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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저널

고종 때문에 울고 웃은 대한민국 커피史

[구대회의 커피유감] 아관파천 이전부터 조선 왕궁에서 커피 마셨다는 기록도

구대회 커피테이너 ㅣ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10.08(Sun) 15:00:00 | 1459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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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년 2월11일 새벽, 고종 황제와 태자는 궁녀의 교자를 타고 덕수궁을 빠져나와 인근 정동에 위치한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한다. 그 후 1년 동안 베베르 공사의 보호 아래 있으면서 커피를 처음 접했다는 것이 그동안 우리가 알고 있던 고종의 커피 이야기다. 그러나 아관파천(俄館播遷) 이전에도 궁중에서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이 있다. 1884년부터 3년간 어의(御醫)를 지낸 호러스 알렌이 1908년 남긴 저서 《Things Korean(한국 풍물)》에 의하면, 왕을 알현하기 위해 기다리는 동안 궁중의 시종들은 잎담배·샴페인·사탕뿐만 아니라 홍차와 커피도 내왔다고 한다. 이처럼 1880년 중반에 이미 궁중에서 커피가 음용되고 있었으므로 고종이 아관파천 중에 커피를 처음 마셨다는 설은 신빙성이 없다.

 

아름다운 돌담길로 유명한 덕수궁에는 빼어난 서양식 근대 건축물인 석조전을 비롯해 정관헌이라는 서양식 정자가 있다. 인터넷뿐 아니라 일부 커피 서적에 실린 정관헌에 대한 기록물을 보면, 고종이 대신들과 그곳에서 커피와 다과를 즐겼다고 돼 있는데,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조선왕조실록뿐 아니라 그 어떤 과거 문헌에도 정관헌에서 고종이 커피를 마셨다는 기록은 없다. 오히려 정관헌은 고종이 커피를 마신 공간이 아니라 역대 왕의 어진(御眞·사진과 그림)을 모시고 제례를 지낸 신성한 곳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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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한말 친러파의 정치적 도구로 이용된 커피

 

 1898년 9월12일, 고종과 태자는 평소 좋아하는 커피 때문에 죽음의 고비를 겪었다. 그 유명한 ‘김홍륙 독다(毒茶) 사건’이다. 당시 김홍륙은 러시아어가 능통해 통역관으로 활동하며 출세의 길을 걷고 있었다. 아관파천 이후 득세해 권력을 남용하다가 이를 규탄하는 방서가 나붙었고, 1898년 친러파가 몰락할 때 관직에서 물러났다. 같은 해 8월에는 러시아와의 교섭에서 사익을 취했다는 죄목으로 전남 흑산도로 유배됐다. 이에 앙심을 품은 김홍륙은 고종의 생일날 공홍식을 시켜, 황제와 태자가 마시는 커피에 아편을 넣게 했다. 고종은 커피 냄새가 평소와 다른 것을 이상히 여겨 마시지 않았으나, 태자는 마시다가 토하고 쓰러졌다. 태자는 그 후유증으로 치아를 18개나 잃게 되었다. 결국 이 일을 공모한 김홍륙·공홍식·김종화가 사형을 당하는 것으로 사건은 종결됐다.

 

조선인 최초로 다방을 연 인물은 영화감독 이경손이다. 그는 1927년 안국동 네거리에 ‘카카듀’라는 간판을 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그러나 아쉽게도 카카듀의 흔적은 《밀정》 등 가끔 영화에서나 등장할 뿐이다. 우리나라 근대 커피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 중 하나는 천재 시인 이상이 아닌가 한다. 그는 1933년 ‘제비’를 시작으로 ‘쯔루’ ‘식스나인’이란 독특한 이름의 다방을 열었다. 가우디에게 구엘이 있었듯이, 가난한 이상에게도 구본웅이란 부유한 친구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금홍이와의 연애에만 몰두하고 친구들에게 공짜 커피를 주는 등 다방 운영에 재주가 없었는지 여는 족족 금세 망하고 말았다. 일제강점기에도 카페로 성공하기란 쉽지 않았나보다.

 

당시 다방은 18~19세기 유럽의 카페와 마찬가지로 문학·미술·음악·사상에 대한 나눔의 장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 만한 정지용·이효석·김기림 등 유명한 예술인들이 그 시대 다방에 모여 커피 한 잔을 앞에 놓고 나라와 민족이 처한 시대의 아픔과 예술적 고뇌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그 당시 다방의 커피는 원두만 넣은 것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시커먼 커피색과 쓴맛을 내기 위해 잎담배를 넣기도 했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귀한 설탕을 듬뿍 넣어 달달한 맛으로 커피를 마셨다.

 

해방 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미군에 의해 국내에 인스턴트커피가 소개됐다. 미군이 전쟁 물자로 가져온 것을 수완이 좋은 장사치들이 몰래 빼내 암시장에서 거래하곤 했다. 인스턴트커피는 1901년 일본계 미국인 화학자인 사토리 가토가 발명했는데, 그 후 전쟁 물자로 쓰기 시작하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했다. 1950년 이전만 해도 인스턴트커피는 원두 50%와 전분 50% 비율이었으나, 6·25 때부터 미국 제너럴푸드가 개발한 100% 인스턴트커피가 등장했다. 한국전쟁이 인스턴트커피사에 한 획을 그은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1960대 말 설립된 동서식품은 정부의 지원과 자사의 노력에 힘입어 지금의 세계적인 인스턴트커피 제조기술을 확보했다.

 

50이 넘은 중년 남성이라면, ‘레지’라는 단어를 기억할 것이다. 요즘은 중소 도시가 아니면 찾아보기 힘든데, 다방에서 커피를 서빙하는 여직원을 의미하는 말이다. 꼬불꼬불한 파마머리에 붉은색 립스틱을 짙게 바른 아가씨가 손님의 옆자리에 앉아 커피에 달걀노른자를 동동 띄운 쌍화차는, 모처럼 기분을 내고 싶을 때나 주문하는 고급 음료였다. 여기에 한껏 폼을 잡고 싶으면 “김양아, 너도 한 잔 해라” 말하며, 아가씨 커피도 한 잔 더 시키는 것이었다. 이렇듯 장미·맹물·청자 등 이름만으로도 정감 있는 동네 다방은 당시 서민들 만남의 장소였고, 휴식처였다. 그러나 요즘은 커피전문점에 밀리고, 일부 퇴폐적인 인식 때문에 그 자취와 의미를 잃어가고 있다.

 

 

과거 민주화운동의 성지였던 학림다방

 

학림다방은 1956년 당시 동숭동에 위치했던 서울대 문리대 건너편에 터를 잡았다. 벌써 60년이란 세월이 훌쩍 넘었다. 당시 서울대생들에게 인기가 좋아서 ‘문리대 제25강의실’이라고 불렸다. 1980년께 민주화 세력인 ‘전국민주학생연맹’이 민주화운동을 모색하기 위한 첫 모임을 학림다방에서 가졌다는 이유로, 나중에 학생운동을 하던 이들을 경찰이 검거한 후 그 사건을 ‘학림사건’으로 명명했다. 학림다방은 동시대 예술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이청준·김승옥·김지하 등 문인의 단골집으로 알려져 유명세를 탔고, 음악·미술·연극·문학 등 예술계 인사들의 사랑방으로 애용됐다. 수필가 전혜린은 죽기 전 이곳에 들러 메모를 남기고 다음 날 자살했다. 이렇듯 시대의 풍파와 아련한 추억을 간직한 학림다방이지만, 현대적인 시설과 편리함으로 무장한 대형 커피 프랜차이즈의 공세에 고전 중이다.

 

세상에서 가장 간편한 커피는 자판기 커피다. 가격 차이는 있지만, 100원짜리 동전 두어 개만 가지면 언제 어디서든 간편하게 커피를 즐길 수 있다. 맛은 원두커피에 못 미쳤지만, 특유의 편리함 때문에 과거 전 국민의 사랑을 받았다. 1978년 등장 이후 커피의 대중화를 이끌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대학 도서관에서 공부를 하다가 마시는 자판기 커피는 달달한 휴식이었다. 커피를 다 마신 빈 종이컵은 공처럼 뭉갠 후 제기처럼 차면서 놀았다. 이 또한 지금은 보기 어려운 그 당시 대학생활이 주는 낭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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