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이차가 호출한 첫 키스
  • 서영수 감독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31 1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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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영수 감독의 Tea Road(2)] 세계 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 망징징마이차구(芒景景邁茶區)

비 온 뒤 하늘은 맑았다. 원시림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은 도회생활에 지친 세포를 깨워 저절로 미소 짓고 춤추게 했다. 에어컨 없이 차창을 활짝 열고 마주하는 산바람이 전해주는 싱그러움은 ‘행복’ 그 자체였다. 티엔츠푸얼(天賜普洱, 하늘이 내려준 선물 보이차)을 촬영하는 중국 CCTV제작팀과 함께 다음 촬영장소로 이동했다. 티엔츠푸얼은 30여 년 전부터 중국 국사(國師, 나라의 스승)로 존경받는 쉬지아루(許嘉璐潞)가 총지휘를 하는 대형인문 다큐멘터리 작품이다. 보이차의 역사와 미래를 담아 제작되는 티엔츠푸얼은 4개 팀이 각 1부를 책임제작하고 있었다.

 

© 사진=서영수 제공

차조신(茶祖神)을 모신 파아이렁사(帕嗳冷寺)가 있는 망홍(芒洪)촌에서 동북방향으로 1시간정도 4륜구동차를 타고 산길을 올라가니 유서 깊은 부랑(布朗)족 전통마을 웡지(翁基) 고채(古寨)가 나타났다. 웡지는 부랑족 언어로 ‘미래를 점치는 신성한 장소’라는 뜻이다. 전망이 탁 트인 명당자리에 있는 웡지는 세계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로 이름난 망징징마이차구(芒景景邁茶區)에서도 가장 오래된 부락이다.

연평균기온 19.4℃, 연평균강수량 1800mm로 차나무가 성장하기 좋은 조건을 갖고 있는 웡지는 북회귀선이 지나가는 저위도 고산지대기후 특성답게 일교차가 크고 운무가 수시로 짙게 덮여 찻잎 품질이 좋다. 1800여 년 전 부랑족 선조 파아이렁(帕嗳冷)이 윈난(雲南) 북쪽에서 남하해 새로운 정착지로 정하고 차 재배를 처음 시작한 곳이 웡지다. 망징산(芒景山)해발 1700m 고지에 위치한 웡지를 중심으로 파아이렁은 산허리를 개간해 차를 재배하며 부랑족 마을을 넓혀갔다.  

 

전설에 의하면 차나무 증식과 재배기술 보급에 집중하던 파아이렁이 억울하게 죽은 후 거대한 악룡이 웡지마을에 나타나 사람을 죽이고 차나무를 파 해쳐 더 이상 사람이 살 수 없게 됐다. 불심 깊은 스님이 이 소식을 듣고 달려와 마을 입구에 앉아 불경을 큰소리로 읊기 시작하자 행패를 멈추었다고 한다. 두려움 없이 불법을 설파하는 스님에게 감복한 악룡이 잘못을 뉘우치고 커다란 측백나무로 변해 마을 수호신이 됐다. 평온을 되찾은 마을은 망징산 고차수단지 중심부락으로 위상을 이어오고 있다. 이 설화는 파아이렁 죽음을 애석해하는 집단과 누명을 씌워 파아이렁을 죽음에 이르게 한 파벌 사이에 벌어진 내부갈등을 극복하는 과정을 축약해 상징한다고 해석된다.  

 

 


© 사진=서영수 제공

 

웡지는 차재배역사 발원지답게 부랑족 전통가옥 형태를 잘 유지하고 있었다. 습기에 취약한 1층은 기둥만 세워 창고로 사용하고 주거와 취사 공간을 포함해 칸막이 없는 통구조로 된 2층에 전 가족이 함께 거주한다. 장작더미 위에 솥단지를 걸쳐놓고 취사와 난방을 해결한다. 연장자는 집 안쪽에서 자고 나이가 어릴수록 출입문 가까운 곳에 잠자리가 정해진다. 가옥 외벽에 걸린 거대한 등나무 씨앗과 표주박은 웡지가 원시림 한복판에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줬다. 급경사를 이룬 지붕은 나무기와로 얹혀져있다. 지붕 끝에는 두 개의 떡잎과 새로 돋아나는 찻잎 새순을 상징하는 세 갈래 조형물이 장식돼 있다. 이 조형물은 차나무와 부랑족이 떼어놓을 수 없는 인연임을 보여주고 있었다.  

 

웡지는 세계최대 고차수(古茶樹)단지로 이름난 천년만묘고차원(千年万亩古茶园) 핵심부락답게 전망 좋은 2층에 차 마시는 공간을 마련한 집이 많았다. 예단할 수 없는 산속 날씨답게 순식간에 구름이 몰려와 비를 흩뿌리기 시작했다. 잠시 야외촬영을 중단하고 티타임을 가졌다. 새장을 걸어둔 운치 있는 차실에서 원주민이 직접 만든 보이차를 마셨다. 대량생산을 위해 밀식재배한 차나무로 만든 차와 전혀 다른 생태환경인 고산지대 원시림 사이에서 숨 쉬는 수백 년 된 고차수에서 채취한 찻잎으로 만든 고수차(古樹茶) 매력은 남달랐다. 황금빛 찻물이 뿜어내는 쌉쌀한 맛 사이로 혀끝에 매달리는 부드러운 단맛은 달큼했던 첫 키스를 옛 기억에서 호출했다.

 

© 사진=서영수 제공

 

웡지에서 맛볼 수 있는 부랑족 전통음식은 찻잎으로 버무린 나물과 볶음요리를 비롯한 찻물로 지은 밥과 찻잎을 넣어 향긋하게 끓인 닭곰탕이 있다. 싱싱한 찻잎튀김과 달걀전에 송송이 박힌 찻잎은 향과 맛 모두 ‘양손 엄지 척’이었다. 그중 가장 독특한 메뉴는 깊은 산 맑은 개울에서 잡아온 민물 게를 숯불에 구워 갓 따온 싱싱한 찻잎과 함께 나무로 된 아담한 손절구로 찧어 밥과 함께 먹는 것이다. 촬영 일정상 아쉽게도 시식을 못했지만 다음 방문할 때 버킷리스트 1번으로 올려놨다. 

 

 

 

서영수 감독은 한국에서 1984년도 최연소 영화감독으로 데뷔했다. 

현재 미국시나리오작가협회 정회원이면서 차(茶) 칼럼니스트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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