 축구계의 이방인으로 물러났다가 뒤늦게 프로팀 감독으로 돌아와 감독상까지 받게 된 김 감독에게 상패를 전한 장면은 자꾸 과거를 돌아보게 만들었다.

 

김종부 감독은 차범근-최순호에 이어 한국 축구 스트라이커의 계보를 이을 스타플레이어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1986년 대우와 현대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려 2년 가까이 그라운드에 서지 못했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에 출전해 불가리아와의 조별리그에서 동점골을 넣으며 건재를 과시했고 1988년 포항 스틸러스에 입단해 재기를 노렸지만, 제대로 꽃을 피우지 못한 채 1995년 만 서른 살의 나이에 은퇴 수순을 밟았다.

 

1997년 자신의 모교인 경남 거제고 감독을 맡아 지도자 생활을 시작했고, 동의대-중동고-양주시민축구단-화성 FC를 거쳐 경남 FC에 이른다. 김 감독의 지도자 인생은 순탄치 않았다. 그가 맡은 팀마다 선수 구성이 열악하거나 극도로 부진한 성적 등 좋지 않은 환경을 안고 있었다. 그럼에도 김 감독은 거제고를 우승 1회, 준우승을 4회 시켰고, 만년 최하위 팀이었던 동의대를 준우승까지 끌어올렸다. 아마추어 리그인 K3리그의 화성 FC에선 2014년 리그 우승컵을 품에 안았다.

 

양지보다는 음지에서 우승 이력을 쌓아간 김 감독은 2015년 12월 경남 FC 감독으로 선임되며 꽃을 피우는 듯했지만, 당시 경남은 심판 매수 사건으로 2016시즌 승점 10점을 감점당하고 주축 선수는 대부분 팀을 떠난 최악의 상황이었다. 어쩌면 그런 팀이었기 때문에 김 감독에게 기회가 주어졌는지도 모른다. 김 감독은 이번에도 맡은 지 2년 만에 경남 FC를 챌린지 우승과 함께 클래식 승격이라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경남 FC의 클래식 승격을 두고 축구계에선 ‘기적’ ‘반전’이라고 말한다. 덕분에 김 감독은 프로 지도자 입성 2년 만에 감독상을 수상했다. 인터뷰는 수상 소감을 듣는 것으로 시작했다.

 

© 시사저널 임준선

차범근 전 감독으로부터 상을 받는 상황이 드라마처럼 보이더라. 당시 심정이 어땠나.

 

“프로에선 선수 시절 포함해서 처음으로 상을 받았다. 시상식 참석도 처음이었다. 차범근 선배부터 최강희, 황선홍 감독 등과 나란히 자리에 앉아 있는 내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차범근 선배하고는 멕시코월드컵 때 첫 인연을 맺었다. 당시 그는 분데스리가에서 맹활약을 펼치던 터라 대표팀 막내인 나로선 그가 어렵기만 했었다. 물론 월드컵에선 내가 골을 성공시켰지만 말이다(웃음). 30여 년의 시간이 흘러 시상식에서 차범근 선배를 만난 감회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프로팀 지도자가 되니 이전에 함께 축구 했던 선후배들을 만날 수 있게 되더라. 그 자리에 가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는 생각도 들었다.”

 

 

지도자 이력을 보면 맡았던 팀들이 모두 어려운 환경을 보유했다. 그런데 그런 팀들을 맡아 모두 우승 또는 준우승을 이뤘다. 어느 팀을 맡았을 때가 가장 기억에 남나.

 

“동의대다. 1997년 거제고에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해 2002년 동의대 감독으로 부임했다. 당시 동의대는 대학리그 최하위권에 머물러 있던 팀이었다. 완전 무명 팀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팀을 추계대학연맹전 결승전에 진출시켰고, FA컵 진출권을 획득한 덕분에 프로팀인 포항 스틸러스와 경기를 치를 수 있게 됐다. FA컵은 프로와 아마추어를 통틀어 국내 축구 최강팀을 가리는 대회다. 그런 대회에서 우리가 포항 스틸러스를 1대0으로 이기는 파란이 일어났다. 축구팀 창단 후 16강 진출도 못해 봤던 팀이 프로팀을 이기고 추계연맹전 준우승을 차지한 것이다. 처음 동의대를 맡았을 때만 해도 선수들의 자신감은 바닥으로 떨어진 상태였다. 패하는 데 익숙해져 있었다. 그런 선수들에게 새로운 시스템을 적용해 나갔다. 자신감을 상승시켰고, 시스템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그 과정에서 어려움도 많았지만 선수들이 잘 따라와 줬기 때문에 좋은 성적을 낼 수 있었다.”

 

 

이후 다시 (중동)고등학교 감독을 맡았다가 K3리그인 화성 FC 감독으로 옮겨갔다. 화성 FC는 지도자 생활을 한 이후 처음으로 성인 축구 무대에 도전한 셈인데 거기서도 팀을 우승시키지 않았나.

 

“2013년 화성 FC를 맡았다가 이듬해 K3리그 우승을 차지했다. 그해 대한축구협회 일반부 최우수지도자상도 받았다. 14년 동안 학원 축구만 해 오던 내가 성인 축구에서도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다. 내가 성공해야 학원 축구 지도자들도 희망을 가질 수 있을 거라고 믿었는데 우승까지 도달한 것이다.”

 

 

K3리그는 순수 아마추어를 표방하는 풀뿌리 축구로 2007년 창설됐다. 대부분 소규모 자본으로 창단돼 연봉 없이 승리 수당으로 평균 15만~20만원 정도를 받는 게 전부라 공익근무를 하면서 프로 대신 뛰는 일부 선수들을 빼면 직업선수는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나라 축구리그는 K리그 클래식(1부리그), K리그 챌린지(2부리그) 내셔널리그(3부리그), K3리그(4부리그)로 나뉜다. 2013년부터 승강제가 도입됐는데 K리그 클래식은 12개 팀이 우승팀과 강등팀을 가린다. K리그 클래식에서 12위를 차지한 팀은 K리그 챌린지로 자동 강등되며 K리그 챌린지 1위 팀은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된다. 경남 FC는 올 시즌 2부리그인 챌린지에서 뛰었고, 챌린지 1위 팀이 되면서 클래식으로 승격했다.

 

11월20일 챌린지 감독상을 수상한 김종부 경남 FC 감독이 차범근 전 축구대표팀 감독으로부터 트로피를 받고 있다. © 사진=연합뉴스

 

경남 FC 감독으로 선임됐다는 기사를 보고 바로 연락드린 기억이 난다. 그런데 마음껏 축하를 전할 수 없었다. 너무 어려운 팀을 맡았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 기자뿐만 아니라 지인들도 대부분 비슷한 반응을 나타냈다. 하필이면 왜 경남 FC냐면서. 당시 경남은 심판 매수 사건으로 승점이 10점이나 깎인 상황이었다. 주전 선수들도 거의 빠져나갔고 팬들도 등을 돌린 상태였다. 프로 지도자로서 첫 인연을 맺은 팀이 내 인생처럼 우여곡절이 많은 팀이라는 게 아이러니했다. 나도 인간이라 좀 더 안정되고 선수 구성이 탄탄하며 팬들의 사랑을 받는 팀의 지도자가 되고 싶었다. 그렇다고 해서 프로팀 감독직 제안을 거절하기도 어려웠다. 오랫동안 기다렸던 순간이었기 때문에 그 기회를 놓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받아들였고, 받아들인 이후엔 모든 걸 새로 시작한다는 마음가짐으로 바닥에서부터 하나씩 만들어갔다.”

 

 

그 내용을 좀 더 자세히 듣고 싶다.

 

“우리 팀 선수들을 정확히 파악하는 게 급선무였다. 맞춤형 지도 방법을 적용해야 했기 때문이다. 지도자라면 누구나 화려한 축구를 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경남에선 그런 방법이 통하지 않을 것 같았다. 화려함보다는 선수들이 잘 받아들일 수 있는 역할들을 찾아냈고, 그걸 최적화하려고 엄청난 훈련을 반복했다. 다른 선수들에 비해 발이 느린 선수가 있다면 한 발 먼저 뛸 것을 주문했고, 모든 선수들이 미리 준비하고 미리 판단하고 더 부지런하고 더 많은 연습을 각오해야 한다는 내용도 강조했다. 그런 부분이 한 시즌 동안 선수들 몸에 스며들었고, 올 시즌부터 배운 내용들이 그라운드에서 결과로 나타났다. 그게 정말 중요했던 것 같다.”

 

 

그런데 맡은 첫해에 승점 10점 삭감을 당했음에도 40경기에서 18승, 61득점을 이뤄냈다. 61득점은 K리그 챌린지 최다 득점이었다(10점 승점 삭감으로 팀 순위는 8위).

 

“공격수 출신인 감독이 이끄는 팀이라면 공격 면에선 빼어난 장점을 보여줘야 하는 게 아닌가. 지난 시즌에 이어 올 시즌도 최다 득점(69득점)을 올렸다. 그 부분은 매우 자랑스럽고 보람이 느껴진다.”

 

 

올 시즌 경남은 3월26일 1위에 오른 이후 시즌이 끝날 때까지 단 한 번도 1위 자리를 내주지 않았다. 무려 7개월이 넘는 기간 동안 1위 자리를 지킨 셈이다.

 

“브라질에서 온 공격수 말컹의 맹활약 덕분에 36경기 동안 24승을 거둘 수 있었다. 물론 2위 부산의 추격으로 위기에 처한 적도 있었지만 고비마다 승리를 거두며 우승을 확정지었다. 말컹은 브라질 출신 특유의 골 결정력과 유연성 덕분에 올 시즌 22골을 쏟아내며 단숨에 득점왕에 올랐다. 한마디로 우리 팀의 ‘복덩이’다.”

 

 

말컹 얘기가 나왔으니 묻겠다. 축구선수치곤 굉장히 큰 키의 소유자더라. 196cm인 데다 18세까지 농구를 했다고 들었다. 이런 선수를 어떻게 데려올 생각을 했나.

 

“모두가 의아해했던 부분이기도 했다. 나로선 팀 예산에 맞출 수밖에 없었고, 예산대로 선수를 뽑으려다 보니 말컹이 눈에 띈 것이다. 높이가 되는 선수이기 때문에 공격 루트나 빌드업 과정을 최적화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너무 장신이라 완벽한 찬스가 와도 상대 수비수한테 다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그걸 파악한 후에는 따로 개인훈련을 많이 시켰다. 말컹이 스펀지처럼 모든 걸 잘 흡수했다. 데뷔전에서 첫 득점을 성공시킨 후 더욱 자신감을 갖게 된 것 같다. 말컹의 실력이 부각되면서 상대팀 견제가 매우 심했다. 그럴 때는 다른 선수들이 나서 견제를 분산시켜줬다. 말컹도 잘했지만 다른 선수들도 모두 제 역할을 충실히 이행했고 소화했다. 덕분에 우리 팀 선수들이 K리그 시상식에서 베스트 11을 거의 휩쓸지 않았나.”

 

 

K리그 시상식에서 챌린지는 경남 FC 천하였다. 말컹이 MVP와 득점왕, 공격수 베스트 11을, 미드필더 정원진·배기종, 수비수 최재수·박지수·이반·우주성, 골키퍼 이범수가 영예의 주인공이었다. 챌린지 MVP를 받은 말컹은 시상식 참여를 위해 시즌 마치고 휴가를 보내던 브라질에서 30시간 걸려 한국에 도착했을 만큼 경남 FC에 높은 충성도를 보였다.

 

1986년 멕시코월드컵 한국 대 불가리아 경기. 김종부 선수가 불가리아 수비진을 피해 터닝슛으로 동점골을 넣었다. © 사진=연합뉴스

 

말컹의 성장세를 보며 김 감독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하는 축구인들도 많더라. 말컹은 내년에도 경남과 함께 가는 건가.

 

“말컹의 브라질 에이전트까지 한국에 들어와 직접 훈련하는 장면을 지켜봤을 정도다. 도대체 이 선수가 어떻게 해서 최고 공격수가 됐는지 궁금했던 것이다. 말컹의 실력과 이름이 알려진 후론 여기저기서 말컹을 데려가려고 움직인다고 들었다. 우리 팀에선 3억~4억원밖에 주지 못하는데 10억원 이상을 제시한 팀들도 있었고, K리그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에서도 말컹의 인기가 상한가를 달리고 있다. 그런데 말컹은 내게 내년 시즌에도 경남에서 뛰겠다고 말했다. 돈보다 더 중요한 건 의리라고 하면서. 그 얘기에 감동했다. 가르친 보람도 느끼고. 인성이 좋은 선수라 어디를 가도 성공할 수 있을 건데 적은 연봉을 받고 팀에 남겠다고 하니 얼마나 고마운 일인가. 내가 인복이 있는 편인가 보다(웃음).”

 

 

시즌 후반기, 부산 아이파크를 이끌던 조진호 감독이 급성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부산은 경남 FC와 치열한 1위 다툼을 벌였던 팀이었고, 조 감독이 눈을 감기 이틀 전 경남 FC와의 경기에서 0대2로 패했던 터라 김 감독 또한 충격이 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부산 아이파크와의 경기는 가장 치열할 수밖에 없었다. 경기 결과에 따라 순위가 바뀔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나도, 또 조 감독도 엄청난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그런데 난 시즌을 치르면서 많이 내려놨었다. 이미 여러 차례 바닥을 경험해 봤던 터라 우승 못한다고 해서 어떻게 되겠나 싶었다. 반면에 조 감독은 나보다 더 큰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이다. 구단에서 투자도 많이 했고, 시즌 내내 경남과 비교되면서 1승 1패에 목숨을 걸었을 테니까. 그래서 조 감독의 안타까운 소식을 듣고 한동안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조 감독의 일이 남의 일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슬픔이 몰려왔다. 최근까지 양 팀 벤치에서 전쟁을 치렀던 감독이 한순간에 그렇게 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더라. 그래서 우리가 우승했을 때 선수들로부터 헹가래를 받지 않았다. 그건 조 감독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정말 유능하고 아까운 지도자가 너무 일찍 세상을 떠나 참담할 따름이었다.”

 

 

클래식 팀을 이끄는 지도자들도 힘들겠지만 챌린지 팀의 지도자들은 클래식 승격이란 숙제 때문에 더 큰 압박감을 받는 것 같다.

 

“아마 지난해에 이어 올 시즌 종료 후 챌린지에서 살아남은 지도자는 나밖에 없을 것이다. 김학범, 김병수 감독 등등 대부분 팀을 떠났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기업이 이끄는 팀과 달리 시·도민 구단들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계가 있다. 자신이 갖고 있는 실력을 제대로 펼쳐 보이지 못하고 사라지는 감독들을 보면 마음이 아프다. 좀 더 기회와 여유가 주어져야 하는데 현실이 그렇지 못하다.”

 

 

김종부 감독은 클래식 승격에 도취해 있지 않았다. 기쁨은 잠시였고 이후엔 내년 시즌 클래식 무대에서 경남 FC가 어떤 모습을 보여야 하는지 다양한 밑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김 감독이 꼽는 첫 번째 숙제는 클래식에서 살아남기. 다시 강등돼 챌린지로 떨어지지 않으려면 가장 중요한 숙제이기도 하다. 그다음에는 클래식에서 반전을 일으키고 싶다고 말한다. 그가 가장 이루고 싶은 숙제다.

 

김 감독은 경기도 화성에서 장어구이집을 운영하고 있고 인터뷰도 그곳에서 진행됐다. 친누나와 매형에게 운영을 맡기고 있지만 비시즌 때는 직접 가게로 나와 손님들에게 장어를 구워주기도 한다. 장어를 굽던 김 감독에게 프로팀 감독이 된 이후에도 가게를 계속하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자 김 감독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김종부’란 이름을 지키려고 이 일을 시작했다. 생활이 어려우면 지도자들이 어긋난 길로 접어들기 마련이다. 학부모에게 손을 내밀고, 선수를 갖고 장사를 한다. 그들을 비난할 수도 없다. 오죽했으면 그랬을까 싶다. 장어구이집은 내가 지도자 생활을 더 잘 해내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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