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이 아닌 ‘스포츠’가 필요하다
  • 손윤 야구 칼럼니스트 (sisa@sisajournal.com)
  • 승인 2017.09.07 13:24
  • 호수 14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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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계 만연한 폭력, 근본적 해결책 마련돼야

 

야구계에 폭력이 끊이지 않고 있다. 최근 대한야구소프트볼협회는 선수를 폭행한 대학과 초등학교 지도자들에게 중징계를 내렸다. 선수 구타 동영상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퍼져 논란이 된 서남대 A감독은 ‘자격정지 10년’, 상습 폭행을 일삼은 전 화순초 B감독은 ‘무기한 자격정지’ 처분을 받았다.

 

여기에 서울 지역의 한 프로팀에 1차 지명을 받은 C선수와 관련한 추문도 들리고 있다. 최근 SBS 뉴스는 “서울 D고등학교 야구부 소속의 C선수가 야구부 동급생 3명과 함께 후배 선수 네댓 명을 야구방망이와 야구공으로 폭행한 사실이 드러났지만, 해당 학교는 별다른 징계를 취하지 않아 이 사건을 축소하고 은폐하려고 한 정황까지 포착됐다”고 보도했다. C선수의 경우 야구 용구를 쓰는 등 죄질이 매우 나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야구계 한 관계자는 “순간적인 감정을 참지 못하고 폭력을 행사한 게 아니라 상습적이며 폭력 방식도 악질적이다. 게다가 그 사실을 학부모는 물론이고 학교 등도 숨기기에 바쁘다”고 밝혔다.

 

이처럼 야구계에서 폭력이 사라지지 않고 있다. 한 야구인은 야구와 군대의 공통점으로 ‘단체생활과 폭력’을 들었다. 최근 군대도 시대의 변화에 따라 폭력이 거의 사라지고 있다. 야구계 역시 마찬가지다. 하지만 여러모로 나아진 면은 분명히 있지만, 여전히 폭력의 사각지대에 있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 사진=Pixabay

 

폭력을 좋은 추억으로 여기는 풍토

 

어째서 스포츠맨십을 배우는 학원 야구에 폭력이 끊이지 않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한 해설위원은 “지도자를 비롯한 야구인의 인식 부족”을 들었다. 시대가 변한 만큼 야구인 가운데 폭력을 긍정하는 이는 거의 없다. 문제는 그 말 뒤에 따라오는 ‘접속부사’에 있다. “폭력은 옳지 않다” “폭력으로 선수를 관리하던 시대는 지났다”라고 말한 뒤, ‘반드시’라고 해도 좋을 정도로 ‘하지만’이 붙는다. 예를 들면 “폭력에는 반대하지만,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있다(혹은 있었을 것이다)”고 말한다. 그렇게 접속부사가 붙으면서 폭력은 필요악이 되고 그 질긴 생명을 이어가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폭력을 좋은 추억으로 여기는 풍토다. 나름 야구선수로 성공한 경우 “(학창 시절은) 힘들었지만, 그때의 경험이 있었으니까 지금의 내가 있다” “그런 어려움을 이겨낸 게 큰 자산이 됐다”는 식으로 말한다. 즉, 폭력을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미화하고 있는 셈이다. 그리고 그 미화와 추억이 폭력은 어느 정도 필요하다는 인식으로 이어진다.

 

그리고 한국에서 야구 등 운동은 스포츠가 아니다. 체육이다. 흔히 스포츠와 체육은 같은 의미로 쓰지만, 실제로는 다르다. 스포츠의 어원은 라틴어 ‘데포라타레’(deporatare)다. 생계를 위한 노동에서 벗어난 여가나 놀이를 뜻한다. 반면, 체육은 일본 메이지 시대, 부국강병을 위한 심신단련의 수단으로 나온 것이다. 그 출발부터 스포츠의 근본인 놀이와는 거리가 안드로메다만큼이나 멀다.

 

물론, 체육이란 말 자체는 군국주의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다만 지육(知育), 덕육(德育)과 함께 청소년 교육의 중요한 요소로 삼았다. 결국, 체육은 신체 교육을 뜻한다. 체육은 심신의 단련만 중요할 뿐, 지적 능력의 향상·습득(지육)과 도덕적 요소(덕육)는 따로 배워야 한다. 이와 달리 스포츠에는 스포츠맨십처럼 도덕적 요소도 포함돼 있다. 게다가, 한국에서 운동부는 지육과 덕육은 내팽개치고 오로지 체육만 강조한다. 운동을 시작함과 동시에 학업과는 담을 쌓는다.

 

 

야구만 잘하면 모든 게 용인

 

그러다 보니 스포츠가 아닌 체육에서는 선수의 인성 문제가 거론될 때가 잦다. 지도자의 명령에는 절대복종해야 하며, 선수 개인의 자율성은 존중되지 않는다. 선수에게는 책임감과 성실함을 요구하며, 인내력과 예의를 배우는 것이 유일한 교육적 목표가 된다. 또한, 이기는 것이 절체절명의 과제다. 이기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용인된다. 승리를 위해서는 혹독한 연습과 체벌을 당연하게 받아들인다. 그런 문화가 일상적인 폭력을 낳고 있다는 것을 쉽게 유추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 큰 문제는 승리가 지상 최대의 과제니만큼, 모든 기준은 실력이 된다. 똑같은 잘못을 저질러도, 야구 실력에 따라 받는 벌은 달라진다. 하긴 그 전에 대우부터 다르다. 야구계에서 엄격하기로 유명한 어느 감독이 맡은 팀에서 몇 명의 선수가 야구공을 훔쳐 인터넷 사이트에서 팔다가 들킨 적이 있다. 그때 그 감독은 한두 명은 팀에 남게 하고, 나머지는 방출 조치했다. 그 기준은 무엇일까. 일반적으로는 죄질에 따라 그렇게 했을 것으로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 기준은 선수의 기량이었다. 즉, 경기에 쓸 수 있는 선수들은 남았고, 그렇지 않은 기량이 떨어지는 선수들은 팀을 떠났다.

 

선수는 야구를 시작하면서 야구만 잘하면 모든 게 용인되는 것을 보고 느끼고 배운다. 그것이 선후배 간의 폭력으로 이어진다. 당장 경기에 나갈 상급생이 하급생을 때렸다고, 그 상급생에게 벌줄 지도자는 아쉽게도 거의 드물다. 하급생이 실력이 뛰어났을 때는 문제가 된다. 지도자는 상급생에게 “야구도 못하는 XX가 문제를 일으켜!”라며 폭언과 폭력을 행사하기도 한다. 심할 경우는 야구를 그만두거나 전학을 가게 된다.

 

프로 역시 마찬가지다. 항상 신인 드래프트가 다가오면 각 구단은 선수의 기량뿐만 아니라 인성 등도 중요하게 지켜본다고 밝힌다. 그런데 이것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실제로 드래프트에서는 그라운드 안팎에서 문제를 일으킨 선수가 지명을 받은 사례가 적지 않다. 게다가 고교 감독 시절 강압적인 지도로 문제를 일으킨 이가 스카우트로 있는 팀도 있다. 그런 팀이 인성을 강조하는 것은 소가 웃을 일이다.

 

이번에 1차 지명을 받은 C선수의 경우도 그렇다. 그의 악행이 물밑에서 위로 드러났는데도, 그를 지명한 구단은 일언반구도 없다. 더구나 그 구단은 과거에도 그런 선수를 여러 차례 지명해 왔다. 프로든 아마든 오로지 기준은 선수의 실력. 그런 풍토가 폭력의 생명력으로 이어지고 있다. 리틀리그 지도자를 만났을 때 가장 많이 듣는 말이 얼마만큼 많이 연습을 시키고 있느냐다. 이제는 체육이 아닌 스포츠가 필요할 때다. 그것이 야구계에서 폭력을 추방하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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